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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옥 Dec 02. 2023

'풍금이 있던 자리'엔 풍금은 없다

bOOk rEview

[신경숙 / 1993 / 문학과지성사]


신경숙의 두 번째 창작 소설이자 한국 문단에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대표적 작품이다. 작가의 글은 현재와 과거를 동시에 겹치게 하면서 삶을 역동적으로 묘사하는 독특한 필체를 뽐낸다. 현재의 시간들은 현재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과거의 어떤 기억들과 겹쳐지면서, 내면의 공간 속으로 깊숙이 침잠해 들어간다. 그녀의 소설에 나오는 추억이라는 이름은 내면화된 삶의 무게와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깊은 정서적 울림으로 승화되어,  그녀의 소설속에서 추억은 단순히 과거의 기억들을 현재의 시간 속으로 불러들이는 것뿐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그녀의 소설 속의 인물들이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아니 더 정확하게는 그들의 삶을 하나의 소설적 문양으로 부조해나가는 작가의 독특한 현실 인식 방법까지 포함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기나긴 생 가운데, 불현 듯 튀어 오르는 응축된 한순간, 그 강도와 밀도에 관해 끊임없이 읆조리면서, ‘풍금이 있던 자리’는 순간이라는 의미 지점을 떠나지 않고 절실하게 돌고 있다. 


모네의 수련에 관해 한 편의 글을 시작하면서 ‘바슐라르’는 이렇게 썼다.


수련은 여름 꽃이다. 그것은 여름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만개한 여름꽃은 역설적이게도 여름의 끝, 결국은 자기의 끝을 알리면서 그토록 한껏 펴 있다. 피어 있는 수련은 앞으로는 더 이상 피어 있지 않을 자신의 미래까지도 안고 있는 것이다. 피어남을 통해 자기와 자기 아닌 것, 지금 존재하는 자기와 앞으로 사라져버릴 자기를 한꺼번에 체험하고 있는 수련은 그러므로, 너무나 팽팽해서 오히려 고요한 긴장이다. 수련은 우리가 체험하는 순간의 온벽한 표상물이 아닐까. 생의 어떤 한순간은 그 이후의 시절들에 내내 영향 미칠 만큼 결정적일 수 잇다. 순간이 지닌 엄청난 현재성과 현실성에 압도당하는 찰나, 그 순간 이후의 사태 또한 내 존재 깊이 등록되는 것이다. 한순간에 무엇인가 일어나고 동시에 예기된다. 순간은 그래서 얼어붙은 듯 조용하지만 운명적이거나 치명적으로 뜨겁다.(평론가 김예림의 글)


‘풍금이 있던 자리’는 신경숙 특유의 아름다운 문체가 가장 탁월하게 발휘된 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작중화자의 독백'에 가깝다. 이 작품에서, 불륜이란 사랑의 선택 앞에서 하염없이 주저하고 망설이는 작중화자의 내면 상황은 쉼표와 말없음표 사이에서 힘겹게 이어지고 있는 문장 그 자체의 호흡으로 녹아들어 보다 직접적인 문체적 감각으로 전달된다. 이런 신경숙표 문체 때문에 그녀의 소설은 한 편의 시를 연상케도 한다. 


글의 소재는 불륜이지만, 애써 불륜을 비난하거나, 험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애틋하고 아련하게 표현하고 있다. 불륜을 비난하기 보다 아름다운 추억이나 연민으로 애써 그릴려고 한다. 그런 측면에서 직설적인 표현을 삼가고 열흘간 어머니를 대신한 ‘향기나는 여자’를 빗대어 사랑보다는 불륜을 해서는 안되는 쪽으로 해석한다. 잘못된 사랑으로 상처를 받거나 주는 사람은 있어도, 사랑만은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전달하려고 한다. 


전화는 당신 아내가 받더군요. 평화로운 목소리였습니다. 당신 이름을 또박또박 대며 바꿔달라고 했을 때만도, 당신은 정말 가버렸는가? 가슴이 불덩이 같았지요. 당신 아내 옆엔 당신의 아이가 있었던가 봅니다. 당신 아내가 아이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은선아, 아빠에게 전화 받으시라고 해.

저는 가만히 수화기를 놓았습니다. 당신, 딸 이름이 은선이 였군요. 은선이, 그애의 이름을 서너 번 불러봤어요. 나물 같은 이름. 어디에 고여 있었는지 눈물이 오래 쏟아졌어요. 은선이.

