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실패
삶은 자연스럽고 즉흥적인 변화의 연속이다. 그 변화에 저항하지 말라. 이는 슬픔만 만들 뿐이다. 현실은 그저 현실이게 내버려둬라. 모든 것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도록 내버려둬라. - 노자 -
믿음은 오랜 경험과 삶에서 잠재의식 속에 저장되어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하는 프로그램과 같다. 따라서 왠만하면 변하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신념도 실패가 거듭되면 흔들리기 마련이다. 8년간 중소기업에서 갈고 닦은 것 중에 하나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과 방법론을 터득하는 것이다. 특히 오랫동안 전략본부장을 맡으며 주로 하던 일 중에 하나가 제안작업이고 보니, 제안하는 과정에서 수주가능성을 예측하는 확률은 비교적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90% 이상의 확률을 보인 사업에서 보기좋게 실패하였다.
4개월 넘게 준비한 사업이다. 전 직장에서 영업을 꽤 잘하던 후배가 그동안 고객관리를 잘 한 덕에 사업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이다. 마침 창업을 준비하고 있던 터에 나에게는 행운과도 같은 좋은 기회였다. 정부의 예산삭감과 코로나 팬데믹 이후 고금리, 고환율, 고물가 등 3고에 다른 경기침체로 가뜩이나 얼어붙은 시장에서 사업기회를 얻기는 쉽지 않다. 이번 사업을 수주하게 되면 창업과 동시에 회사가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뿐만 아니라 이 기회를 토대로 다른 사업으로 확장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 무엇보다 중요한 사업이다.
공개입찰을 통해 사업을 수주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업의 이해와 전략이 중요하다. 전략 중에도 경쟁력있는 사업구도와 경쟁사를 압도할 수 있는 킬링 메시지가 필요하다. 잘 되어있는 영업 덕분에 사전에 정보를 충분히 확보하여 미리 사업을 준비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고객사의 시스템 운영을 담당하고 있는 자회사가 직접 팀에 합류하여 강력한 사업구도를 만들 수 있었다. 경쟁력있는 킬링 메시지도 그동안 현장에서 익힌 경험과 노하우를 활용하여 비교적 쉽게 뽑았다.
하지만, 진행 중에 문제도 있었다. 공동으로 준비하던 업체가 미리 시장에 흘리는 바람에 경쟁업체에서 주관기관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공동업체가 하기로 한 영역이 빠지면서 예산은 반으로 줄고 공고날짜도 당초 예상보다 3개월 지연되었다. 흔치 않은 과정이라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동안 착실히 사업준비를 해왔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다. 사업 공고와 함께 제안팀이 꾸려졌고, 주어진 3주를 꼼꼼하고 치밀하게 준비하였다. 수차례의 리뷰와 수정을 거쳐 제안서와 발표자료가 만들어졌고, 나 또한 혼신의 힘을 다해 밤낮으로 제안작업에 매진하였다.
고객사의 자회사까지 포함되어 경쟁력있는 전략이 만들어졌고, 참여업체간 리뷰시간에도 만족할 만한 피드백을 받으며, 마지막까지 나름 경쟁력있는 가격으로 입찰를 마치고 결전의 날만 기다렸다. 발표일까지 남은 3일은 오로지 나의 몫이었다. 15분의 발표와 10분의 질의응답을 위해 수없이 반복적인 연습과 리허설 그리고 피드백을 통한 발표내용의 수정 등이 이어졌다. 그동안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신감을 얻은 우리팀은 압도적인 승리를 예감하고, 결전의 날 10명이 넘는 멤버들이 발표자리에 함께 했다. 화상을 통한 온라인 평가라 발표 준비 2시간 전부터 미리 시스템 환경을 세팅을 하고 테스트를 마친 나는 그동안 고생했던 정신적 육체적 고충을 보상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제안에 참여한 업체 6개 중 첫 번째로 발표를 하게 되었다. 준비가 잘 되어 있는 팀은 오히려 첫 번째가 유리하다는 통설이 있어, 최고의 조건이 갖춰진 셈이다. 첫 번째로 발표를 하면 평가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잘 준비된 팀에게는 유리하다. 