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실패
연 매출 200억원 규모의 스타트업 대표 A씨는 최근 신규 서비스 개발 과정에서 베트남 개발사의 손을 빌렸다. 기획부터 설계까지는 자체 개발자가 맡았지만, 대부분의 단순 코딩 업무는 다른 스타트업 대표를 통해 알게 된 베트남 개발자들이 담당했다. A씨는 "국내에 개발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기업들이 개발자 모시기 경쟁을 벌이면서 대기업도 아닌 스타트업은 충분한 자체 개발 인력 확보가 쉽지 않아졌다"며 "당초 예정된 사업 계획에 맞추려면 해외 개발자의 손이라도 빌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걱정과 달리 개발자들의 코딩 수준도 크게 떨어지지 않아 놀랐다"고 설명했다
최근 국내 기업들 사이에서 동남아 지역의 개발자들에게 일부 개발 업무를 맡기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국내에선 고질적인 개발자 부족 탓에 네이버, 카카오뿐 아니라 우아한형제들, 직방, 당근마켓 등 규모가 큰 스타트업까지 개발자 확보 경쟁에 불이 붙은 적이 있다. 지금은 개발에 대한 투자가 주춤하며 수요가 예전만 못하지만 여전히 개발 비용에 대한 이슈는 남아있다.
또한, 대기업에 비해 처우 개선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는 스타트업은 서비스 개발 일정에 차질을 빚지 않기 위해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다. 개발자 몸값이 뛰면서 인건비 비중이 높은 개발 비용이 상승한 것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동남아 개발자의 손을 빌리는 이유다. 이전에는 개발 외주 기업들이 중국, 인도에 본사를 둔 곳이 많았으나 인건비 상승으로 동남아로 옮겨가는 추세다.
이런 이유로 최근 몇 년 사이에 베트남 아웃소싱 전문업체들이 하나 둘 서울에 법인을 설립하고, 국내 대기업 SI업체들(삼성SDS, LG CNS, SK C&C)과 협력계약(MOU)를 맺으며 본격적으로 인력 공급을 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은 동남아에서 스타트업 창업이 가장 활발한 지역으로 젊은 인구의 비중이 높고, 교육 수준도 높은 편이라 과거 인도 개발자들을 대체할 역량은 충분히 갖춘 것으로 파악된다.
전 직장에서 베트남 개발자들과 같이 일한 경험이 있는 나는 최근 베트남의 중견 아웃소싱 업체의 한국 법인 대표를 만났다. 내가 직접 추진하는 프로젝트 혹은 개발 예산이 부족한 업체들에게 베트남 인력 공급을 위한 비즈니스를 협의하기 위함이다. 언어적 문제, 사회적 인식문제, 프로젝트를 해석하는 문제 등 본격적으로 베트남 개발자들을 활용하기에는 넘어야 할 산들이 많지만, 조만간 일하는 방법과 프로세스, 정서적 문제 등이 해결되면 빡빡한 예산으로 실패하는 프로젝트의 위험을 줄일 수있는 방안이 하나 마련되는 셈이다.
더불어 베트남 현지 법인을 대상으로 하는 비즈니스를 연결하는 통로가 될 수 있어, 소중한 비즈니스 파트너가 될 수 있다. IT 환경으로 보면 현재 베트남은 우리나라의 2000년대 초반의 환경과 비슷하다. 당시 우리나라는 IT인프라에 대한 투자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던 시절로 미국, 유럽 등 선진업체들을 대상으로 벤치마킹과 기술 전수를 받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컨설팅은 PWC, EY, Deloitte, KPMG 등에 맡기고, 하드웨어는 IBM, HP, EMC 등에 의지하며, 소프트웨어는 Oracle, Microsoft, SAP 등에 종속되었다. 당시 IT 부서에 근무하고 있던 나는 선진업체들의 신기술과 지식을 배우겠다는 명목으로 해외 출장을 자주 갔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기업들은 'IT 시스템'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업종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으나, 은행, 카드, 증권, 보험 등 실시간 비즈니스를 주로 하는 기업들은 시스템에 대한 의존도는 절대적이다. 예를 들어 실시간 트레이딩을 해야 하는 증권 시스템에 오류가 발생하여 장 중 거래가 잠시 중단된다고 생각해보면 끔찍하다. 실제로 삼성카드에 근무할 당시 시스템 장애로 약 10분간 카드 승인이 안되는 경우가 생겼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 피해는 엄청났다. 평소와 똑같이 승인을 시도하던 고객은 장애로 승인이 안된다는 것을 알고, 바로 다른 카드를 사용하였고, 적지 않은 고객이탈을 경험해야 했다. 이로 인해 시스템 운영을 책임지고 있던 삼성SDS를 상대로 약 200억에 대한 책임을 물은 적이 있다. 이처럼 시스템 의존도가 높은 금융업은 IT에 대한 투자가 어마 무시하다.
