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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옥 Sep 08. 2024

나의 첫 직장은 우연이었다

모두의 선택



군대를 막 제대하고 복학한 캠퍼스의 봄은 전혀 새로운 환경이 되어 있었다. 민주화란 이름으로 캠퍼스를 점령했던 대자보와 시위 대신, 학업과 취업 준비로 강의실과 도서관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학생들로 활기를 띠며 상아탑의 본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스무 살, 대학 입학과 함께 찾아온 80년대 중반의 봄은 하루가 멀다하고 쾨쾨한 최류탄으로 오염되어 있었고, 낭만적인 캠퍼스는 찾을 수 없었다. 덕분에 시류에 휩쓸려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미래에 대한 꿈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사회와 체재에 대한 원망과 자유와 민주에 대한 그리움에 대한 토론이 더 시급했다. 그때는 그런 고민을 안주삼아 대폿집에서 막걸리로 세월을 탕진하며 보내도 누구하나 말리고 뭐라고 야단치는 사람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먹고 사는 문제는 현실적인 고민이 되지 않았다.



선배들이 편하게 일자리를 구하듯이 우리 시대에는 취업이 그리 어려운 난관은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 서너군데 기업 중에서 골라가는 시절이었고, 조직적인 억압과 부속품처럼 취급받는다는 평판때문에 제조업체의 대명사인 삼성전자조차도 후순위로 밀려있던 시기였다. 당시의 삼성전자는 지금처럼 충분히 매력적인 회사이긴 하나, 반도체는 막 시작하던 시기에다 모바일폰보다는 냉장고, 텔레비전같은 백색가전이 주력인 때라, 삼성그룹 내에서도 초 주력기업은 아니었다. 오히려 삼성물산같은 무역과 삼성생명같은 금융이 여전히 주력이었다.      


지금은 직장을 선택하는 기준이 많이 바꿨지만, 당시는 급여수준이 선택의 기준이었다. 난 평균적인 학점을 받고도 어렵지 않게 비교적 급여가 세다는 금융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다. 그것도 남들 다하듯이 행시니 회계사니 고시 공부 놀이에 2년 가까이를 낭비한 후였다. 이처럼 당시만 해도 일자리를 구하고, 더불어 먹고사는 일을 걱정하는 시대가 아니었기에 나에겐 진정한 삶에 대한 고찰은 없었다. 다만 남들처럼 직장에 취직하여 편하고 평범하게 산다는 것이 오히려 자존감을 떨어뜨렸던 시대이기도 하였다.      

    

사실 그렇게 죽도록 외쳤던 민주화란 이름도 ‘87년 6월 항쟁과 ’88년 서울올림픽 이후, 80년대 후반이 되는 시점을 지나면서 흐지부지 되었다. 민주화란 배경을 바탕으로 몇몇의 리더들은 386세대라는 이름과 정치의 바람을 타고 국회와 정부에서 승승장구한 반면, 소위 시위대 앞에서 선봉대로 나섰던 사람들은 민주화투쟁이란 멍애를 안고 제대로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난 이도 저도 아닌 쪽에서 세상 사에 물들어 안전지대를 찾아 들어갔다.      




첫 번째 직장은 2년간의 지루한 회계사 시험공부가 실증이 나 헤매고 있을 때, 우연히 들렸던 학생처 게시판에 공고된 회사에 지원하면서 시작되었다. 뚜렷하게 원했던 회사도 없고, 그룹 공채를 적극적으로 모집하던 시기도 아닌 하반기라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직장생활을 해보면 조직에 들어가 월급쟁이로 살아가는 삶이 순탄치 않을 거라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고, 다시 각성하고 회계사 시험공부로 복귀할 것이란 얄팍한 생각의 산물이었다.       


6개월만 다닐 요량으로 서류를 넣었던 외국합작 보험회사(삼신올스테이트생명보험)였다. 그러나 처음 접한 직장생활은 나에게 달콤한 월급과 소소한 재미까지 주었다. 대기업이 아니다 보니 나는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 볼 수 있었다. 5년 2개월이란 짧은 기간 동안 주식, 채권 등 자산운용, 신용, 담보대출 등 융자업무 그리고 기업심사까지 내가 하고자 하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     


우연히 선택한 직장치고는 나름 재미있었다. 당시 재계 2위 그룹으로 위상을 자리잡은 대우가 우회적으로 투자한 회사인데다 미국에서 유명한 올스테이트와 합작한 신생 보험회사로 급여수준, 복리 등 만족할 만한 수준이었다. 전공인 경영학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투융자부’가 처음 발령받은 부서다. 보험료로 수납한 돈을 채권, 주식 등에 투자하고, 기업과 개인에게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일이 주업이니, 전공도 살리고, 다양한 업무를 배울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첫 번째 업무는 여직원과 함께 매일 주변 은행을 돌며 통장에 입금내역을 찍어오는 것이었다. 재미있었던 것은 당시만 해도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지 않아 대출이자를 처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어, 수작업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개별적으로 원장이 있었고, 대출이자 계산도 주판이나, 계산기로 일일이 계산하여 원장에 기재하는 방식이었다. 매달 이자납일 때가 되면 개인이 개별적으로 전화하여 이자금액을 물었고, 나는 원장을 찾아 날짜와 이율을 곱해 전화로 알려주면, 개인이 회사통장으로 입금하고, 입금된 금액을 통장을 통해 확인하고 일일이 원장에 기입하는 일이 주업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원시적이지만, 낭만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루는 문서작업이 필요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부서에 컴퓨터는 여직원이 주로 쓰는 두 대 밖에 없었다. 눈치를 보다 여직원에게 양해를 얻고 1시간만 쓰기로 하고, 문서작업을 하는데, 완성을 못하고 자리를 다시 내줘야 했다. 그 때 여직원에게도 쫓겨나야하는 처지가 슬퍼 지하에 있는 커피솝에서 코빠드리고 있었더니, 주인 아주머니가 불쌍히 여겨 커피를 공짜로 준 기억이 새롭다.     


나의 첫 직장생활은 우연히 시작되었지만, 97년 삼성캐피탈로 이직하기까지 5년 2개월 동안 많은 추억과 흥미로운 이벤트를 남겼다. 기회가 되면 흥미로웠던 첫 직장생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있기를 바란다. 외람되지만, 첫 직장은 '97년 10월 시작된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대우그룹이 망하면서, '01년 한화생명으로 흡수합병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첫 직장이 이렇게 어이없게 망하면서, 나의 직장 흑역사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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