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생 엄마의 순산 기록
**생리현상에 대한 표현 다수 있음. 식사 중이라면 이 글을 읽지 마세요.
역학조사관을 하던 상반기처럼 바쁘고 정신없는 임신 막달을 보내고 있었다. 정확히는 ‘몸이 무겁고’ 정신없는 막달이 맞을 것이다.
배는 불러오고 날은 아직 여름에서 벗어나지 못해 덥고 습하고, 출산휴가 전까지 일은 마무리해야 하고 등등. 새로운 삶의 준비와 이전의 삶을 정리하는 것을 동시에 하자니 나름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막달의 3주 정도 앞둔 정기검진에서 ‘단백뇨’가 나왔다. 초등학생 때부터 늦게 자거나 좀 피곤하면 나오는 단백뇨가 임신 말에 이르러서야 나오게 된 것이다. 혈압도 임신 초기보다 다소 올라서(110/70->130/80) 유도분만을 권유하셨다. 아기도 주수대로 잘 크고 있고, 산모한테도 37주가 이미 넘었으니 더 이상 임신을 끄는 것이 둘 모두에게 이로운 게 당장 없다는 이야기에 마지막 진료를 보고 바로 유도분만 날짜를 잡았다.
출산휴가는 11/3부터지만 전주 금요일에 마지막 진료를 보고 얼굴 피부는 여드름으로 뒤덮고, 눈은 눈꺼풀 염증으로 새빨개져 따갑고, 혈압 때문인지 몸이 무거워선지 쳐지고 기운이 없어 힘들어져 11/1부터 쉬었다. 그렇게 이틀을 집에서 눕기만 하며 남편과 둘만의 마지막 집에서의 밤을 보내고 11/3 수요일 새벽, 유도분만을 시작하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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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순조로웠다. 질정제를 넣고 복도를 걷고 짐볼을 타며 운동을 시작했다. 내 개인적인 생리통 경험으로 초기단계의 통증? 타이레놀 먹어봤자 그닥 도움 안 되는 정도의 통증으로 오더니 점심이 지나도 더 세지지는 않았다. 3대 굴욕이라 흔히 표현하지만 병원에서 일해보고 직접 해본 간호사 출신으로서 그것은 굴욕도 아니었지만 불편감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알던 것과 경험하는 것은 역시 달랐다.
제모는 이미 왁싱을 해서 안 했고, 내진은 재작년에 질염으로 자궁경부 소작술을 받아본 적이 있어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의외로 관장(먹으면 바로 싸는 사람은 힘든 시간)과 척추마취를 할 때의 통증이 제일 힘들고 아팠다. 그래도 진통에 비하면 결국 다 별거 아니라는 후기를 남기고, 첫날은 오전 6시에 시작해서 오후 4시에 마감했다. 분만은 불발됐다.
남편이 짐을 풀어놓은 병실로 같이 올라가서 침대에 몸을 뉘이고, 조금 있다 밖에서 사온 남편의 죽 배달로 허기를 채웠다. 다음날도 유도분만을 할 거라 많이 먹지 말란 당부에 죽으로 하루간의 허기를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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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유도분만실에서 내진을 받고, 걷기를 하며 아이가 내려오길 기다리는 순간에 남편은 열심히 병원과 집을 오가며 청소, 빨래, 필요한 심부름 등을 하며 바삐 보내고 있었다. 법정 남성의 출산휴가는 10일(5일 유급, 5일 무급). 우리는 출산을 위해 앞에 5일을 쓰고, 집으로 오시는 산후관리사님이 가고 난 후 5일을 쓰기로 했다. 그리하여 남편은 오롯이 24시간을 산모와 아이를 위해 출산휴가를 쓸 수 있었다.
다음날 똑같이 새벽 6시에 내려가서 유도분만을 시작했다. 오늘까지 나오지 않는다면 산모가 더 힘들어질 수 있으니 양수를 터뜨리고 시작하겠다는 담당간호사의 말과 함께 양수를 터뜨리고 촉진제를 넣기 시작했다. 걷기 운동을 하며 1시간이 지났을까.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생리통 시작할 때 싸르르한 자궁 통증이 느껴지며 화장실에 한 번 다녀오고 누워서 태동검사를 하기 시작했다. 진통을 얼마나 오래 느껴야 내 자궁문은 무통을 맞을 수 있을 정도로 열릴까. 떨리는 마음이 되기도 전에 생리통은 점차 타이레놀이 필요한 단계에서 일년에 한 번 올까말까한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픈 생리통으로 바뀌었다.
남편에게 옆을 떠나지 말라 당부하고 마사지를 할 부위를 매섭게 일러주며 파도처럼 왔다가는 통증을 느꼈다. 평소 자세가 삐뚤어선지 오른쪽 엉덩이뼈가 몹시 더 아팠다.
“오른쪽 엉덩이! 오른쪽 엉덩이!”를 연신 외치며 쉬지 말고 마사지를 할 것을 남편에게 채찍질을 하기 두어 번이 지났을까.
체감상으론 10분? 15분? ‘으어’하는 신음소리가 나올 정도의 진진통이 시작되었는데 내진을 하던 간호사 선생님의 한마디를 들었다.