- 중략 -

여기 이 고장에도 초여름, 여름.......이겠지요. 저기 저 순한 연두색들이 짙어, 짙어져서는 초록이, 진초록이..... 될 테지요. 그때즘엔, 은선이라는 당신 아이 이름도 제 가슴에서 아련해질는지, 안녕.


이렇게 이 짧은 소설은 마무리된다. 이 몇 줄의 문장에서 작중화자는 '불륜'은 더 이상 아름다운 사랑이 될 수 없음을 직감하고, 다시 불륜 이전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녀가 어릴적 경험했던 아버지의 '그 여자'가 바로 자신이 될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제목은 ‘풍금이 있던 자리’인데 풍금은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아마도 작가는 ‘풍금’을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추억의 도구로 활용한 듯하다. 어쩌면 어머니를 대신한 ‘그 여자’를 빗대어 풍금으로 표현했을지도 모른다. 풍금은 어린 시절을 소환하고, 풍금이 오랫동안 머물었던 자리는 흔적이 남기 때문에, 그 여자가 남기고 간 추억을 ‘풍금이 남기고 간 자리’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풍금은 추억을 소환한다]


'풍금이 있던 자리'는 단편소설이다. 1993년 [문학과 지성사]에서 퍼낸 이 소설집에는 '풍금이 ~'외에 '직녀들', '배드민턴 치는 여자' 등 8편의 단편소설이 더 실려있다. 그녀의 작품 세계는 독특한 마치 창살 틈으로 비끼어드는 저녁 햇살이 방안 가득한 먼지와 삶의 온갖 잡동사니들을 일순 아련한 그리움의 빛깔로 물들이듯이, 내면의 깊이로 침잠해들어가는 작가의 고즈넉한 응시의 시선은 작중인물들의 삶을 모든 들끓는 역동적 욕망의 세계로부터 떼어낸 정적과 우수가 깃들인 엷은 풍경화로 만들어 버린다. 


작가는 뜨게질을 하듯이 작중인물들이 겪는 고통의 매순간순간들을 담당한 삶의 무늬들로 엮어나간다. 들끊는 고통과 욕망의 소용돌이를 슬프고 담담한 무늬들로 엮어낼 수 있기까지의 그 정서적 거리는 고통이 하나의 추억으로 삭여지기 위한 거리에 다름아닐 것이다. 신경숙의 소설의 정서 속에는 삶의 아름다움을 향한 작가의 어쩔 수 없는 욕망이 감춰져 있다. 고통이 추억 속으로 옮겨가는 정서적 거리, 그것은 곧 고통의 미학적 거리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헤어질 때 그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팔에 내려놓았다. 
그때 그도 느꼈을 것이다. 
그녀의 팔 위에 돋아난 오소소한 소름들을,
추운가 보군, 그는 그녀의 팔을 쓸어내렸고,
소름들은 그의 손바닥에 쓸려내려갔다. 그 짧은 순간, 그녀는 울 뻔했다. 
그 울뻔한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그 밤을 지내고 난 새벽에 나타났다
[.....]  
권태로웠던 여름은 그녀에게 공허한 함정을 파놓고 떠났던 것이다.
갑자기 사랑이라니? ('배드민턴 치는 여자' 중)


이렇든 그녀의 소설은 시종일관 욕망과 고통 속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끊임없이 의식 속으로 밀물져 들어오는 추억의 미세한 틈 속으로 스며들어 곧 사라져버릴 시간의 허망하고 우수어린 표정을 표현하고 있다. 어쩌면 인간이 갖는 고통과 욕망은 같은 성격일 지 모른다. 욕망을 갈구하는 순간 고통은 그 만큼 온 마음과 육체를 점령하게 된다. 그녀의 글은 대부분 이런 갈등 속 인간 자아에 대해 서술하려고 노력한다.


'풍금이 있던 자리'는 짧은 소설이다. 하지만 소설이 가지고 있어야 할 모든 요소를 담고 있다. 소설 지망생인 수많은 사람들이 이 짧은 소설을 필사하는 데 주저없임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녀가 비록 '표절' 시비로 '신경숙 쇼크'라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지만, 초창기 몇몇 작품 속에서 풍기는 독특한 그녀만의 소설적 풍미는 충분히 향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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