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에 방영된 미생에서 주인공 장그래가 요르단 페트라를 배경으로 '길'에 대한 명대사를 남긴다.
"길이란 걷는 것이 아니라 걸으면서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
나아가지 못하는 길은 길이 아니다.
길은 모두에게 열려있지만 모두가 그 길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 초년생 때 들었던 대사는 결혼을 하고 홀로 중국에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고민할 때 마음에 새기는 글귀가 되었다.
20대 초반까지 나는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싶어 했다.
평범함이 너무 지겨웠다. 비범하거나 특별한 것을 원했는데 대학교 가서 소소하게 한 가지 이뤘다면 학생선교단체 동아리에 들면서 여행으론 가볼 수 없는 나라와 병원을 견학하고 경험한 것이다. 그리고 보통 학생들보다 뒤처진 성적표를 얻은 것.
덜 떨어진 것과 불행 말고 신선한 인생을 살고 싶었는데 반은 이뤘고, 반은 실패했다.
반정도 평범한 학과생활, 누구나 다 하는 취업, 일머리 없고 둔한 애가 겪은 첫 병원에서의 적응 실패, 그 뒤 지방 중소병원에서의 누구나 하는 신규간호사 생활
조금 더 재밌었으면 좋겠고, 색다르고 싶었다.
임상간호사의 병원생활 1-2년 후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공무원 시험, 공기업/기관 취업준비, 다른 병원 이직, 미국간호사 준비, 연구간호사 등이었다.
대부분 저 위에 있는 것들을 준비하고 여행 다녀오다가 돈이 떨어지면 다시 이전 직장이나 그와 비슷한 직장으로 재취업을 했다.
분명 그러할 것이 뻔했다.
나는 끈기가 없고, 혼자서 뭘 잘해본 적이 없으므로.
미국, 유럽은 여행으로 갈 순 있지만 살기는 힘들어 보였고, 당장 그만큼의 돈과 외로움을 견디기엔 내가 단단하지 못한 것을 잘 알았다.
학생 때 갔던 나라들처럼 원조가 필요한 국가에 직업인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기에 쉬운 직업, 간호사.
내 시야에 들어온 KOICA 봉사단원 모집.
아프리카, 남미를 주로 뽑는 기수였다.
아프리카.
경력 1년짜리가 쓸 수 있는 1지망 국가는 아프리카뿐이었다.
어디 붙어있는 나란지도 모르고 적어 내고 결과를 기다리고 합격했다.
2년 남짓한 기간이 지나고 한국에 와서 경력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다지 좋지 못한 쪽으로. 영어 성적표는 토익 400점, 그마저도 만료. 한 달을 실컷 놀고, 아프리카에서 만난 남자랑 또 한 달을 실컷 연애하고 나니 수중에 비어버린 은행 잔고뿐이었다. 일단 돈을 벌러 아무 데나 가장 많이 준다는 곳으로 갔다.
하루 일하고 나니 아, 이렇게 살려고 아프리카에서 그 고생을 했나, 회의감이 몰려와 다음날 그만두고 다시 집에서 백수를 했다. 알바를 하고 컴퓨터 학원을 다니다가 1년 계약직 연구원으로 취업이 됐다.
적응하고 대학원도 합격했는데 결혼을 생각한 남자친구가 중국으로 취업을 했다. 한국에서 400군데 면접탈락과 서류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겨우 합격한 곳이었다. 출국할 수밖에 없었다. 눈물의 배웅을 하고, 장거리 연애를 시작했다. 너무 힘들었다. 주말 연애도 힘들었는데 3개월에 한 번 본다니. 결정의 시간이 다가왔다.
우리는 헤어지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결혼했다.
그렇게 중국으로 간 나는 늘 불안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위에 섰기 때문이다. 20대 초반에 특별하고 새로운 것을 바랐던 나는 20대 후반에 그 길 위에 서자 두려움에 휩싸였다.
