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와 주완의 이야기>
한만오의 다음 생은 축생 100년으로 확정되었지.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선택권으로 그는 반딧불이 되었어. 별빛조차 없던 어느 깜깜한 밤, 자그마한 빛이 되어 세상으로 돌아갔지. 그 불빛을 보면서 천상 부서에 있던 연우 씨도 무언가 결심했어. 천상 부서의 바이올렛은 그녀의 결정에 펄쩍펄쩍 뛰고 난리가 났었지. 궁금함을 견디다 못한 나는 천상 부서로 바이올렛을 만나러 갔어.
"바이올렛, 그때 연우 씨의 결정이 뭐였어? 당최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바이올렛은 싱긋 웃으며 말했어.
"자신도 반딧불이 되어 만오 씨와 함께 세상으로 가겠다고 했어. 말도 안 되는 일이라 나는 펄쩍 뛰며 반대했지. 웬만한 사랑이 아니고선 이곳 천상 부서에서도 드문 일이라고."
"어? 내가 지난번에 세상에 갔을 때 만오 씨가 살던 고시원 창문 앞에서 반짝이는 두 불빛을 봤어. 그 불빛 만오 씨랑 연우 씨 아냐?"
"맞아. 깜두야, 너 이 소식 들으면 깜짝 놀랄걸~ 그 두 사람 지금 천상 부서에 있어."
"뭐? 정말이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해?"
"인간 세의 100년은 천상에선 하룻밤 꿈에 불과해. 나는 연우 씨에게 천상의 하룻밤을 허락했어. 둘을 위해서 말이야. 하룻밤 꿈이 끝나기 전에 이승의 만오 씨를 찾아 같이 오라고 했어. 사실 인간의 100년이 길어 보여도 지나고 보면 하룻밤 꿈일 뿐인데, 인간들은 그걸 죽는 순간이 되어서야 깨닫지. 어찌 보면 축생보다 더 어리석은 게 인간들이야."
"바이올렛! 넌 어쩜 그리 똑똑하니? 네가 괜히 천상 부서에 있는 게 아니었어."
나는 기뻐서 꼬리를 바짝 세우고 바르르 떨었지.
"그렇게 고마우면 나에게 골골송을 바치렴."
"물론이지. 주파수 25Hz의 골골송을 부르겠나이다~ 냐옹~!"
신은 애초에 인간을 완전하게 창조하지 않아. 불완전한 인간이 삶에서 완전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뿐이야. 특히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이길 수 있는 건 없어. 연우 씨가 기꺼이 세상으로 다시 돌아간 건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지. 생명체가 환생센터를 거쳐 다시 삶으로 돌아갈 때 그 어떤 감정보다 가장 강력한 무기는 사랑이었어.
타박타박 담벼락 길을 걸어 한 집 앞에 멈추었어. 잘 가꾼 정원이 한눈에 들어오는 집이었지. 노란 야생 갓꽃과 파란 달개비, 아욱의 연분홍 꽃이 저마다 작은 빗방울을 매달고 있었어. 이제 장마도 끝물이었지. 평온하기만 한 풍경 속 어딘가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어. 바로 나 깜두, 내가 하는 일은 인간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을 지켜보는 것, 숨이 끊긴 영을 죽음의 세계로 안내하는 일이지. 곧 나의 세계로 넘어올 이들이 이 집에 있어.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말이지. 죽는 게 뭐가 그리 좋다고 같이 온다냐옹~
그들은 1938년생, 86세 동갑내기였어. 생이 두 달 남짓 남아있는 여자와 여덟 달 남은 남자였지. 어차피 둘 다 얼마 남지도 않은 생인데 왜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건지 모르겠어. 또 어떤 이야기가 나를 찾아올지 벌써 가슴이 두근두근해. 나는 담장 위에 엎드렸어. 둘의 마지막 숨이 끊어지려면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거든. 둘은 나란히 침대에 누워 있었어. 침대 옆 아이보리 협탁 위에는 이미 비워진 유리컵 두 개가 놓여있었지.
서로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었어. 둘이 곧 죽음에 이른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온했지. 나는 두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했어. 소곤소곤 잠이 쏟아질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지.
"후회하지 않아요? 내가 당신의 남은 수명을 빼앗는 것만 같아 죄스러워요. 건강한 모습으로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 아픈 모습으로 만나 그간 당신에게 짐만 되었어요. 나는 내 병이 너무 무서워요. 기억이 사라지는 순간 당신에게 어떤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할머니의 말에 할아버지는 미소를 지었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을 꼽으라면 당신을 만나 사랑한 일이오. 그리고 함께 떠나기로 한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 최고의 결정이요. 당신은 내게 단 한순간도 짐이었던 적이 없소. 당신이 아플 때 내가 옆에 있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 줄 모르오. 그리고 걱정 안 해도 되오. 당신이 기억을 잃는 순간, 대부분은 열여섯 소녀로 다시 돌아가니까 말이오. 하나도 힘들지 않고 오히려 사랑스러웠지. 난 당신과 함께 한 지난 1년이 내 삶에서 가장 행복했소."
