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선택
인간은 불행해지는 건 쉬워도 행복해지기는 어렵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은 뭔가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유들을 제거하라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불행은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것이니 말이다. - 쇼펜하우어 -
인간의 본질은 태어나는(Birth) 순간부터 죽는(Death) 날까지 선택(Choice)의 연속이라고 철학자 사르트르가 말했다. 그 수많은 선택 중에 대부분 성공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높으면서도 운명적으로 선택을 강요받고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삶일지 모른다. 하다못해 매일 먹는 점심을 짜장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 결정하는 것부터, 출근길에 지하철을 탈지 버스를 탈지, A라는 주식에 투자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운동을 위해 헬스클럽에 가야 할지 요가를 시작해야 할지. 온갖 잡다한 선택 속에서 최고의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대부분 내가 선택한 답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만, 번번이 오답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선택하는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면 아무런 선택을 하지 않거나, 정답이 아닌 오답을 피해 가는 선택을 하는 것은 어떨까? 배수의 진을 치거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전법으로 매사를 패기와 도전정신으로 최선을 다하다 보니, 실패에 따른 아픔이 너무 커서, 한동안 힘들어하는 내 모습을 볼 때마다, 무엇이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절망과 후회를 하며 살지만, 나에겐 가장 후회스러운 일이 주식에 투자한 것이다. 20년이 넘도록 주식투자를 해서 어지간히 잃어버려, 이제 더 이상 안 해도 될 것을 무슨 오기로 아직도 하고 있는지? 시장이 언젠가는 나의 정성을 이해하고 그동안 잃은 것을 되돌려 주지는 않아도 더 이상 잃지 않게는 할거라는 나의 근거 없는 자신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믿을 만한 S전자에게도 배신을 당하며 종지부를 찍었다. 더 이상 내 사전에 주식으로 인한 재테크는 선택지에서 제거되었다. 그동안 주식투자를 위해 들인 시간과 노력, 그리고 마음의 상처를 생각하면, 주식투자라는 선택을 안 하는 쪽이 백배, 천배 좋았을 것이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자신이 ‘최선’의 선택을 하길 바란다. 지금 이 순간 내리는 내 결정이 최선이기를, 후회없는 선택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선택을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생각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우리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오히려 결정을 그르치거나, 후회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큰 후회로 돌아오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본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애당초 아무런 선택을 안 했다면 더 좋은 결과를 유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일이든 선택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아니 선택에 앞서 무언가를 꾸준히 하지 않으면 삶에서 뒤처지고,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에서 어느 순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생각 없이 보내는 시간이 그래서 필요하다. 그런 마음으로 나는 어제 모처럼 하남에 있는 숯가마를 찾았다. 타닥거리며 붉게 타오르는 장작불을 바라보며 무념의 세계에 빠져보는 것이다. 노천탕 옆에 놓인 평상에 누워 코발트색 가을 하늘 아래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는 구름을 바라보며 일상에서 벗어나 보기도 한다. 나는 하루종일 아무일도 않하고 심지어 매일 읽던 책 한 줄도 않읽으며 하루를 그대로 흘러 보냈다.
나에겐 30을 바라보는 큰 아이가 있다. 감성이 예민하지만, 주체적인 생각으로 늘 변화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나를 닮았다. 하지만 무모할 정도로 결단하는 성격은 늘 불만이다. 어렵게 취업하여 잘 다니던 직장에서 1년 반 만에 그만두더니, 몇 년 안에 자기 가게를 열겠다고 호기롭게 포부를 밝히며 요식업 주방에 취업하고, 몇 개의 가게를 전전하며 요리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지금은 밤에는 배달일을 낮에는 자유로운 시간을 이용해 새로운 일을 꿈꾸는 불확실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답답한 마음에 단 둘의 시간을 만들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떻게 할거야? 계획은 있는 거냐? 나를 비롯해 가족들이 걱정하는 데 무슨 생각으로 사는 지 궁금하다?” 큰 아이의 대답은 간단 명료했다. “아빠, 아빠가 내 나이쯤에 나를 낳은 것으로 알고 있어. 그 나이 때에 아빠는 어느 누구의 도움없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했잖아. 나도 그런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해. 그냥 믿고 지켜봐 주면 안돼?”
나는 순간, 머리를 쇠망치로 얻어맞은 듯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렇구나, 내가 나이들어가는 만큼, 큰 아이도 충분히 성장했구나. 내 생각이 내 의견이 내 판단이 정답이 아닌데, 나도 모르게 나의 시선으로 큰 아이의 삶을 바라보고 있었구나. “그래, 아빠는 너를 믿지. 하지만 네가 아프거나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고 겨우 염려하는 말로 인정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작은 염려마저, 무력화 시켰다. “아빠, 나 충분히 상처받고, 남몰래 고통을 이겨내려 애쓴 보람으로 이제 충분히 내성이 생겨서 견딜만 해.”
큰 아이는 이미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살 만큼 성숙해 있었다. 옛 조상들이 구어낸 자기에는 비췻빛으로 영롱한 청자와 은은하게 희다못해 형형 색색한 백자와 더불어 회색의 토기에 유황으로 입힌 분청사기가 있다. 도자기에 대한 조예가 없어 고려청자의 위엄과 조선백자의 단아함 그리고 분청사기의 토속적이고 소박한 멋을 잘 구별하지는 못하지만, 그들이 같은 과정을 거쳤다는 것은 안다. 대지로부터 흙의 숨을 담고, 뜨거운 가마 불 속에서 혼을 주입해 단지 물건이 아니라 영물이 되어 나타난 분청사기는 비록 청자나 백자처럼 스스로 뽐내지 않지만, 드러내지 않고 자랑하지 않는 그 담담함이 매력적이라는 것을 까먹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큰 아이의 모습이 고려청자도 아니고 조선백자도 아닌데, 괜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흙으로 정성을 다해 빚어 충분하게 뜨거운 불 속에서 지펐으면 그 결과로 나온 자기가 어떤 형태를 띄게 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단촐하고 소박담담하게 살아가는 모습만 보이면 그만이다. 설령 아무런 선택 없이 무기력하게 살아간다 해도, 그런 순간조차도 삶의 여정으로 봐야 할 것이다. 내 삶 속에서 쉼표가 필요하듯이, 어느 누구도 끊임없는 노동의 선택을 강요받아서는 안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선택도 선택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