발표시간이 다가오면서 나의 아르데날린은 최고조에 달했고, 심장 박동수는 경주를 앞두고 있는 말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발표는 최상의 컨디션으로 시간내 마치게 되었고, 잘 마친 발표에 고무되어서 바로 이어지는 질의응답시간은 조금은 아쉬움을 남겼다. 심사위원들로부터 10개에 가까운 질의를 받았고, 순차적으로 하나씩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몇가지 실수를 저질렸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한 나머지 제안서 페이지를 잘못말했고, 일부 질문사항에는 쓸데없이 시간을 많이 허비하였으며, 시간에 쫓겨 마지막 두 개의 질문에는 제대로 답을 못했다. 하지만 발표가 워낙 깔끔하게 끝났고,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제대로 전해졌다면 수주는 문제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모든 발표가 끝날 때쯤 공개된 결과는 기대와는 정반대로 최악이었다. 6개 업체 중 꼴찌였고, 입찰가격도 우리보다 낮게 쓴 업체들이 셋이나 되었다. 발표를 끝내고 그동안 고생한 것에 대해 회포도 풀고, 출출한 배속도 채울 겸 이른 저녁과 함께 술을 한잔하며 기다리고 있던 나는, 발표 순간 정신이 혼미해지고, 극도의 상실감과 좌절감에 빠져들었다.
질의응답에 다소 실수와 부족함이 있었다 하더라도, 발표가 완벽했고, 미리 제출한 제안서가 충실하게 채워졌기에 제대로 평가를 했다면 1등은 부족해 보여도, 꼴찌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발표 순간에는 현실을 부정하는 마음이 앞서, 냉정하게 분석할 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과욕이 부른 참사가 아닌가 싶었다.
통상적으로 보면 고객사의 시스템을 운영하는 자회사가 참여하는 사업은 거의 대부분 수주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그 점을 너무 강조하였고, 4개월 전부터 철저히 준비해 왔다는 것, 그리고 내부 사정을 너무 많이 알고 있다는 점 등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어, 심사위원들에겐 공정치 못하다는 위화감을 조성한 것이 아닌가 싶다.
몇 일을 아무 것도 못하고 반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냈다. 그동안 공을 들인 것과 노력에 비해 예상치 못한 결과에서 오는 실망감은 뼈속까지 미치는 아픔과 다 잡은 물고기를 눈 앞에서 놓쳐버렸다는 아쉬움에서 오는 좌절감으로 쉽게 감정을 추스를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나를 믿고 일을 같이 도모했던 협력업체들에게 면목이 없다. 그들 또한 나에게 기대한 만큼 실망감이 클 것이다.
하지만 냉철한 분석이 더 필요하다.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지식이 한꺼번에 무너진 상황을 인지해야 한다. 이런 경우 원인을 밖에서 보다 안에서 찾아야 한다. 내가 평상시 강의하고 발표하던 습성이 온라인 평가에는 적절하지 않을 수 있었다. 강의할 때는 톤이 높고 제스처가 큰 반면, 온라인 발표 때는 낮고 안정된 톤에 부드럽고 공손해야 했다. 또한 짧은 시간에 많은 지식을 전달하는 것보다, 핵심 사항을 쉽고 간결하게 전달했어야 했다. 질의응답도 장황하지 않게 간결하고 짧게 요점만 말하고, 사소한 질문에도 누락없이 다 응답을 했어야 했다. 평가로 들어온 사람들이 전문가들이 아닌 일반 정부기관 및 공기업의 담당자들로 채워지는 현실을 간과한 것이다.
실패는 뼈아프지만, 성장을 위해서는 넘어야할 산이다. 완벽하다고 생각한 것은 나만의 자의식이고, 편협한 사고일 수 있다. 당장은 원인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수 있다. 시간을 두고 실패한 원인을 면밀하고 정확하게 파악해야, 다음 번에 같은 실수를 하지 않고,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 해법을 찾을 수 있다. 상처받은 내 마음도 다스려야 한다. 나의 생각과 마음은 변하고 흘러가는 것이라고 자기 최면을 건다. 내가 느끼는 감정과 고통은 내가 아니고, 찰나이며, 곧 회복된다는 '알아차림'의 정신수양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