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일반식을 시작하면서 이유식은 또 다른 과거가 되었다.
그래서 아이인생에 엄마가 만들어준 이유식은 이제 생길 기회조차 없다.
이유식은 요리담당인 남편의 몫으로 엄마인 내가 한 번도 직접 끓이고 만든 적이 없다.
사다준 걸 끓인 것처럼 딱 한번 남편이 바쁘다고 아바타처럼 시킨 대로 냉동한 걸 해동해 준 적은 있다.
밖에서 돈 벌어오니 네가 요리 다 해라, 는 아니고, 타고나게 요리 센스와 실력을 두루 겸비하지 못한 탓이었다. 짜다 싶음 물부터 붓고, 불은 무조건 세게, 마늘과 파와 양파의 시너지와 영향 효과에 대한 상관성을 여전히 파악하지 못한 요리 고자.
저 위의 사항을 고쳐주고 캐치했으면 나아질 듯싶은데 꼭 하나씩 태우거나 찢거나 맛이 사라진다. 그럴 바엔 남편은 경제적으로 효율성 있는 업무 분배를 통해 너는 설거지와 쓰레기를, 나는 요리와 부엌살림을 담당하자고 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아이는 태어나서 엄마가 해 준 이유식을 먹어본 적 없으며 유아기의 맛있는 엄마손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을 것이며 앞치마를 두르고 별식을 만들어주는 엄마도 일생에 없을 것이다.
아이는 엄마가 해준 밥, 이유식 없이 자란 아이가 됐다.
요리를 잘 못하는 부모 중 한 명을 둔 나의 어린 시절이 문득 떠오른다.
아빠도 마찬가지로 여느 집 아빠들처럼, 그리고 나처럼 요리에 타고난 감각이 하나도 없는 양반이다. 최고의 아빠손 식사는 라면과 짜파게티였다. 이상하게 밥이나 다른 반찬은 전혀 못하지만 짜파게티 하나는 엄마보다 잘 끓여 주셨다. 이제는 결혼해서 친정에 가면 엄마가 요리를 하거나, 사 먹거나, 요리하는 사위가 차리거나, 셋 중 하나이기에 아빠가 끓여주는 짜파게티를 먹을 일은 없지만 아이를 낳고 나니 생각날 때가 있다.
내 아이는 아마 그러지 않을까. 아빠가 매일 맛있는 밥을 해주고 고급 건강 입맛이 되겠지만 한 번씩 엄마와의 일탈로 먹는 과자와 라면 같은 별미를 맛보며 '우리 엄마가 밥은 못해도 이따금씩 맛있는 걸 사줬어.' 하는 생각으로 유년시절의 한 면을 채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하다 학생 때 본 영화 [에린브로코비치]의 한 장면이 기억났다.
몇 번의 이혼 끝에 남은 건 바닥난 통장잔고와 세 아이가 있는 여자가 우연히 취업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대기업의 오염물질 무단 방류로 인해 생긴 마을 사람들의 질병을 법의 판단 하에 보상받게 한 실제 주인공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였다.
모든 장면들이 인상 깊었지만 영화 초반에 여주인공이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며 아이들과 같이 놀아준 이웃집 남자(이후 둘이 연애/동거함)에게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내가 이 아이들을 망칠 거예요."
남자가 아이들이 이쁘다는 말에 여주인공이 한 말이었다. 이혼녀에, 돈도 개털이라 내가 키우는 아이들은 가난과 엄마의 포악스러운 육아에 지쳐 엇나갈 것이라는 자조 섞인 한 마디였다.
영화 분위기 상, 엄청 진지하거나 슬픈 장면도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아주 어린 순간의 아이들을 보면서 암울한 미래를 담담히 얘기하는 엄마의 마음이 전해져서 그런가.
자신의 삶이 아이들을 올바르게 키워줄 수 없을 거라던 자조 섞인 한탄이 일정 부분 내게도 있는 것 같다. 작게는 이유식을 해주지 못한 엄마, 점차 크게는 내 일이 우선인 엄마, 로 되어갈 것 같은 나직한 두려움이 있어서 그런가 보다.
아이를 사랑하는 게 내 마음의 시작이라면 아이를 키우는 건 물리적인 힘으로 지속하는 거라 생각한다. 그 물리적인 힘에 꼭 좋은 것만 주는 게 좋은 부모일까, 우리의 실수와 부족한 것도 공유하면서 추억을 주는 것도 '부모'가 아닐까.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에린 브로코비치의 대사를 다시금 떠올린다.
결국, '에린'은 자신의 아이들을 망치지 않았다. 재판을 승소해서 많은 부를 취득했고, 여전히 여러 나라를 다니며 오염물 폐기와 관련된 재판에 관여하며 살고 있다고 한다. 결과론적이지만 힘든 과정 가운데서도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녀의 마음이 결국 '망치지' 않은 자신의 삶과 아이들로 결실을 맺게 되어 나도 용기를 내어 되는 대로 헤쳐나가며 살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