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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옥 Sep 15. 2024

간절함이 전달되지 않았다

모두의 실패


열흘 사이에 5개의 제안을 하는 것은 확실히 무리였다. 미리 준비된 제안서와 경험이 있다해도 혼자 5개를 준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통상 공공의 경우 1개 당 3주의 제안시간을 준다). 하지만, 나의 열정과 집요함을 막아설 빌런(Villain : 창장물에서 악당이나 악역을 뜻함)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주변의 협력업체들과 사람들은 나를 응원하고 있었다. 약간의 가능성만 있다면, 일말의 사업기회만 있다면 언제든지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환경에서 잘 준비된 준마가 경주를 하겠다고 출발선 상에 자발적으로 서 있으니,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베팅을 잔뜩하고 결승선에 일등으로 들어오기만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또 다시 나의 무모한 도전은 시작되었다.     

          

어찌어찌해서 5개의 제안을 무사히 마치고 드뎌 처음 발표하는 날이다. 제안을 마친 바로 다음날부터 연이어 4일 동안 하루도 거리지 않고 발표일정이 잡혀 있다. 설마 5개 중 하나는 걸리지 않을까하는 심정으로 뛰어든 것이다. 제안발표는 나를 포함 두 사람이 하기로 했다. 두 개의 프로젝트가 동 시간대에 잡혀 있는 것도 있고, 나 혼자 발표하는 것도 무리가 있어서다.

      

첫 번째 발표는 우리가 매일같이 타고 다니는 지하철을 운영하고 있는 서울교통공사다. 지하철 운행과 관련된 실시간 데이터를 수집, 가공하여 개방 데이터로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해야될 일이다.      


아침일찍 준비를 하고 있다. 모처럼 양복을 입으려고 와이서츠를 찾는데 어제 저녁에 미리 준비한 옷이 맞지 않는다. 어쩐지 어색하고 단추가 제대로 잠기지 않는다. 평소에 내가 주로 하던 넥타이도 없다. 와이셔츠는 새로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고, 넥타이는 비슷한 색깔로 다른 것으로 대체했다. 시작부터 조짐이 이상하지만 이젠 이런 것에 개의치 않기로 했다.     


7시 반에 집을 나서 도서관으로 향했다. 비가 한방울 두방울 떨어진다. 혹시 비가 오려나, 네이버 날씨예보를 보는데, 오전에만 비가 오고 그 이후로는 겐다는 일정이다. 도서관에 도착하니 아차, 오늘이 휴관일임을 미쳐 생각하지 못했다. 큰 일이다. 발표준비는 제안서 쓰는데 집중하느라 거의 준비하지 못했다. 대안이 필요했다. 바로 옆에 있는 곰돌이 스포츠관을 찾았다. 이른 아침부터 아주머니들이 로비를 장악했다. 근처 커피솦을 알아봤다. 개롱역 근처 스타벅스가 생각났다. 거리는 10분거리..... 또 다시 좌절하지 않고. 걷는다.


이제 이런 분위기에 익숙하다. 비가 한방울씩 떨어지고 있어, 걸음을 재촉했다. 스타벅스까지 오는데 비는 많이 오지 않았다. 전원코드가 있는 구석을 찾아 자리를 잡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제 젊은 노땅들이 남녀 섞여 들어와 바로 내 옆에 앉는다. 구석이기도 하고 서로 남남이 모였으니 즐거울만 하다. 모양을 보아하니, 무슨 동우회 사람들 같다.     


남녀는 젊으나 늙으나 만나면 희희낙낙이다. 오늘따라 나에게 시비거는 경우가 많아졌다. 제안서 쓰는 열흘 내내 없었던 빌런이 한꺼번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개의치 않는다. 이런 소소한 방해를 즐길 수 있을 정도의 내공이 이미 내 깊은 내면에 차곡차곡 쌓여있기 때문이다.   

  


어렵게 준비한 발표가 생각처럼 술술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할 말은 다 했다. 시간이 좀 촉박하긴 하지만, 질문이 의외로 적다. 4개의 질문, 그 중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질문이 있었다. 지나고나면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아쉽다. 하지만, 그 질문에 답을 했어도  대세에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결과가 그렇다. 이유는 모르겠다. 이번에는 사람과 숲이라는 업체가 되었다. 그동안 꾸준히 제안을 해왔던 업체이다.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제안하면서 노하우가 쌓여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두 번째 날은 전직 공무원 출신인 다른 사람이 발표하는 날이다. 내가 발표하지 않아 부담은 덜었지만, 그 친구의 발표 준비 상태를 보니 암담하다. 전혀 준비가 안되어 있다. 그냥 마지못해 한다는 인상이다. 제안서와 발표자료를 본인이 만들지 않고 내가 만들었으니, 사전에 충분히 공부가 안되어 있으면, 발표는 형식적으로 흘러간다. 보나마나 이번에도 실패다. 그렇게 두 번째 발표도 허무하게 무너졌다.     


세 번째와 네 번째는 두 사람이 동시에 발표한다. 그 전직 공무원은 이번에는 발표하는 것을 몰랐다고 발뺌한다. 사전에 충분히 전달했음에도 시침이 뚝 땐다. 심지어, 다른 약속이 잡혀 발표를 못하겠다고 한다. 이런 상태라면 해도 안해도 결과는 뻔한 것이지만, 어떻게 설득했는지, 발표시간에는 나타났다. 이번에도 둘 다 보기좋게 실패했다. 하나는 낙제로 하나는 뚜렷한 이유없이 또 실패했다.     


이제는 마지막 하나만 남았다. 의기양양하게 준비할 때의 용기는 사라지고, 허탈한 마음과 이번에도 쉽지 않다는 학습효과만 남긴 채 덤덤하게 마무리하고 최종 모두 실패로 결론이 내려졌다. 짧은 시간에 연달아 5개의 시도가 실패로 마무리되니, 허탈함을 넘어 정복할 수 없는 장벽만 느끼게 되었다.    


  



이번에는 분석을 안하기로 했다. 과거의 실수를 파헤쳐 보고 싶은 자연스러운 충동은 어느 정도 의미가 있다. 실패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살펴보겠지만, 분명한 것은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지는 몰라도, 모든 것을 배울 수는 없다. 어느 정도의 경험을 얻고 피해야 할 위험이 무엇인지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중요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또 다른 실수를 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심지어 또다시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그래서 실패를 분석하는 것보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집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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