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선택
삶에서 경계해야 하는 건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 아무런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일단 선택하면 그 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잘못된 길이라면 새로운 데이터를 바탕으로 수정하고 또 다른 선택지를 만들면 된다.
지금도 안국역 근처에 있는 비원에 가면 5년 반의 짧지 않은 나의 첫 직장생활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창덕궁의 후원인 비원은 조선 왕족들의 정원으로 사용되었으며, 창경궁과 붙어있다. 내가 처음으로 근무하던 삼환빌딩이 맞은 편에 있었으니, 나는 매일 창문을 통해 비원 앞마당을 볼 수 있었다. 경복궁을 비롯해 조선의 5개 궁궐 중 창덕궁과 창경궁이 근처에 있었고, 주변에 유명한 건축물 공간사옥(현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실내 수영을 할 수 있는 현대 스포츠 센터 등이 있어 최고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길건너에 현대 계동사옥이 있었고, 북창동 한옥마을로 가는 입구에 있는 헌법재판소와 우리나라 최초의 상설 영화관인 단성사가 걸어서 10분 거리 내에 있었다.
나는 그 곳에서 결혼과 첫 아이를 얻으며 대한민국의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살아가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결혼과 함께 첫 신혼살림은 4호선의 끝자락 쯤인 상계동 주공아파트 17평 전세로 시작하였다. 사내 동아리 활동도 활발하게 참여하여, 당시 내가 참여했던 농구동아리는 YMCA 직장인 농구대회에 나가 준우승을 할 정도로 잘했다. 매주 삼선동에 있는 생활 체육센터에 모여 연습과 게임을 즐겼고, 지금의 아내가 된 당시의 여자친구는 수시로 참관하며 응원을 해주었다.
결혼 한 지 1년이 채 안된 어느날, 회사 홍보팀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결혼한 부부들을 초대해 생방송으로 진행하는 방송 프로그램에 참여를 해 달라는 것이다. 지금도 하고 있는 KBS의 ‘아침마당’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직장인 부부들을 초대해 '토크'와 '변신' 이벤트를 하는 생방송이었다. 회사 홍보에 필요한 중요한 이벤트이니 선배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생방송이지만 미리 대본도 준비되어 있고, 발표 순서도 정해져 있으며, 당시의 MC가 최고의 입담꾼인 이상벽, 정은아 아나운서였으니, 걱정할 일이 아니였다.
생방송 당일 날, 회사에서 선발된 10쌍의 부부는 여의도 KBS 별관에 새벽 6시부터 모였다. 8시부터 시작되는 생방송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그날의 토크 주제는 ‘버릇’이었고, 나는 매우 평범하고 뻔한 대본을 이미 숙지한 상태였다. 하지만 생방송이 시작되고, 각본에 따라 토크가 진행되고 있는데, 예상대로 뻔한 이야기만 반복되니 재미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거의 내 차례까지 왔다. 이미 앞에서 재미없는 온갖 버릇에 관한 이야기로 부부끼리 흉을 봐 왔으니, 재미있을 턱이 없는 차에, 사회자인 이상벽씨가 돌연 화제를 바꾼다. 지금까지 안 좋은 버릇으로 서로 흉을 봐 왔으니, 좋은 버릇으로 칭찬을 해 준 사례는 없냐는 것이다.
거의 내 차례까지 왔는데, 아뿔싸 준비한 내용이 아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나에게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겠다는 절박함이 얼떨결에 손을 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의 현란한 순발력은 단번에 분위기를 바꾸었고, 이상벽 정은아 아나운서를 신나게 만들었다. 당시 유행했던 ‘잔디인형’ 대한 일화로 재미와 감동을 준 것으로 기억한다. 덕분에 나는 회사로부터 칭찬을 받았고, 방송을 본 전국의 시청자로부터 많은 잔디인형을 선물받았다. 당시의 방송 녹화본은 비디오 테입으로 아직도 집안의 가보로 보관 중이다.
