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잇는 금실에 대하여
한강작가가 노벨상 수상을 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한 지 어느덧 두 달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12월 10일 시상을 앞두고 노벨상 주간으로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한림원에서 행사와 이벤트를 하고 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는 이미 스톡홀름에 도착하여 인터뷰와 강연 등 이벤트를 진행 중에 있다.
어제는 작은 강연이 있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 되는 과정과 작가의 작품관에 대해 특유의 나지막하고 조근조근한 한글 강연이 있었고, 난 생방송으로 들었다. 바흐의 첼로곡으로 시작한 이 날의 강연은 문학적 품위를 갖춘 초대자들과 전 세계 사람들을 대상으로 생방송으로 공개되었다. 한강작가는 한국말로 강연을 하였으며, 이어서 스웨덴어와 영어로 반복해서 낭독하는 시간을 가졌다.
예견한 사실이지만, 노벨문학상 수상작에 대해 우리말로 하는 강연을 듣게 될 줄이야. 너무 감동적이다. 전 세계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을 통역없이 바로 듣고 이해할 수 있었으며, 연이어 낭독되는 스웨덴과 영어 강연도 너무 감동적으로 들었다(그냥 듣기만 했다).
한강작가의 글에 대한 감수성은 어릴 때부터 시작되었던 거 같다. 이사하는 날 일기장 사이에서 발견한 8개의 시가 포함된 시집은 8살인 1979년에 지은 것이라 한다. 그때 가슴속 깊이 품었던 사랑이란 의문구어가 빛을 내는 실이 되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슴을 이어주는 것이 사랑이라 했고, 그 때의 감정이 이어져 지금의 작가 가슴 속으로 이어졌다고 표현한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닥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그 후 14년이 흘러 처음으로 시를, 그 이듬해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작가는 ‘쓰는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시 5년 흐른 뒤에는 3년에 걸쳐 첫 장편소설을 완성했는데, 작가는 장편소설을 하나 완성하는데 짧게는 1년, 길게는 7년이 걸리는 시간동안 오로지 자신의 삶을 녹여놓기 때문에 장편소설은 자신의 오랜 삶과 맞바꿀만큼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속으로 들어갈 수 있어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
하나의 장편소설을 쓸 때마다 나는 질문들을 견디며 그 안에 산다.
질문에 질문을 꼬리달고 이어가며,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을 때 하나의 작품이 완성된다는 작가의 말은 예상을 뒤덮는 결론이다. 우리는 흔히 질문이 생기면 반드시 답을 찾으려 한다. 그리고 답을 찾아야 비로소 끝이 난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이 세상에 정답이 있을까? 가슴속에 끝없이 질문을 만들어 가며 사는 삶이 인생아닐까?
작가의 세 번째 장편소설인 ‘채식주의자’는 한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가? 그걸 위해 더 이상 인간이라는 종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육식을 거부하고 종내에는 스스로 식물이 되었다고 믿으며 물외의 어떤 것도 먹으려 하지 않는 여주인공 영혜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매 순간 죽음에 가까워지는 아이러니 안에 있다. 작가는 말한다. 소설 ‘채식주의자’는 대답을 기다리듯, 항의하듯, 소설 전체가 그렇게 질문의 상태에 놓여 있다고, 응시하고 저항하며, 대답을 기다리며.
2012년 봄, 삶을 껴안는 눈부시게 밝은 소설을 쓰려고 애쓰던 어느 날, 한번도 풀린 적 없는 그 의문들을 내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오래 전에 이미 나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잃었다. 그런데 어떻게 세계를 껴안을 수 있겠는가? 그 불가능한 수수께끼를 대면하지 않으면 앞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오직 글쓰기로만 그 의문들을 꿰뚫고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눈이 몹시 내리고 난 다음날, 망월동 묘지에 찾아간 작가는 광주가 하나의 겹이 되는 소설이 아니라, 정면으로 광주를 다르는 소설을 쓰겠다고, 9백여 명의 증언을 모은 책을 구해, 약 한 달에 걸쳐 매일 아홉 시간씩 읽어 완독했다고 한다. 그리고 광주뿐 아니라 국가폭력의 다른 사례들을 다룬 자료들을 장소와 시간대를 넓혀 인간들이 전 세계에 걸쳐, 긴 역사에 걸쳐, 반복해온 학살들에 대한 책들을 읽었다. 이 대목에서 작가가 한 편의 소설을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와 공부가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자료를 읽을수록 이 질문들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는 듯했다. 인간성의 가장 어두운 부분들을 지속적으로 접하며, 오래 전에 금이 갔다고 생각했던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 마저 깨어지고 부서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소설을 진전시킬 수 없다고 체념하고 있을 때, 한 젊은 야학교사의 일기를 읽었다. 1980년 오월 당시 광주에서 군인들이 잠시 물러간 뒤 열흘 동안 이루어졌던 시민자치의 절대공동체에 참여했으며, 군인들이 되돌아오기로 예고된 새벽까지 도청 옆 YMCA에 남아 있다 살해되었던 수줍은 성격의 조용한 사람이었다는 박용준은 마지막 밤에 이렇게 썼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이 소설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벼락처럼 알게 되었다. 두 개의 질문을 이렇게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후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 소설 ’소년이 온다‘는 이런 심정과 과정 속에서 태어났다.
생명은 살고자 한다. 생명은 따뜻하다.
죽는다는 건 차가워지는 것. 얼굴에 쌓인 눈이 녹지 않는 것.
죽인다는 것은 차갑게 만드는 것.
역사 속에서의 인간과 우주 속에서의 인간
바람과 해류. 전세계를 잇는 물과 바람의 순환,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연결되어 있다. 부디.
제주 4.3사건을 다룬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2021년도에 출간되었지만, 작가는 2017년 12월부터 2년여 동안 제주도에 월세방을 얻어 서울을 오가며 준비하였다. 바람과 빛과 눈비가 매순간 강렬한 제주의 날씨를 느끼며, 숲과 바닷가의 마을길을 걷는 동안 소설의 윤곽이 차츰 또렷해졌다고 한다. ’소년이 온다‘를 쓸 때와 비스한 방식으로 학살 생존자들의 증언들을 읽고, 자료를 공부하며,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잔혹함을 최대한 절제하며 쓴 ’작별하지 않는다‘는 7년의 인고 속에 태어난 소설이다.
학살에서 살아남는 뒤, 사랑하는 사람의 뼈 한 조각이라도 찾아내 장례를 치르고자 싸워온 사람, 애도를 종결하지 않는 사람, 고통을 품고 망각에 맞서는 사람, 작별하지 않는 사람. 평생에 걸쳐 고통과 사랑이 같은 밀도와 온도로 끓고 있던 주인공의 삶을 들여다보며 작가는 묻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가 우리의 한계인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는 끝내 인간으로 남는 것인가?
또한, 작가는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2021년 가을까지, 그 소설의 핵심은 다음의 두 질문이라고 한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작가는 이 두 질문 사이의 긴장과 내적 투쟁이 글쓰기를 밀고 온 동력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가는 소설을 쓸 때 자신의 신체를 사용한다고 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부드러움과 온기와 차가움과 통증을 느끼는, 심장이 뛰고 갈증과 허기를 느끼고, 걷고 달리고 바람과 눈비를 맞고 손을 맞잡는 모든 감각의 세부들을 사용한다고.
필멸하는 존재로서
따뜻한 피가 흐르는 몸을 가진 내가
느끼는 그 생생한 감각들을 전류처럼 문장들에 불어넣으려 하고,
그 전류가 읽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느낄 때면 놀라고 감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