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노니 Nov 20. 2019

[출간전 연재] 2분기 봉사단원의 삶

회복의 시간

*본 글은 종이책 출간 전 발행 글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향후 출판 서적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파견 후 1년간

여기저기 돌아가며 아프던 몸과 식욕부진이 조금 나으면서 미루던 국내 휴가를 신청했다.

경로는 비행기를 타고 수도를 가서 지방 봉고버스를 타고 가장 끝쪽 남부부터 시작해 단원들이 있는 지역을 찍고 올라오면서 수도에 하루 있다가 북부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관광지를 찍고 다시 비행기를 타고 파견지역 위에 있는 도시를 갔다가 차량으로 복귀하는 일정이었다. 


가장 끝쪽 남부에 있는 단원 언니의 집에서 2박 3일 숙식을 해결하고, 제일 단원이 많이 파견된 수도에서 차량으로 3시간 떨어진 도시로 이동했다. 생각보다 사람들을 만나고 하면서 힘든 점, 즐거운 점, 고민할 점을 나누며 스트레스로 꽉 막혔던 시야가 조금씩 풀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원숭이가 지붕 위에서 놀던 단원 언니의 집. 가끔 쟤네들이 쪽문을 열고 호두나 라면을 훔쳐간다고;;; 언어 수업 시간에 [원숭이 도둑]이라는 동화책을 읽었는데 왜 도둑인지 이해함
이곳도 관광지답게 근사한 리조트가 있었음. 방값은 비싸서 묵을 엄두가 안 남
남부를 지나면서 만난 선인장. 선인장 열매는 맛있다.
다른 간호단원 언니의 보건소(=울창한 산림)와 근처 식당 호숫가의 펠리컨
북부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전, 들렸던 동기단원 언니의 집에서 제공한 쌀국수와 수도 한국병원에서 그림교실을 하시는 선교사님의 그림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경험을 공유하고, 활동지에서 고민하고 지내는 모습들과 더불어 나를 위로해주는 말들 덕분에 혼자만 겪는 게 아니라는 격려를 받고 북부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에티오피아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는 '랄리벨라'라는 석굴 교회인데, 석굴 교회는 석굴암처럼 절벽이나 동굴 같은 곳의 바위를 깎아 만든 교회이다. 요르단의 페트라도 같은 양식이다(페트라가 훨씬 뛰어난 수준). 


수도에서 비행기로 1시간 10분이면 도착한다. 내리면 공항엔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이고, 미리 예약한 호텔 픽업차량을 타고 30분을 달려가면 산꼭대기에 위치한 호텔 숙소에 짐을 푼다. 


아침 비행기로 피곤하게 도착했으니 쪽잠을 청한 뒤, 관광을 하러 랄리벨라 석굴 교회로 입장한다. 


입장료는 어마어마하다. 

아프리카의 많은 관광지들이 자연보호와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세금으로 충당할 수 없으니 외국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입장료를 비싸게 판다. 


가격은 파견지역에서 수도까지 편도 비행기 가격이었다. 개인적인 돈의 가치로보면 그만큼의 값어치는 아닐지언정, 그래도 밟은 땅에서 유명한 곳을 가봤다는 기념으로 남겨두었다.

고도가 높은 곳에 위치한 호텔들이 산맥을 바라보고 있다.


입장료를 내자마자 가이드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따라붙는다. 가이드 비도 입장료만큼 부르기에 여유가 없는 나는 혼자 돌아다니기로 결정한다. 설명을 들었으면 좋았겠지만 덕분에 관광지에서 만난 한 소녀와 친구가 되어 같이 사진도 찍어주고, 떠나는 날 아침도 초대받았다.

본관 교회 건물과 내부 예배당에서 기도를 올리는 모습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한 현지인 중, 보라색 티를 입은 소녀는 여기 사람이라고 하면서 나를 아침식사에 초대했다.


만 하루의 관광을 찍고 다시 공항에 갔다. 

