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직장
직장의 사전적인 의미는 ‘사람들이 일정한 직업을 가지고 일하는 곳’ 이다. 멋진 양복에 화려한 넥타이,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사람들이 모여 열심히 일하는 사무실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멋진 양복도 화려한 넥타이도 반짝이는 구두도 필수항목이 아니고 선택항목이 되었다. 오히려 복장은 자유로워지고 일하는 장소는 물리적 공간으로 한정되어 있지 않고, 카페든 공유오피스든 자기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든 개의치 않는다.
직장의 또 다른 의미로는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직업’을 말한다.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일터에서 하는 일은 매우 다양하다. 컴퓨터를 이용해 사무를 볼 수도 있고, 공사 현장에서 중장비를 운전할 수도 있으며, 흰 가운을 입고 환자를 치료하고 있을 수도 있다.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일하는 장소나 일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으로 보면 직장을 이야기 할 때 물리적인 공간보다는 일로써 ‘직업’을 이야기 하는 것이 좋겠다.
직업으로써 일은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다. 나를 찾아가는 수단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직장인들은 OECD 국가 중 가장 오랜 시간 일하는 TOP3에 매년 들어갈 정도로 하루 대부분을 직장에서 보낸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직업을 택하든 일터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직장에 들어가는 순간 나의 첫 번째 사회적 정체성이 만들어지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를 찾아가고, 내가 하는 일이 곧 나를 설명한다. 돈을 얼마큼 버는지를 떠나 일, 동료, 조직이 바로 나의 일부이고 전부이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졌다. 이제 일에 대한 가치와 의미가 많이 바뀌었다. 근무 환경뿐만 아니라 일에 대한 본질적인 관점까지 변하고 있다. 같은 회사, 같은 장소, 같은 동료의 개념이 희석되면서 직장을 통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방식이나 방향도 변해야 될 시대가 되었다.
글로벌 IT회사에 입사한지 1년이 된 김성진(27)은 아직도 같은 층에서 근무하는 직장 동료의 얼굴을 잘 모른다. 조를 나눠 재택근무를 번갈아 하기 때문에 1년 내내 인사 한 번 못한 동료도 있다. 그나마 업무 처리를 위해 자주 연락하는 동료와는 메신저 대화나 전화 통화로만 소통한다. 김성진은 “소속감은커녕 ‘우리 회사’ ‘내 직장’이라는 생각이 안든다”며 “연봉을 올려준다는 곳이 있다면 언제든 고민 없이 자리를 옮길 것 같다”고 했다.
이처럼 소속감이 없다보니 직장을 선택하는 기준이 연봉이 되는 경우가 많다. 자연스럽게 한 직장에 정착하는 것보다 돈을 쫓아 이리 저리 옮겨다니는 철새 직장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기업은 ‘철새 직장인’들을 붙잡는 데 애를 먹고, 직장인들은 자신만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재택을 고집하는 사원과 ‘나만 출근하냐’는 중간 간부들 간의 갈등도 커지고 있다. 교육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한 신입 사원들은 역량 부족에 시달리고 있고, 기업 최고경영자(CEO)사이에선 “인사관리가 최대 난제”라는 말들이 나온다.
최근 한국경제신문과 리멤버서베이가 공동 설문조사한 결과 직장인 1200명 중 40.9%(491명)가 ‘직장 생활에서 겪는 가장 큰 애로사항’으로 ‘비대면으로 인한 인맥 관리의 어려움’을 꼽았다. 직장 내 소통이 단절되면서 업무를 배우거나 익힐 기회가 부족해져 불안감을 느끼는 사례가 많다는 것이다. 직장인들이 자주 모이는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선 “보고 형식을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볼 사람이 없다. 외딴섬에서 홀로 일하는 것 같다”는 하소연이 빗발친다. 실제로 현재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 내에서도 신입이 들어와도 별 관심이 없다. 워낙 이직률이 높다보니 직접적으로 업무 연관성이 없으면 안면을 트고 인사하고 지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이다.
내가 속한 정보기술(IT)·게임 업계가 직원 로열티를 끌어올릴 방안 중 하나로 ‘스톡옵션(주식매수선택권)’을 적극 활용하고 있는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스톡옵션은 기업이 직원에게 자사주를 일정 가격으로 매수할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다. 기업 주가가 상승할수록 자사주를 보유한 직원도 많은 수익을 낼 수 있다. IT업계 관계자는 “기업과 직원 간 유대감을 강화하고 책임의식을 높이는 데 스톡옵션만한 게 없다”며 “직원들이 회사 성장을 위해 의욕을 갖고 일하도록 독려하는 장치로 여러 기업이 도입하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이런 모습이 내가 느끼는 최근의 직장 분위기이다. 그렇다고 시대 트렌드에 맞춰 철새 직장인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이럴 때 일수록 자신만의 철학과 직업관이 필요하다. 어차피 내가 선택한 직장과 직업이 나의 일상 대부분을 차지한다. 직업을 선택할 때 처절하게 고민하고 전략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물론 요즘처럼 취업 자체가 어려운 시기에 제 입맛에 맞춰 골라간다는 것이 가능하냐고 반문하겠지만, 그래도 철저하게 준비하고 결정해야 한다. 만에 하나 생계 수단으로 어쩌다 직장에 입문했다 하더라도 직장을 통해 자신의 삶을 완성할 수 있도록 철학적 사고는 반드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