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흰 눈으로 뒤덥힌 산을 향해 "오뎅끼 데스까?"라고 외치던 눈만큼이나 순수하고 정감어린 ‘러브레터’의 주인공 나카야마 미호를 우리는 기억한다. 1995년 이와이 슌지가 본인의 소설을 기반으로 만든 일본의 로맨스 영화로 우리나라에는 IMF 구제금융으로 온 나라가 어려움에 놓여있던 1999년 겨울 개봉하였다. 무서운 속도로 성장가도를 달리던 우리의 경제가 하루아침에 무너져 물적, 심적으로 심하게 고통받던 시절이라, 찬란했던 과거를 회상하고 그리워하는 영화에 푹빠질 수 밖에 없었다. 그 시절 ‘러브레터’의 겨울공주였던 미호가 12월 6일 갑작스럽게 자택 욕조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올해 54세로 이제 인생의 반을 겨우 넘은 나이다. 갑작스런 그녀의 죽음을 뒤늦게 알게 된 나는 그녀가 1인 2역으로 열연한 '러브레터'를 다시 돌려보며 잠시 회상해 본다.
영화는 히로코(미호분)가 좋아했던 남자친구의 장례식으로 시작한다. 등산을 하던 산속에서 조난을 당해 젊은 나이에 사망한 것이다. 장례를 치르고 남자친구와의 추억을 잊지 못하는 히로코는 그의 집에서 우연히 학창 시절의 앨범을 보게되고, 앨범 뒤쪽에 정리되어 있는 주소에서 죽은 남자친구의 옛 주소를 무의식 중에 자신의 손목에 적어내려간다. 한동안 그리움으로 지내던 어느날, 그 주소로 짧은 편지를 쓰게 되면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이미 죽은 남자친구는 물론, 그 누구도 편지를 받을 거라는 것을 생각으로 쓴 편지는 아니다. 그저 그리운 사람에게 남기는 편지다. 돌이켜보니, 나에게도 이런 비슷한 추억은 있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는 학보를 우편으로 친구들과 나누는 것이 유행이었다. 학교의 이런저런 소식들을 모아 놓은 학보는 정기적으로 발간이 되었고, 학과 편지함에는 친구들과 나눈 학보들로 가득했다. 호기심과 장난이 발동한 나는 모여대에 대상을 특정하지 않고 학보를 보내, 오랫동안 학보를 교환하며 펜팔을 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이런 낭만을 즐길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동네에 여전히 남자친구와 동명을 쓰고 있는 여자가 살고 있었고, 그 편지는 남자친구가 아닌, 또 다른 '후지이 이츠키'에게 전달된다. 단순히 안부를 묻는 짧은 편지를 무시하던 그녀 또한, 학창시절 같은 반에 동명이인이었던 남학생에 대한 추억이 있던 참이다. '후지이 이츠키'라는 남학생을 두고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여자는 과거를 공유하게 된다. 동명이인의 여자는 '첫 사랑'으로, 죽음을 지켜본 히로코는 '끝 사랑'으로 한 사람에 대한 추억을 공유하며 한동안 감성의 세계로 빠져든다.
우연히 받게 된 편지를 통해 학창시절을 회상하게 된 이츠키는 학창시절 그 남자를 기억할 수 있는 흔적을 찾아내며 하나씩 소중한 추억들을 소환한다. 동명이인이라는 것 때문에 짓궂은 같은 반 친구들의 장난을 받아 들여야 하는 둘은 어느새 동지애를 느끼게 되고, 책을 좋아하는 둘은 문학반 활동을 같이 하면서 재미있는 추억도 쌓는다. 그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남자 이츠키가 책을 빌릴 때마다 남들은 읽지 않는 책들만 골라 빌린다는 것이다. 궁금한 여자 이츠키가 그 이유를 묻는다.
