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으로의 취업, 롱디의 시작
*본 글은 종이책 출간 전 발행 글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향후 출판 서적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남자 친구는 사직서를 내고 서울에 올라와 고시원을 알아보기로 했다. 종로에서 토익학원을 다니며 구직활동을 해 보기로 결정했다. 전 회사와 같은 꼴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며 규모 있는 회사로의 취업을 원했다.
이력서를 쓰고 내기를 반복하며 한 달여를 지나자 그는 깨달았다.
광. 탈. 두 글자의 의미를 말이다.
두 달 동안 300곳에 지원했고 떨어졌다. 면접조차 보지 못했고, 면접 오라 한 곳도 시골 구석에 기숙사도 없는 1인 기업이 전부였다.
한 달을 그렇게 치이다가 데이트 비용이 없어서 헤어질 분기점이 몇 달 안 남음을 깨닫고(돈이 없는데 무슨 연애냐) 노선을 변경하여 해외취업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남들 잘 안 가는 아프리카나 동남아의 공장 관리직으로도 이력서를 넣었으나 그마저도 연락이 없었다.
11월이 다 지나갈 무렵, 학교 게시판에 올라온 본인 전공 관련의 구인공고를 봤다. 국가는 중국이었다. 혹시 모르니 나에게 지원해도 되냐는 허락을 구한 뒤, 이력서를 보냈다.
드디어 면접 보자는 연락이 왔다. 중국어 한 마디도 못하는데 뽑아가면 그건 백 프로 보이스 피싱일 것이라는 농담과 함께 여의도에 있는 본사 사무실 1층의 카페에서 면접을 봤다고 소식을 전해왔다. 이것저것 상세하게 물어봤고 분위기로 보아하니 채용할 것 같은데 이대로 해외 롱디(long-distance couple; 장거리 연애)가 될 수도 있겠다는 얘기를 했다.
만약 채용이 된다면 가도 되냐고 물었다.
그의 상황에서 답은 내가 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미 답은 그의 환경이 주고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집도 없고, 여자 친구는 아직 독립할 자본이 부족하니 본인이라도 돈을 벌어서 결혼 자금을 마련해야 하는데(본인 생각임, 나는 없는 돈 둘이 모아서 하면 되지,라고 얘기했음) 한국에선 취업이 안됐고 마지막에 대답 온 곳이 하필 중국에 있는 한국 회사였다.
면접보고 며칠 되지 않아 일해보자는 연락이 왔다. 혹시 이상한 곳에 걸려 사기당하는 게 아닐까 무서워 상세한 연봉과 복지를 알려달라고 요청했고, 곧이어 상세한 근로조건들이 쓰여 있었다. 그대로 내게 보냈고, 그 조건들은 한국에선 받아볼 수 없는 조건들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우리는 연말 크리스마스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서울에서 데이트하고 새해가 되자마자 그는 출국 길에 올랐다. 혹시라도 낌새가 이상하면 전화하고 차문을 열고 도망치라는 조언과 무사히 다시 보자는 눈물 어린 작별 인사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