“5cm 열렸습니다. 무통 들어갈게요.”
여러 출산 후기에서 6cm 이상 급속히 열리거나 진진통이 아무리 세게 와도 4cm에서 더 진행이 안되면 무통을 절대 맞을 수 없다고 보았기에 아픈와중에도 자궁 개대 5cm가 무슨 의민지 알았다.
‘아, 이제 본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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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분만대기실에서 남편의 부축을 받아 옆에 있는 가족분만실로 옮겨갔고, 곧 무통주사를 놓아주셨다.
한 1분 정도 오른쪽 골반통은 찌르르하게 남아서 남편은 마지막 마사지를 했고, 그 뒤 진통부터는 수축이 온다는 느낌만 남고 아무런 통증을 느낄 수 없었다.
무통 천국이란 말이 이런 거구나, 체감하니 더 놀라웠다.
이미 배워서 알고, 환자들을 봐서 알고 있었으나 역시 경험과 앎은 다르다고 했던가. 무통을 맞아선지 수면마취처럼 꾸벅꾸벅 잠이 올 즈음 담당 간호사가 내진을 하더니 힘주기를 연습한다고 했다.
변비일 때 항문에 힘을 주듯이, 라는 표현이 무슨 말인지는 알겠으나 사회인의 뇌와 몸은 따로 논다. 똥을 싸듯이 항문에 온전히 힘을 주기보다 복부와 질 쪽에 힘을 주는 게 맞지, 하는 지성인의 사고로 힘을 준달까. 근데 나의 생각과 몸은 그렇게 일치하지 않는 것 같다. 왜 전문가의 지시대로 하라는지 여실히 느낀 부분이다.
“얼굴이랑 상복부만 힘들어가면 애기 안 나와요! 똥 누듯이! 해야 돼요!”
그런 디테일한 지시사항에 사회인으로서의 상식을 버리고자 노력하며 정말 변을 내보내는 노력과 동일하게 힘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친절하지만 정확한 디렉션을 준 그녀는 10-15분마다 들어와서 ‘힘주기’를 연습시켰고, 담당 간호사가 없는 방에서는 잠깐 자거나 남편과 실없는 농담을 해대며 언제 뱃속의 아가가 세상으로 나올지 얘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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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통이 들어가고 3시간이 될 무렵, 10cm 자궁문이 다 열렸다는 소릴 듣고 담당 과장님이 들어왔다. 수술세트를 부산스레 준비하고 포지션을 쇄석위(교과서에서 보고 오랜만)로 두 다리를 벌려 올려놓고는 회음부 절개를 하셨다.
“자, 이제부터 힘주고 빼라는 대로 해야 돼요. 안그럼 아기 어깨 골절될 수 있어요. 시작합니다.”
연습했던 힘주기를 끙차끙차 머리에 핏줄이 서는 느낌이 들게 세 번 정도 시도하고 나니 마지막 쑥 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정확히는 쑥, 이 아니라 인생 x을 누는 기분이었다. 질과 항문이 하나로 합쳐지도록 찢어지는 기분(은 들지만 무통으로 통증은 없는)과 느낌이었다.
얼떨떨하게 나왔나 싶을 때 내 위에 아기를 턱!, 하니 올려놓는다.
이게 뭐람. 열 달을 동거 동락하던 그 앤지 남의 집 강아지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작고 아담하고 귀여운 울음소리를 내었다.
감동의 눈물보단 정신없이 42.195를 뛰고 난 뒤 결승선을 통과하는 선수처럼 힘을 빼고 나니 더 졸음이 몰려왔다.
졸림 반, 어벙벙함 반으로 있을 때 남편이 이마를 어루만지며 “고생 많았어. 아기가 너무 이쁘다.” 나를 토닥토닥했다.
*태어날 때 응애응애 짧게 울더니 집에 와서도 울음이 짧다. 잘 먹고 잘 자고 잠이 긴 걸 보니 예민한 아빠를 닮지 않고 둔한 나를 닮은 것 같다.
양수막과 피범벅을 씻겨내고 아이를 내 가슴 위에 올려주었다. 회음부 후처치도 모두 끝나고 1시간 정도 출혈량을 체크할 겸 아이와 남편과 나 세 사람만의 시간을 보내었다. 아가는 성급하게 세상에 내보낸 부모가 궁금해선지(단순 근육때문이겠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렸다. 한참이 지나야 시력이 보인다는 건 알지만 눈을 뜨고 요리조리 보는 갓 태어난 아기의 모습은 신기했다.
그렇게 11/4 오후 2시 22분.
10개월간의 동거를 끝내고 바깥세상에서 조우한 우리는 2박 3일간의 각자 병원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처음 살아보는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임신 초기부터 콘셉트가 착실한 효녀 덕분에 입덧도 임신 중기도 출산까지도 아주 요란하지 않게 잘 넘어간 것 같다. 특히 순산하게 해 준 딸내미 덕분에 어디 가서 출산해봤다는 명함도 못 내밀겠다. 15분 진통 후 출산이라니. 물론 회음부는 아직도 욱신거리고 변을 볼 때 힘이 든다지만 신생아 육아 치고 매우 순한 맛으로 잘 자주고 잘 먹어주어 비교적 수월하게 지나가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