"제일 먼저 내 이름을 독서카드에 남기기 위해서"
'독서카드' 지금은 사라진 이 프로세스를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나도 남자 이츠키와 똑같은 이유로 대학교 때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기 때문이다. 당시 책표지 끝에 붙어있던 독서카드에 이름과 빌리는 날짜를 적어 제출해야 책을 빌릴 수 있었고, 독서카드 맨 첫 줄에 내 이름을 남기고 싶어, 새 책이 나오면 제일 먼저 빌리려 하였다. 이런 경험은 아마도 다른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평소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뚝뚝하고, 말없이 책만 읽고 지내던 남자 이츠키는 여자 이츠키에게는 엉뚱한 장난도 서슴치 않게 하는 정감어린 친구였다. 때로는 동명이인이라고 여자 이츠키를 놀리는 남학생과 몸싸움을 할 정도로 과격해지고, 자신을 좋아하는 여학생에게는 냉정하게 대하면서, 여자 이츠키에게는 친구 이상의 감정을 보여준다.
우연히 발견한 단서를 가지고 모교를 찾은 여자 이츠키는 학교에서 당시 담임선생님을 만나고, 문학반에 들려 후배들에게 인사시키는 담임선생님의 말에 '문학반' 후배들은 키득거린다. 그들 사이에는 이미 '후지이 이츠키'가 유명인사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 사이에는 '후지이 찾기 놀이'도 한다. 책들마다 제일 먼저 이름을 올린 사람이 '후지이 이츠키'이니, 신기할 수 밖에....
이렇게 죽은 한 사람을 놓고 서로 추억을 공유하던 두 여자는, 각자만의 지난 추억을 정리하기로 한다. 첫 사랑의 대상이 되었던 여자 이츠키는 오랜 감기 페렴 증세를 떨쳐내면서 열병같은 첫 사랑에 대한 추억을 되새기며, 정리하게 되고,
'끝사랑'으로 장례를 치른 히로코는 남자친구가 조난을 당한 산을 찾아 그에게 "오 뎅키 데쓰까?"를 외치며 떨쳐낸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러브레터의 명장면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당시 미호가 죽은 남자친구를 잊기 위해 절규하며 "잘 지내고 있나요?" "나도 잘 지내고 있어요"라고 하는 외침은, 당시 IMF 구제금융으로 대우, 한보를 비롯하여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졸업을 앞두고 있는 젊은 친구들은 취업문이 막혀 막막하던 시절에 강한 울림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나에게 가장 감동적으로 남아있는 장면은 마지막에 문학반 후배들이 책을 들고 여자 이츠키를 찾아오는 장면이다. 그 책은 학창시절 남자 이츠키가 자기의 이름을 제일 먼저 독서카드에 남긴 책으로 여자 이츠키가 그것을 자기만 찾아 볼 생각으로 몰래 숨겨논 책이다. 그런데 그 책을 후배들이 찾아내 들고 온 것이고, 놀랍게도 그 독서카드 뒷면에는 죽은 이츠키가 그린 자신의 얼굴 모습이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흔적을 마주한 이츠키는 아련한 추억과 그리움으로 따뜻한 가슴을 여민다.
졸업 후 10여년이 지난 어느 날 대학교 앞에 있던 단골 카페을 찾은 적이 있다. 그 날 메뉴판 뒤에 그려놓은 나의 그림 흔적을 보고, 감동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내가 느낀 감정이 이런 느낌이 아니였을까? 아니 그 보다는 몇 천배 감동적인 추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우린 너무 메마른 세상에 살고 있다. 치열하다 못해 말도 안되는 경쟁으로 사람과 사람들 간의 소중함과 존귀함을 잊고 산지 오래다. 대통령은 국민을 멸시하고, 정치인들은 자신만을 위해 산다. 오직 한강작가같은 따뜻한 인간미를 간직한 국민들만 아름다운 추억 속에 사는 것 같다. 8살의 한강이 비를 피하며 처마 밑에서 맞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는 모두 똑같이 '나'와 같은 동시대에 똑같이 공감하며 살아가는 또 다른 '나'라고 생각한 것처럼, 우리 모두 건강하고 아름답게 살아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