마땅히 스케줄이 없는 아이가 없는 신혼 전업주부는 심심하고 허무한 시간을 보냈다. 중국어를 배우기도 하고, 사람을 사귀기도 했으나 전체 시간 중 극히 일부였다. 남은 시간은 혼자서 장을 보거나 TV를 보며 청소나 빨래를 했다. 헬스장을 가기도 하고, 산책을 하기도 하지만 그냥 살아있고 인프라가 있으니 이용하는 정도지, 그동안 살며 일하며 받은 성취감과 보람이 없었다.
하던 간호사를 하려면 중국에서 간호대를 나와서 간호면허를 따서 다시 해야 하는데, 굳이?
하던 연구를 하려면 대학원을 나와서 연구를 해야 하는데, 어느 세월에 중국어를 유창하게 해서?
내가 아는 인맥과 인터넷 검색력으론 위의 길을 간 한국 주부가 없었다.
물어볼 이 없이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어가기란 어려웠다.
차라리 친구나 선배들이 한다던 공무원이나 해외간호사를 준비하면 외롭지라도 않았겠다.
현실이 힘든 건 한 개도 없었는데 현실의 막막함은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한동안 커뮤니티 사이트와 카페에서 나와 비슷한 사람을 찾기도 했으나 다들 결혼을 안 한 유학생이거나 대학원이나 공부는 오로지 자신의 아이의 진로로 고민인 언니들뿐이었다.
외롭고 불안해졌다.
아, 특별해지고 새로워지는 것, 길을 개척한다는 건,
"어마어마한 두려움"을 등에 매고 발을 떼는 거구나.
내가 한 치 앞을 모르고 원하던 건 진정 그것을 이뤘을 땐 감흥이 없거나 실체를 깨달아 우울해지는 거구나, 느꼈다.
생각을 하다 하다 뒤집어 보니,
"어차피 어디로 튈지도 모르는 길 위에 서있다면 나도 스스로 변곡점을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으로 갑자기 해외파견직으로 구직을 시도했다.
계속되는 변곡점으로 인생이 흘러 흘러 여기까지 왔네.
변곡점이 생기면서 부딪히는 것이 더 많았던 2020년부터 2022년까지의 삶이었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심오한 고민과 철학적 생각이라기보단,
'아오, 왜 아무도 가본 사람이 없는가!!'
하는 답답함의 외침이 컸다.
20대에는 병원간호사 안 하면 어차피 공무원, 기관취업, 제약 관련 임상시험 업종 등은 너무 흔하고 뻔한 결말일 것 같으니 그거 말고, 그거 말고, 그거 말고, 의 마음만 강했던 것 같다.
그럼, 그거 말고 다른 건 감당할 자신이 있는지는 스스로에게 물어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감당하겠지. 잘하겠지. 하는 근거 없는 자만심만 가득했던 것 같다.
아무도 안 가본 길을 잠시 배회하다가 평범한 회사에 들어왔고, 비슷한 진로를 꿈꾸는 동기들이 있는 한국의 대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내적으론 누구나 할 수 있는 중소기업 회사원이고, 보편적인 파트타임 직장병행 대학원생이고, 아줌마고, 애기가 평범하게 건강한 누구나 다 가는 길인데 외적으론 또다시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있는 중이다.
회사에 다니며 개인 연구를 하고 있고, 그 연구는 직장인이 할 수 있는 범주의 데이터 분석, 문헌탐구 정도가 아니라 직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국제보건 주제의 연구이다. 인권과 보건과 경제가 어우러지는 다양하고 복잡한 세계의 인간대상 연구를 하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출판사를 다니는 편집부 직원이 석유화학 실험연구를 하는 셈이랄까.
여전히 정석대로 가지 않은 길이라 많은 의구심과 함께 하루하루 해야 할 일을 해결하며 살고 있다.
나만의 길을 만들어가는 초기엔 너무 불안해서 자주 저 대사를 상기했던 것 같다.
길은 걸어가면서 만들어지는 것.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
지금 살면서 가는 길은 모두에게 처음 가는 길.
성공하는 것도, 실패하는 것도 없으며
나는 내가 걷기 좋은 길만 생각하자.
어떤 것도 누가 봐도 그럴듯한 길은 아니고, 길마다 있어 보이는 업적 또한 전혀 없지만 지금 이 길이 썩 맘에 든다. 내가 만들어서 그런가 보다.
(사진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