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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노니 Dec 13. 2019

[출간전 연재] 마지막 이별

인생 최대 난제를 마주하다

*본 글은 종이책 출간 전 발행 글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향후 출판 서적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남자 친구가 출국 하기 하루 전, 우리 집에 와서 밥을 먹기로 했다. 사귈 때부터 엄마와 만나기도 했고, 연애 과정의 우여곡절도 지켜봤기에 격려 차원에서 엄마가 초대를 했다.


떠나는 날은 나 혼자 오전에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공항으로 배웅을 나갔다. 남자 친구의 어머니는 취준생 당시, 취업 스트레스를 받던 남자 친구의 날카로운 말에 서로 마음이 닫혀 전화만 하고 오진 않으셨다. (남자 친구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 말한 취업 정보를 듣고, 빨리 취업하라고 닦달한 기분이 들었다며 토라졌기에 남자 친구가 잘못했음)


눈물의 배웅을 하고 나서 출근했고 남자 친구도 곧이어 잘 도착했다고 카톡을 보내왔다. 기숙사 방 사진도 보냈고, 직장이 어떤지도 알렸다. 보이스 피싱이나 장기를 파는 곳 같아 보이진 않아 다행이라고 통화하며 첫 날을 보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지나 내 생일이 왔다.


한국으로 왕래가 자유로운 직장이 아니다 보니 미리 주문한 생일 선물로 남자 친구의 마음을 받았다. 가끔 특별한 날에 꽃을 사서 들고 나오긴 했으나 직장으로 꽃을 보낸 적은 없었다. ~기념일을 챙기지 않는 우리 커플의 룰을 깨고 화이트 데이와 1주년 기념일에 꽃다발을 회사에 보냈다.


함께 할 수 없는 아쉬움을 최선을 다해 달랬다. 그에 비해 나는 해 준 게 별로 없었다. 고작 한국에 왔을 때 같이 데이트한 것과 휴가를 써서 중국에 다녀온 게 전부였다. 그마저도 그 비용은 남자 친구가 지불했다. 항상 나를 먼저 생각해 준 그의 마음이 컸기에 힘든 시기에도, 거리가 멀어졌어도, 연인의 관계를 지속하게 하는 힘이 되었다.

생일 빼고 기념일 안 챙기기로 해놓고 화이트데이랑 1주년에 회사로 보낸 꽃다발

그의 회사는 도심에서 차로 3시간 넘게 떨어져 있는 회사 안에서 붙박이처럼 지내야 했다. 당연히 한국으로의 왕래가 자유로울 수 없었다. 우리가 자주 만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는 곳이었지만 월급, 상여가 들어올 때마다 꼬박꼬박 내게 용돈을 주고, 얼마가 들어왔는지 알렸다.


나는 그의 취준생 생활에 생활비를 보태준 적이 없다. 심지어 없는 돈에서 데이트 비용을 꼭 본인이 냈다. (처음엔 데이트 통장을 만들어 분담하기로 했는데 어느 날 그가 은행카드를 잃어버렸다고 하곤 재발급받지 않아서 흐지부지 되었다) 그는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이지, 내게 부담을 지워서 안될 일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만큼 나와 계속 함께 하고 싶고, 많이 생각한다는 표현을 시간으로 하지 못하니 물질로라도 한 셈이다. 취업이 안되어 힘들 때마다 어서 돈을 벌어 운동도 시켜주고, 피부과도 끊어주고, 비싼 화장품도 사주고 싶다고 칭얼대는 게 그냥 하는 소리겠거니, 했는데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 무렵 나는 대학원 지원을 했다. 전년도 하반기 지원했으나 가장 가까운 신촌에 있는 학교 한 곳만 지원했고 결과는 당연히 탈락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여러곳을 지원했고, 한 곳이라도 합격한다면 2년 반 넘게 롱디 해야 하는데 괜찮겠냐고 의향을 물은뒤 대학원 입시를 치렀다.

(남편은 당시, 작년에 떨어진 것도 있고, 붙는다 해도 나의 게으름을 아니까 힘들어서 그만두지 않을까 하는 생각 했다고 함)


합격소식을 들었을 때는 진심으로 축하해줬고, 좋았는데 막상 장기간 롱디를 지속하자니 두려웠나 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이렇게 맘대로 못 보는데 학교까지 다니게 된다면 불 보듯 뻔한 멀어짐을 겪게 될 게 자명했다.


특히 합격 소식을 듣고 남자 친구가 있는 곳으로 여름휴가를 다녀오면서 우리 둘의 거리감과 그리움이 훨씬 더 깊어졌다. 잠깐의 시간이 너무나 달았고 멀어져 있음은 굉장히 공허했다. 그러면서 우리 사이에 대한 고민을 서로 하게 되었고, 내가 먼저 잠깐 생각할 시간을 갖자고 말했다. 지금부터 이런 상태라면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겨우 6개월 롱디도 못 견디면서 장기간 롱디를 할 수 있을까, 싶었다.


내가 생각한 남자 친구는 이런 상황에서 용기를 내는 사람이 아니다. 먼저 단호하게 이별을 고해야겠다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이틀 후, 연락이 왔다.

나는, '일주일은 생각해 보고 연락할 생각이었는데 정말 빨리도 연락했네. 마음 정리 다 끝난 건가.', 하고 전화를 받았다.


태연한 목소리로 뭘 하고 있었냐고 묻더니 덤덤한 목소리로 청혼을 했다.

뫄?! 뭐라고?


예상치 못한 반격(?)에 휘청하고 있는데 그는 내가 현실적으로 올 수 있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내다 보니 알게 된 얘기들을 전해줬는데 어쩌면 우리가 결혼해서 살기에는 자금이 많이 없어도 회사에서 지원해주는 것들로 가능하다는 소식이었다. 내가 중국에 가서도 학업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 등 이런저런 현실적인 얘기들로 한 시간이 넘게 통화하다가 좀 더 고민해보고 다시 연락한다고 했다.


이틀 동안 잠 한숨 못 자고 고민하다 취침 준비하던 엄마한테 가서 내가 어떻게 하는 게 옳은 선택인지 모르겠어,라고 물었다. 엄마는, "네가 고민하는 게 답이야. 이미 고민한다는 거 자체만으로 일이랑 학업 포기하고 간다는 생각을 했다는 거잖아. 결정 난 것 같은데?" 하고 현답을 했다.


그래, 맘에도 없었으면 고민하지도 않았겠지, 나는 벌써 결혼을 결심했네.

이로서 연애의 마지막 이별을 청혼 승낙으로 바꾸었다. 당장 올 수 있냐는 말에 돌아오는 주말에 도착하는 비행기 표를 끊어 예비 처갓댁에 인사를 드리러 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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