나는 방금 귓속에 꿀이 콸콸 쏟아져 들어오는 줄 알았지 뭐야. 이 할아버지 뭐지? 둘의 속삭이는 소리에 온몸의 털이 쭈뼛 설 정도라니까. 달달함에 취해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 심장을 턱턱 치는 말들이 이어졌다고. 그래도 조금 더 귀를 기울여 보기로 했지.
"우리가 헤어졌던 게 열여섯이었지요. 70년의 세월이 꿈처럼 흘렀지 않소? 삶은 한낱 꿈이라더니 정말 맞는 거 같소. 처음 만난 순간부터 당신을 사랑했지만, 오히려 떨어져 산 긴 세월 동안 당신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됐지요. 볼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었으니 그리움이 더 커지더군요. 보이지 않는 그리움이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을 더 잘 보이게 했어요. 당신과 다시 만날 날을 수없이 상상했고, 이제 현실이 되었으니 나는 이 삶에 여한이 없소. 우리 다시는 헤어지지 맙시다."
할아버지의 말에 할머니는 빙그레 웃었어.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지.
"그래요. 저도 당신과 함께라면 저승길도 꽃길일 거 같아요. 우리 지금 잡은 이 손, 놓지 말아요."
인간 세계에서 노년기의 부부 동반 자살은 대개 생활고나 병고로 인해 벌어지지. 할머니의 삶이 두 달 남짓뿐이니 무슨 병에 걸려있는 듯했지. 인간들은 참 신기하고 대단해. 죽음까지 함께 하는 것, 고양이인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삶은 원래 혼자야. 세상에 올 때 혼자 왔잖아. 그럼 갈 때도 혼자 가야지. 둘이 간다고 해서 덜 외로울 거란 생각은 인간의 착각일 뿐이야. 때로는 사랑이 사람을 더 고독하게 만드는 독이 되기도 한다고.
둘의 죽음은 평온했지. 마치 잠을 자듯 고요했어. 서로를 찬찬히 바라보며 두 눈에 그득 담은 후에
스르르 눈이 감겼어. 이제 내가 "짠"하고 나타날 때야. 달달함에 취한 몸을 일으켜 담장 위에서 폴짝 뛰어 내려갔지. 정원을 가로질러 침실로 들어갔어. 둘의 영혼이 몸에서 천천히 빠져나왔어. 내가 기지개를 켜면서 인사를 했지.
"안녕하세요. 저는 저승국 환생센터에서 나온 깜두라고 합니다."
할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나의 두 발을 덥석 잡았어. 기지개 켜느라 위로 치켜든 두 발이 꼼짝없이 잡히고 말았지.
"어머나! 귀여워라. 저승국에서 마중 나온 저승사자예요?"
할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겼지.
"제 두 발을 놓고 반겨주시겠어요? 뭐, 제가 좀 귀엽긴 하죠. 마중 나온 것도 맞고요. 지금부터 두 분을 저승국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할머니만 바라보던 할아버지가 뒤늦게야 알아본 듯 나에게 물었어.
"잠시만요. 깜두 씨, 조금만 천천히 가도 될까요? 선화의 지팡이가 보이질 않아서요. 비가 그치긴 했지만 밖에 바람이 불 수도 있으니 겉옷도 좀 챙겨야 하고요."
"지팡이요? 곧 필요 없어질 텐데요. 숨이 끊어진 몸은 이승에 두고 가야 하거든요. 저승국에 가면 인간 세계의 것은 하나도 필요 없어요."
인간이 죽어서 영이 몸에서 분리되면 한동안은 자신이 몸을 잃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해. 한만오가 저승국으로 가며 눈보라 치는 길에서 춥다고 했던 것도 그래서야. 영은 원래 추운 걸 느낄 수 없어. 눈보라는 매섭게 치고 발은 눈에 푹푹 빠지는 거 같지만 실은 모두가 환영일 뿐이지.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었어. 천천히 서로를 챙겨 주었지. 이들은 저승길이 아니라 마치 나들이라도 가는 것 같았어.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서는 다정함이 묻어나고 서로를 챙기는 손길에선 애틋함이 느껴졌지. 준비를 모두 마치자 할아버지는 할머니 손을 꼭 잡고는 내게 말했어.
"깜두 씨, 우린 다 준비됐소. 오래 기다렸지요? 이제 갑시다."
저승국에 도착하면 환생센터 축생 부서의 오디션이 다시 시작될 거야. 둘의 삶 이야기가 펼쳐지겠지. 저승은 이승에서 도망쳐 올 만한 곳은 못 되지. 그럼에도 스스로 죽음을 택한 이들, 겁도 없이 저승국을 택한 이들, 앞으로 새롭게 펼쳐질 오디션은 또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까.
결국, 그럼에도
어째서 우리는
서로일까
세상에게서 도망쳐 Run on
나와 저 끝까지 가줘 My lover
나쁜 결말일까 길 잃은 우리 둘
찬찬히 너를 두 눈에 담아
한 번 더 편안히 웃어주렴
유영하듯 떠오른
그날 그 밤처럼,
나와 함께 겁 없이
저물어줄래?
- 아이유, Love wins 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