규모가 있는 금융업체들은 ‘차세대 시스템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10년 단위로 수백억에서 수천억을 투자하여 시스템을 새로 구축하는 관행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고, 그때마다 엄청난 개발인력과 2년 내지 3년이란 시간적 투자가 필요하다. 나는 현업에 있을 때 직접 세 차례에 걸쳐 대규모 금액이 들어가는 장기 프로젝트를 수행한 경험이 있다. 다양한 자재와 생산공정을 가지고 있는 제조업이 비교적 글로벌하게 표준화가 되어 있는 반면, 우리나라 국민들의 정서와 문화가 깊숙이 관련되어 있는 금융업은 글로벌 표준이 통하지 않는다. 특히 ‘빨리빨리’ 문화는 상대적으로 느긋한 금융 프로세스를 추구하는 유럽과 미국의 선진 시스템 적용을 어렵게 한다. 예를 들어 대출은 하루에 처리되어야 하고 다양한 외예 규정이 적용되어야 하는 우리 정서와 대출하는데 일주일 이상 소요되고 정해진 원칙에 의해 이루어지는 서양의 시스템은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구자적인 심정으로 금융 패키지를 적용하는 프로젝트를 시도한 적이 있다. 은행을 비롯해 대부분의 우리나라 금융업체는 시스템 구축에 엄청난 금액을 투자하여 빅뱅(Bing Bang) 방식으로 전 시스템을 한꺼번에 새로 구축한다. 통상 2년이 넘는 기간동안 엄청난 개발자가 필요하고, 현업이 요구하는 내용을 다 수용하다 보면, 당초 계획했던 일정을 맞추는 경우는 거의 없다. 태생적으로 경쟁입찰에 따른 예산 부족, 임금상승과 노동여건의 개선이 오히려 예산 범위 안에서 일정을 맞추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미 잘 만들어져 검증된 해외 선진 금융 솔루션을 도입하여 최소한의 커스터마이징을 통해 우리의 실정에 맞게 적용하는 프로젝트를 시도하였다. 글로벌 컨설팅 회사와 협업하여 전 세계에 나와 있는 금융 솔루션을 대상으로 벤치마킹과 엄격한 선정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스위스 회사가 만든 솔루션을 도입하기로 했다. 다양한 국적의 엔지니어와 컨설턴트가 투입되었고, 통역을 위해 IT 전문 동시통역사들도 참여하였으며, 커스터마이징 개발을 위해 국내 굴지의 SI 업체도 동참하여 프로젝트 참여 인원만 200명에 달했다.
그러나 2년에 걸쳐 진행된 프로젝트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표면적으로는 당시 카드대란으로 인해 내가 몸담고 있던 캐피탈사와 카드사가 합병되면서 자연스럽게 프로젝트가 중단된 것이지만, 과정상 실패 가능성이 높았다. 가장 큰 이유는 선진 금융 솔루션을 적용하기엔 아직 우리나라 정서나 환경이 성숙되지 않았다. 그동안 관행처럼 진행되었던 수많은 예외 적용이 없어져야 했고, 빨리빨리 처리되어야만 하는 프로세스는 원칙과 룰에 의해 진행되어도 문제가 없는 정서가 마련되어야 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금융시스템은 독보적이며, 최첨단 IT인프라의 집합체라 할 수 있다. 그 어떤 나라에도 없는 복잡함과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검증되어 전 세계 수많은 금융기관에서 잘 쓰고 있는 솔루션도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많은 커스터마이징과 변형이 이루어져 전혀 다른 솔루션으로 거듭나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는 IT인프라 측면에서 글로벌 표준이 아닌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것들이 많다. 여러 단계를 순차적으로 거쳐야 하는 프로세스를 토대로 여러 화면으로 구성되어야 하는 시스템은 하나의 화면에서 모든 업무가 이루어지도록 만들어졌다. 다양한 예외 규정과 요구사항을 수용해야 하는 시스템은 복잡성과 다양성을 포기할 수 없다. 이런 것들은 그동안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개발자들이 야근을 불사하는 열정과 휴일도 반납하는 희생정신으로 일궈 낸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여전히 다양성과 복잡성은 유지한 체, 노동환경 개선과 임금체계는 선진화되었으나, SI업체가 주도하는 빅뱅방식의 자체 개발은 변화되지 않았다. 차세대로 명명하는 대형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서는 프로세스 혁신을 통한 간결화, 고객 서비스 혁신을 통한 표준화, 글로벌 표준을 받아들이려는 국민들의 성향 변화 등 아직도 개선되어야 할 것들이 숙제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