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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노니 Dec 13. 2019

[출간전 연재] 정착 그리고 첫 번째 이별

한국에서의 직장생활과 연애 생활

*본 글은 종이책 출간 전 발행 글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향후 출판 서적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섬섬한 사이를 지나 '' '남자 친구' 되었다. 7월부터 정착한 남자 친구의 회사는 성남-화성 오가는 소기업이었고, 숙소는 화성 공장에 기숙사가 있었고 성남 사무실로 근무할 땐 회사에서 고시원 방을 잡아줬다.


월세 보증금도 부담이었던 처지라 가급적 기숙사가 제공되는 회사로 취업하려 했고, 시설은 최악이었으나 몸 누일 곳이 보장되었으니 갔다.


그러나 우리나라 소기업이 왜 젊은 사람들의 외면을 받겠는가, 사장은 재산이 많았으나 회사는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고, 월급이 대우받는 수준은 아니며 심지어 남자 친구의 업무가 아닌 걸로 일을 지시하고 제대로 못했다고 인격적으로 무시까지 하니 중소기업에 사람이 없다는 건 당연한 이치다.


이런 직장이 있다니 세상에, 라는 표현은 같았으나 전혀 다른 쪽으로 같은 대사를 내뱉는 우리 둘은 항상 남자 친구의 직장생활로 푸념했다.


교제를 시작할 때부터 언제 같이 살지를 고민하던 커플이라 현실적인 문제를 화두에 올렸다. 남자 친구는 방 한 칸 얻을 정도의 대출금을 갚고도 결혼 준비 비용을 무리 없이 지불할 정도면 됐으나 이제 막 회사에 안착한 우리에게 그 날이 언제 올까, 고민하는 날들이었다.

한국에 와서 달라진 점이 있었다. 못 하던 연애를 하게 되었다는 것과 하루하루를 견뎌내야 하는 시간으로 여기던 자세가 '삶'으로 인지하는 자세로 바뀌었다.

그전까지는 학교를 다니면서 빨리 졸업하길 바라며 달력에 빗금 치고, 병원 다니면서 빗금 치고, 해외봉사 가서 귀국하는 날만 세는 사람이었다.

해외봉사를 다녀오면서 배운 점이 있다. 2년의 시간이 길 줄 알고, 작은 지역에서 쳇바퀴 같은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했는데 하루하루 일어나는 일들과 시간들은 누군가에게 매번 다른 이야기를 해 줄 정도로 다양한 시간들이었다.
'하루하루가 단순 반복의 날이 아니구나.'
수도를 대피하면서 느꼈고, 갑작스레 귀국을 하면서 한 번 더 강력하게 인지했다.

'오늘 하루는 어제와 다르고 내일도 다르다. 나는 매번 다른 순간 속에서 다른 사람으로 살고 있다.'

결론, 정착 언제 하지, 결혼 언제 하지, 돈 언제 갚지, 하는 생각은 한 번만 하고 오늘은 오늘 하루밖에 없으니까 지금 이 순간을 그대로 즐기며 살아야지.



시간은 흘러 가을이 되었고, 경기도라 해도 북쪽과 남쪽 끝에서 오가는 연애를 한, 그러나 서로가 있어서 행복한 여름이 지나갔다.


그 무렵, 나는 본격적으로 일에 적응하면서 학회도 다니고 일도 배우는 시간들이 되었다. 남자 친구의 회사는 재정 상황이 이전보다 악화되어 분란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중이었다.


위기는 스멀스멀 그림자를 보이더니 곧 등장했다.

남자 친구의 회사에서 난동이 일어났고, 하다 하다 그런 꼴까지 보게 된 남자 친구는 심신이 피폐해져서 귀가했고 주말 내내 누워 지냈다. 잠수 아닌 잠수를 탄 셈이다. 내가 보낸 카톡에 답은 했지만 단답형이었고, 너덜너덜해졌으니 가만히 있겠다, 이번 주말은 못 보겠다, 가 대답의 전부였다.


이해할 수 있었지만 내 속은 타들어갔다. 이러저러해서 힘들다, 라는 설명할 기운도 애인에게 쓸 수 없는 것인가. 이런 마음으로 나는 그를 견딜 수 있겠는가. 하는 고민들이 올라왔다.


그 간 우리 둘의 성격이 불과 물 같아서 의견 차이로 인한 투닥거림은 있어도 외부환경으로 인한 서로 간의 차단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헤어질까 고민했으나 애절한 현재의 상황에서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서로가 비슷한 환경에서 상대에 대한 시들한 태도는 납득할만한 결별의 사유였으나 "너의 주변 상황이 힘들어져서 피폐해진 너를 나는 못 참겠다."는 이별 사유로 적합하지 않았다.


나는 너의 힘든 모습도 같이 공유하고 싶다, 공유할 수 있는 기운을 좀 더 할애해달라는 투정 아닌 투정을 장문의 카톡으로 보냈고,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진 남자 친구는 '이런 식으로 헤어질 줄은 몰랐지만, ' 하는 말로 시작하는 장문의 글로 답했다.


누구 하나 똑 부러지게 헤어지자고는 안 했지만 잠정 결론이 난 것으로 판단하고 주말에 만나기로 했다. 만나서 얘기했는데 얼굴 보고 입을 열면 울 것 같아서 한참을 배회하다 한적한 빌라 근처에서 얘기를 시작했다.


이때, 우리 둘은 서로 다른 성격만큼이나 서로의 대화를 이해하는 방식이 달랐다.

내 입장에선 결국 우린 이렇게 힘든 상황을 이해하는 방법이 다르니 이별하는 걸로 결론 내자, 라는 뜻으로 들렸고, 남자 친구 입장에선 결국 우린 이렇게 힘든 상황을 이해하는 방법이 다르니 서로 이해하면서 넘어가자, 라는 뜻으로 들렸단다.


결국, 입 밖으로 "우리 헤어진 거지?"라는 질문을 할 용기가 없어 내가 돌아가는 버스에서 우리 헤어진 거지, 잘 살아, 라는 문자를 보냈다. 남자 친구는 이해하고 넘어가는 거 아니었어?!, 아........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미안해, 라는 답장을 보냈다.


집에 도착해서 선물이랑 썸 탈 때 다시 보자는 미끼로 내 손에 들려준 패딩까지 편의점 택배로 부치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슬리퍼도 끊어져서 동생한테 신발 들고 오라며 울면서 전화했다.

(그 날 일로 인해 처제에게 형부 때문에 그 밤에 신발 들고나간 걸 생각하면 둘 다 진상이다, 소리를 듣는다)


그렇게 이별의 시간이 5시간이 지나갈 무렵, 잘못했다고 울면서 전화가 왔다.

(당시에는 애절한 장면이었는데 지금은 깔깔대며 쓴다. 인생 참~)


어떠한 형태의 우울함이 오더라도 왜 그랬는지 설명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만나기로 한다. 진짜 이별했다가 다시 만난 연인이 보면 우습겠지만 우리의 5시간, 첫 번째 이별은 이로써 막을 내렸다.



남자 친구의 회사는 결국 회생불가 수준이 되어 폐업 신청을 했고, 폐업 전 사직서를 쓴다. 그리하여 길지 않은 취준생의 삶으로 다시 돌아왔다.

(커버 이미지는 헤어지기 전에 같이 가려고 산 무민 전시회, 이대로 버려질 줄 알았는데 같이 볼 수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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