옛 고대 성벽이 남아있는 유적지 도시를 가기 위해서 말이다. 


공항에서 기다리는 중, 일본인 혹은 중국인일까 싶은 노부부가 앉아있었다. 중국인이겠지, 하고 지나쳤는데 우연히도 목적지가 같은 곳이었다. 


도착해서 호텔 차량을 기다리고 있는데 노신사분이 말을 걸어왔다.

"아 유 차이니즈?"

"노. 암 코리안."

"오 유아 코리안. 암 말레이시안."


오, 말레이시아 분이셨구나. 나나 현지 사람들이나 아시안처럼 생겼으면 다 중국인이라 생각하는 건 매한가지네. 


두 분은 부부이고, 일 때문에 에티오피아 왔다가 관광차 북부에 놀러 왔다고 했다. 숙소는 어디냐고 물었고, 호텔이 달라서 우린 인사하고 헤어졌다.


그런데, 관광지를 돌 때마다 나는 멀리서 눈에 띄는 두 분을 목격할 수 있었다. 


관광지 동선이 일치한 것이다. 

마지막 호텔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이번엔 내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로 오셨냐, 나는 여기서 멀지 않은 동네에 산다, 하니 자신들은 페낭에 있는 대학교 영양학 교수들이고 학회 참석차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왔다가 관광을 하기 위해 북부를 도는 중이라고 했다. 


심지어 내가 복귀하는 지역으로 관광을 가기 때문에 수도에서 예약한 차량이 있으니 그걸 같이 타고 가는 게 어떠냐고 물어봐주셔서 흔쾌히 감사하다고 승낙했다. 


짧은 영어로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두 분의 모습은 워너비로 남는 순간이었다. 

남편분은 아내를 올려주고 아내분은 겸손하게 남편의 칭찬을 웃으며 듣고 계셨다. 


"나는 그냥 그녀의 보조로 왔을 뿐이야, 그녀의 업적은 대단해, 내가 이룬 일들은 그녀에 비하면 아주 적어, 그녀는 24시간 연구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어, 내가 그녀의 남편인 게 다행스러워" 등 TV 토크쇼 인터뷰 같은 주옥같은 대사들을 쏟아내셨다. 


정말이지 부럽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이 사진을 나중에 기념으로 드렸다.
휴가를 마치고 지역으로 복귀하는 길. 말레이시아 교수님 부부의 차를 빌려 타서 편하게 올 수 있었다.
파견지역에서 차로 3시간 떨어진 곤다르 성벽 지역. 그리스같이 고대 왕국의 부서진 성벽이 그대로 존재했다.


좋은 만남들이 끝나고, 휴가 복귀 후 방문 간호로 부서를 변경하여 다녔다. 기관 안에서 생긴 일도 있고, 지역사회로 활발히 돌아다니고 싶어 기관장에게 요청한 사항이 받아들여져 새로운 코워커와 함께 방문 간호 일을 했다.

방문하는 지역의 주민들을 모아두고 위생에 대해 설명하는 코워커. 일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면 늘 차를 내주었다. 마지막은 방문간호사의 업무 내용들


이제 막 방문간호에 적응하려던 차에 국내 휴가를 갈 때부터 예정되었던 한국 NGO단체에서 하는 동부지방 의료봉사를 가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기가 시작되어 방문간호가 뜸했고, 몇 주 후에 한국으로 휴가를 가게 되었다. 기나긴 파견지에서의 삶이 지루해지고, 조금 적응해서 뭔가를 하려니 오래전부터 예정되었던 일들이 하나씩 다가온 것이다. 


벌써 1년이 된 것이다.

백내장 수술과 무료로 안경을 맞춰주는 안과 NGO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동부지방은 소말리아와 붙어있는 국경지대와 가까운 지역으로, 유명한 것은 짜트라는 마약성 식물과 무슬림 양식의 집들과 관광지이다. 


유일한 철도가 있는 지역으로, '지부티' 나라와 연결되어 있어 기찻길이 있는 도시로도 유명하다. 날씨가 더워 낙타를 당나귀처럼 운송수단으로 사용하는 곳이다. 


