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학과를 졸업하고 간호사를 하다가 사무실에만 앉아서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하루 종일 일하는 직업은 흔하지 않다. 대개 간호사 경력을 살려 이직을 하면 어느 정도 보건 현장과 관련 있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꼭 보건이 아니더라도 사람을 응대하거나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사무실에서 자리를 지키는 것보다 할당량이 많은 것이 보통이다.
내 경우는 아니다.
사람들을 만나긴 하나 직장동료들이고, 클라이언트가 있으나 나와 직접 소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구매부와 영업부에서 직접 커뮤니케이션하고 그 외 필요한 부분에 대한 자문 같은 형식으로 진행하여 그렇다.
이전에 하던 일들 중 가장 사무사무한 사무직이다. 기존의 일들은 항상 대상자, 감염자, 이해관계자 등을 직접 만나고 소통하고 수집하는 일들이었기 때문에 모니터만 바라보는 일은 사실 처음이나 다름없다.
간호사 출신에게 사무직이란, 사무실에 앉아하는 직업이란 무슨 의미일까.
개인적으로는 '꿀', '편안함' 이런 것이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쓸데없는 감정 소모와 가면을 쓰며 응대를 할 필요가 없어 에너지가 덜 든다는 게 이유이다.
그렇지만 가장 큰 이유는, '목숨'이라는 키워드가 일을 하면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환자가 있는 병동이 아닌 곳에서 간호사가 필요한 직업을 얻자면 환자가 아니거나 환자였거나 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직접적인 목숨이나 중환자 상태를 논할 필요가 없는 평온한 사람들 말이다.
좀 피곤하다고 실수하면 나오는 결과는 기껏 해봐야 '일이 뒤죽박죽 되는 것'이다. 가장 큰 일이라 하면 회사에 손실을 입히거나 대상자에게 불편함을 끼치는 것이다.
그 정도 사고로 사람이 죽거나 죽음에 이를 정도로 다치진 않는다.
병원은 그렇지 않다.
주사 한방에, 약물 한 번에, 죽거나 죽음에 이를뻔하거나 할 수 있다.
주의를 기울이고, 시스템을 잘 정비하면 되지.
'라떼'보단 나아진 건 사실이나 지금 하는 일처럼 잘못 친 오타를 backspace로 지울 수 있는 일들을 병원에선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아, 맞다. 그 약 줘야 했는데.
아, 맞다. 혈압 체크했어야 했는데.
아, 맞다. 아, 맞다. 아, 맞다........
간호사 1명 당 환자수가 여전히 OECD 회원국이나 여타 국가들에 비하면 비대칭이 크다.
그렇다보니 비슷한 GDP의 국가들에 비해 병동에서 간호사의 역량이 과하게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다. 시간과 인력이 제한되다 보니 한 사람이 1시간 안에 할 수 있는 간호의 양과 질이 굉장히 넓고 깊다.
그런 환경에서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일을 했으니 머릿속에 항상 남는 게 있다.
'안 죽었으면, 안 다쳤으면 아무 일도 아닌 거다.'
실수도 잦은 신규였고, 일은 넘치도록 많은데 일의 경중을 따지기가 어려울 정도로 하나하나 사람의 몸과 질병과 증상에 관련된 것들이라 부주의는 자책이 됐고, 자책은 우울함이 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들어 낸 나만의 주문이었다.
필요한 건 우울이 아니라 반성과 실수의 반복의 제거였다.
다행히 나의 실수로 다치거나 죽은 분은 안 계셨다.
천운이었다.
누구나 하는 실수라도 대형사고가 되는 일은 비일비재한 곳에서, 그런 불행은 오지 않았었다.
1년을 주문을 걸며 다니다가 연차는 쌓여가고 실수는 줄지 않고, 새로운 기도문이 생겼다.
'오늘 퇴근할 때 부디 가해자로 퇴근하지 않게 해 주세요. 제발.'
나의 간호가, 나의 처치가 항상 올바른 것이길 바란다는 기도였다.
특히, 밤 근무 전에 손이 노래질 정도로 꼭 쥐며 기도를 하고 근무에 들어갔다.
기도 덕분인지, 10분 늦게 봤다면 심정지로 사망했을 환자를 일찍 판단해서 심폐소생을 제시간에 해서 살린 적은 있었다.
시간은 흘러 현재까지도 위의 주문은 유효하게 쓰이고 있다.
잘 다니던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그만두어야 했다.
돈이 없어서 집을 구할 수가 없다.
계획하던 일들이 다 수포로 돌아갔다.
아무도 안 죽고, 안 다쳤으면, 그건 아무 일도 아니다.
아이를 낳고 나서는, 아이가 아프거나 다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이런 상황에도 유효하다.
직장 동료나 친구들도 가끔씩 회사에서 실수를 하고 힘들어하면 위의 주문을 아브라카다브라처럼 외쳐준다.
"그래서 누가 죽었니? 누가 다쳤니? 안 죽고 안 다쳤음 아무 일도 아닌 거다."
이러니 직장 생활의 만족도가 높다.
내가 아무리 실수해도 인쇄가 잘못되거나 오탈자를 수정하지 못한 정도에서 그치는 실수이기 때문이다.
생명과 고통이 관계되지 않는 사소한 실수이고, 삶에 대한 태도 또한 많이 너그러워졌다.
누가 일하다가 나를 짜증 나게 해도 그냥 털어버린다.
그 일로 인해 누가 다치거나 죽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결론적으로 간호사 출신이 사무직을 하면 만족도가 높다.
보완하고 싶은 부분은 있다.
활동적이고, 환자 케어가 맞는 성격이 있어 가만히 앉아있는 업무가 불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누가 다치거나 죽는 상황에 놓이지 않아 심리적 스트레스에서 해방되기에 '일반적인' 직장인이 되는 것에 기쁨을 누리는 게 다반사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사무직을 하면서 의료인에 대한 존경심이 생겨났다.
전에는 내가 하던 일이라 감흥이 없었지만 매일매일이 평온한 사무직의 삶을 사는 한편, 누군가는 한쪽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의미니까 말이다.
"누구도 죽고 다치지 않은 하루로 스테이블(stable)한 듀티(duty) 마치시길 기원합니다."
사진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