신입생활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직장상사는 바로 윗 사수이다. 그 사수는 까칠하고, 딱딱한 전형적인 경상도 사람이지만, 안동 출신답게 예의바르고 정이 많았다. 사수의 철저한 업무 스타일을 학습하느라 야근이 일상이었고, 술을 좋아해 자주 근처 호프집이나 구멍가게에서 회식이 잦았다. 그런 그 사수가 어느날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학원을 한다며 안동으로 내려가 버렸다. 내가 직장생활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아 과감히 월급쟁이를 탈피한 사람을 경험한 첫 번째 사례였다. 몇 십년이 지난 어느 날 전 직장 선배의 장례식장에서 본 그 사수는 그 때의 선택이 잘 한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직장은 위계질서가 있었다. 정기적인 공채를 통한 정규직 선발 프로그램이 있었고, 같은 시기에 들어온 사람들끼리 같은 기수라는 이름으로 똘똘 뭉치는 동지애가 있었다. 따라서 입사한 시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기수가 정해지고, 그에 따른 위계질서가 세워졌으며, 승진도 큰 이변이 없으면 순서에 의해 진행되었다. 급여수준은 말할 것도 없다. 잘하는 사실이지만 이런 질서는 97년 'IMF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연봉제 도입과 함께 사라져 갔다.
고집스럽게 한 우물만 파서 성공에 이르는 장인정신은 존중받을 만 하다. 직장도 마찬가지다. 한 직장에서 오롯이 버티고 이겨내서 정상의 자리까지 오르는 사람은 남다른 고집과 신념을 가진 사람이다. 단순히 한 곳만 고집하는 성격의 차원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며 성장했기 때문에 한 우물을 파서 성공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안주하고 변화가 두려워 처음 정착한 곳만 고집한다면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나에게 직장생활을 처음 알려준 사수의 돌발행동은 나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젊은 나이에 빠르게 판단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찾아 결단하는 모습에서 직장은 적당하게 안주하며 편하게 생활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직장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삶이란 무엇인가? 직장으로부터 제대로 대우와 인정을 받고 살고 있는가? 내가 노력하고 헌신하는 만큼 직장은 나에게 보상을 제대로 해주고 있는가?
그 때 쯤에서 선배기수들로부터 조용한 직장 항명 운동이 시작되었다. 노조설립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고, 나는 기수 대표로 은밀하게 참여하게 되었다. 1년 간의 치밀한 준비를 마치고 노조가 만들어졌고, 나는 집행부로 노조에 적극 가담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나의 첫 직장생활은 꼬이기 시작했다. 대다수 직장 노동자의 삶을 대변하고, 최소한의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취지는 외부의 정치적 모임 참가를 강요하거나, 소수 우월적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변질되면서 나의 정체성에 혼란을 야기시켰다.
나름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이어가던 나에게 노조는 걸림돌이 되었고,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친구와 점심먹으로 들렀던 삼성캐피탈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고 한달 만에 옮겨버렸다. 나의 첫 직장 환승열차는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표면적으로는 노조활동에 깊숙이 관여하고, 그에 따른 회사로부터의 알게 모르게 일어나는 불이익, 스스로 만들었던 노조에 대한 환멸 등이 있었지만, 그보다는 새로운 도약이 필요했다.
당시 나의 주업무는 기업대출을 위한 심사였다. 개인의 대출을 위해 각종 신용도를 평가하듯이, 기업대출은 재무상태, 경영현황, 회사 성장 가능성 등 다양한 측면에서 치밀한 심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대우그룹과 관련된 회사이다보니, 소신과 객관적인 기업평가가 어려웠다. 특히 대우그룹 계열사들에 대한 평가는 심각했다. 번번히 나의 평가는 박할 수 밖에 없었고, 나의 사인이 없이 상사의 직권으로 결재되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더 이상 업무에 대한 사명감 내지는 자존감이 떨어진 상태에서 직장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의미가 없었다.
후일담이지만, 내가 삼성으로 옮긴 97년 9월 이후 한 달 만에 IMF 금융위기가 터졌고, 그 후 3년 만에 나의 첫 직장은 대우그룹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