이곳의 유명한 관광지인 '하라르'를 반나절동안 단원들과 가이드를 고용해서 다녀왔다. 무슬림 양식의 아기자기한 동네이며, 시인 "랭보"가 살던 곳이다.

아기자기한 도자기와 접시들
하라르 성문
무슬림 사원
고전 양식의 숙박시설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 번째 국외 휴가는 한국으로 2주간 다녀오기로 파견 3개월부터 정하고 표를 샀다. 


국내 교육 때부터 왜 한국에 휴가를 오는 거지?, 라는 의문점은 살아보니 그리워지고, 힘들어지니 찾게 되는 건 역시 모국과 가족이더라는 뻔한 이유였다. 


병원에서 같이 일한 선생님도 만나고, 친구들을 보러 부산에도 다녀왔다. 

친구도 가족도, "행복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돌아와. 우리가 있잖아."라고 말해줬다. 

유일하게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잘 마치고 오라는 이야기는 먼저 귀국한 선배 단원뿐이었다. 


돌아오라는 말도, 끝까지 남으라는 말도 한국 밥만큼이나 큰 힘이 되어 돌아왔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 동이 트고 있었다. 외국에 오는 게 이렇게 싫은 적이 있었나.


인천공항은 늘 설렘의 장소였는데 이토록 비행기가 타기 싫었던 적이 있었던가. 

생애 처음으로 인천공항에서 제일 슬픈 순간이었다. 


그. 러. 나. 에티에는 돌아왔지만 파견지인 집으로 갈 수가 없었다. 

휴가 전부터 나라 상황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정권을 잡던 민족은 티그리 민족이었다. 이들은 최북부 중소수 민족이지만 반세기 넘게 집권하면서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반목 있던 건, 내가 살던 암하라 지역과 남부의 오로모 지역이었다. 원래는 오로모 민족이 다수 민족이면서 늘 억압받아왔기에 남부지방이 봉기가 자주 일어나는 곳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전세가 바뀌면서 암하라 지역 주민들도 광주 민주화 항쟁처럼 들고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으며, 의심되는 집마다 문을 두드리고 마구잡이로 사람을 패서 데려간다는 목격담이 쏟아졌다. 


다행히도 단원들은 상황이 잠깐 풀려 비행기가 있는 시간에 최소한의 짐만 들고 수도로 대피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수류탄이 터지거나, 크고 작은 테러가 종종 발생해 단원들이 더 이상 파견되지 않는 지역이 되었다. 관광지로 휴양하기 좋은 지역이 민족적 상흔 때문에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이 되어 안타깝다. 한 단원 언니가 지구 상에서 다시 가보고픈 나라가 있다면 전쟁 전 시리아라고 했다. 전쟁의 상흔이 아름다운 지역과 나라를 병들게 해서 속상하다.

한국에서 휴가를 마치고 온 나는 수도 유숙소에서 '대피'를 했다. 출근도 안 하고, 못 먹었던 수도 음식들도 먹으러 다니고 일주일 가량은 행복하게 지냈다. 


일주일, 이주일 그 시간이 두 달이 되어갔다. 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인터넷도 전화도 먹통인 곳에서 할 일 없이 누워 지내는 건 고통에 가까울 지경이었다. 

몸이 근질근질한 것을 못 참던 동기 단원은 마더 테레사 봉사센터를 찾아가서 피부 치료를 보조하는 활동을 했다.


그렇게 두 달을 채워갈 무렵, 극적으로 소강상태가 되어 마지막으로 짐 쌀 시간을 주겠다며 12시간의 복귀 시간을 허락받았다. 짐을 못 챙기고 한국으로 귀국하게 된 친구의 짐도 싸러 가야 했기에 시간이 없었다. 비행기가 도착하고 파견지에 발붙일 시간은 8시간이 안되었다. 그 시간 안에 친구 짐도 싸고, 내 짐도 싸고, 기관 동료,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도 해야 했다. 언제 다시 올 줄 모르기에 말이다.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가장 먼저 귀국한 친구의 집으로 향했다. 문제는 우리 얼굴을 알던 집주인이 없었고, 일을 하는 소녀만 있었다. 그간 있던 지역에서의 일들로 사람들은 외부인의 문소리에 문을 걸어 닫고 열어주지 않았다. 


악다구니를 쓰고 난리를 쳐도 열어주지 않아 먼저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전화까지 막아놓은 상태라 친구에게 국제전화도 잘 되지 않았다.


겨우 집에 도착하자마자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물바다가 된 집이었다. 잠깐이라 생각하고 수도관을 잠가놓지 않았는데 화장실 변기관이 터진 것이다. 다행히 전기코드를 선반 위에 올려놔서 가전에 이상은 없었다(하마터면 감전사할 뻔했다).


주인집으로 달려가서 상황을 알리고 수도 밸브를 잠갔다. 두 달 동안 콸콸 나온 물이 벽지며 옷장이며 곰팡이를 만들었고, 두고 간 짐들도 물에 젖어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눈물이 홍수처럼 차올랐다. 그래도 시간이 없으니까 귀중품을 챙기고 주인에게 나머지 짐들을 부탁한다 말하고 직원들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렸다.

수도관이 터져 난리가 난 집

직원들, 홈스테이 가족들을 만나면서 한국에서 사 온 기념품을 줬다. 그러자 직원이 내가 오면 주려고 했다며 전통 옷을 선물하는 게 아닌가. 다른 직원은 손녀 옷을 사 온 나에게 고맙다며 현지 전통 음식 재료들을 한 박스씩 싸서 주었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랑 나눠먹으라며ㅠㅠ...

여기서부터 그전에는 콧물처럼 나오던 눈물이 범람한 강물처럼 펑펑 쏟아졌다. 엉엉 울고 나니 비행기 시간이 다가왔다. 


친구네 집주인이 집에 왔으니 이제 와도 된다고, 일하는 아이가 안 열어줘서 미안했다고 전화가 왔다. 마무리로 친구의 짐까지 싼 뒤, 공항으로 향했다.

직원의 귀여운 손녀딸,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지?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작별을 고하고, 다음날 출국하는 동기 단원의 송별회를 하러 유숙소에 짐을 풀고 단원들과 밤길을 걷던 중, 정체불명의 소(음메)에게 들이받힌다.

(다시 써도 이 이야기는 정말 스펙터클 하다)


이야기의 배경은 이러하다.

그날은 에티오피아 달력으로 새해를 기념하는 날이었다. 새해엔 염소와 소를 잡는다. 그래서 집집마다 피 냄새가 진동을 하고 마을에서 소를 잡는 행사를 연다.

그중 한 마리의 소가(추측) 자신의 친구와 가족이 도살당하는 것을 보고 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탈출한 양 뿔의 흰 소는 소 주인이 쫓아오는 소리도 무시한 채 자신의 목숨을 위해 달린다.

일직선으로 달렸으면 되었을 것을, 이름 모를 동양 어느 나라에서 봉사를 하겠다고 자기네 나라에 온 어느 여자 사람을 향해 방향을 틀더니 돌격했다.

사람에게 난 화를 누구에게라도 풀고 싶었는지 그 동양 여자애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등을 보이다가 왼쪽 엉덩이를 뿔에 찍힌다.

그만하길 다행이었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엉덩이만 찍히고 다행히 뼈가 부러지거나 목숨에 위협이 되는 상황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앞에서 본 다른 기수 단원들과 동기 단원들이 부축을 해서 유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오니 유숙소 거실에 한 남자단원이 노트북을 하고 있었는데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들어오는 나와 다른 단원들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소에 받혔단다.


대충 사연을 알게 된 그 단원은 자기도 여기서 되는 일이 없었지만 저렇게나 기구한 사람이 또 있을까 생각했더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