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 복귀 후 활동, 소소한 이야기
*본 글은 종이책 출간 전 발행 글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향후 출판 서적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파견후 1년 반까지
10월에 파견되었는데 이듬해 10월에 다시 복귀했다.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았던 상황이 풀리면서 본부에서 파견지로 단원을 다시 보내는 것이 괜찮다고 판단하여 복귀가 가능했다. 문제는 그 안전의 기준을 무엇으로 볼 것이냐인데 결국 1년도 안되어 새로 파견된 단원들까지 모두 다른 지역으로 재파견되었고, 더 이상 한국인 봉사단원은 내가 있던 지역으로 가지 않는다.
2019년 10월, 에티오피아 총리(오로모/암하라 출신)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면서 갈등이 점점 누그러질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가게와 상점들이 문을 열기 시작하면서 단원들의 출근도 가능해졌다. 방문간호 활동을 같이 다니면서 학교보건 교육만 준비했는데 지역 주민 대상 위생교육도 필요함을 느껴 코워커와 함께 준비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신규단원들이 왔다. 시작은 다 똑같아서 다들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힌다고 저녁 먹으면서 얘기가 나왔고, 협력활동을 제안했다. 파견 초부터 사두었던 활동물품 중에 신체검사 물품이 넉넉하게 있었는데 기관에 나눠주고도 남아서 어떻게 쓸지 고민이었다.
유아교육 단원인 신규단원의 요청과 구비되어있는 물품으로 지역 공립 유치원마다 신체검사를 해 보기로 계획했다.
일전에 언급했듯이, 학교 보건은 지역 보건소가 담당한다고 명시될 만큼 미취학/취학 아동의 보건은 열악하다. 신체검사 또한 공립 유치원 어린이들에게 있을 리 만무한 혜택이다. 해봤자 크게 득 되는 것도 없지만 보건소에 찾아오는 성인들이 취업, 졸업, 운전면허를 위해 받는 신체검사가 인생에서 처음인 사람들이 대다수인 곳에서 어쩌면 특별한 추억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학교는 10곳 정도를 선정해서 미리 선생님들과 회의를 갖고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논의했다. 학교마다 유치원마다 선생님들의 역량이 천차만별이라서 통제가 안 된 아이들과 씨름을 하기도, 완벽한 통제와 숨 막히는 질서 정연함에 감탄을 연발한 시간들이었다.
이때, 각 학교를 다니면서 남겨놓은 자료들로 WHO Z-score에 맞춰 평균을 내보니 어림짐작으로 알았지만 대부분 세계 어린이들 성장발달보다 미달이었다.
재미있던 점은 NGO의 지원을 받아 학교에서 염소를 기르던 곳은 무상 우유급식이 실시되었는데 이곳의 아이들은 다른 학교들에 비해 성장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처음으로 통계를 배웠더라면, 연구를 할 수 있었더라면, 좀 더 데이터화 해서 우유급식을 증진하는 프로젝트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연구적 마인드가 처음 생겼다.
+그 외 활동들
신체검사를 하고 보니 아이들의 성장발달이 낮은 결과가 나왔다. 우리 선에서 또 해 줄 게 없을까? 그냥 몸무게랑 키가 작네, 가 끝일까? 그렇다고 당장 비타민, 빵, 우유를 사서 보급한다는 건 현실성이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다 먹는 게 부실하다면 왜 부실할까? 부모들이 골고루 영양소를 줘야 하는 걸 인지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실제로 그러했다. 인제라라는 곡물 음식을 가지고 고춧가루를 빻은 소스나 가루를 묻혀 먹이는 게 대부분 가정집에서의 식사이다. 우리로 치면, 쌀밥에 고추장만 비벼 주는 셈이다. 김치도 먹고 콩자반도 먹고 단백질인 두부, 콩, 계란 반찬도 가끔씩 먹여야 하는데 고기는 고사하고 단백질 섭취조차 어려웠다.
하지만 콩류 제품이 많은 현지 특성상, 고기를 구하기 어려워도 콩류 제품들로 단백질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다는 전문가의 의견이 있었다.
그래, 영양교육을 한 번 해보자. 하지만 보건 단원 2명(임상경력이 전부), 유아교육 단원 1명으로 영양교육 자료를 만들자니 이게 맞나, 하면서 어려움에 부딪혔다.
SOS를 요청했다. 남부에 있는 영양 단원 2명에게 교육과 관련된 요청을 했고, 두 분 다 자료를 만드는 데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같이 있던 단원 언니가 그럼 이들을 초빙해서 일주일 동안 영양교육을 실시해 보는 건 어떤지 제안했고, 안 그래도 안전문제가 불거진 지역이라 근무지 이탈 허가를 사무소에서 안 내줄 거라 생각하고 요청했는데 웬걸, 됐다. 한 분은 본인 현장 사업(대규모 프로젝트) 일정과 맞물려서 못 오게 되었고, 한 분만 오게 되었다.
초빙된 단원과 신규단원들은 이미 유숙소에서 같이 지내면서 서로 알고 지냈기에 요청이 가능했다. 내가 수도에서 두 달 동안 대피를 하고 대피가 끝나자마자 남부(오로모 민족)에서도 봉기가 일어나면서 남부 단원들이 유숙소로 대피를 했기 때문이다. 신규단원들은 현지 적응훈련으로 유숙소에 있었고, 대피 온 남부 단원들과 한 달 가까이 지냈다.
그렇게 그는 남부에서 3시간이 넘도록 봉고버스를 타고 올라와 수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마지막 국외 휴가를 끝내고 복귀하는 '나'와 함께 영양교육 협력활동이라는 타이틀로 북부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나는 신체검사 협력활동이 끝난 틈에 남은 1주일 국외 휴가를 탄자니아로 다녀오는 길이었다.
영양교육은 비교적 원활하게 끝이 났고 학부모들도 선생님도 우리도 모두 나름의 보람을 남겼다.
예상대로 부모님들은 영양소에 대한 기초를 잘 모르고 있었고, 이번 기회에 배우게 되어 아이들에게 골고루 영양을 공급할 거란 다짐을 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교육을 하러 긴 여정을 떠나온 단원도 기관에서 기회가 없어 못한 활동을 협력활동으로 하게 되어 보람찼다고 했다.
그는 기관(보건소 영양 단원)에서 영어를 하는 직원(남부 지역은 공용어인 암하라어 대신 오로모어를 쓰기 때문에 현지어 실력과 별개로 영어를 할 수 있는 직원이 필요함)에게 내가 보건교육을 진행하고 싶은데 도와주겠니?, 라고 했다가 큰 액수의 돈을 요구해서 바로 포기했다고 전했다.
활동의 성과는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개개인에 따른 상황과 운의 문제였다.
본 사건은 "햄버거"로 시작한다.
우리는 아무 감정이 없었다. 1년짜리 보건교육 프로그램으로 온 단원도 귀국을 석 달 앞둔 상태였고, 2년짜리 일반 봉사단원도 귀국 7개월을 남긴 상황이었다.
이미 여기서 지낼 대로 지내봤기에 단원 간의 이성적인 감정은 사람을 더 외롭게 만들기도 하고, 이성에게 감정을 가진다는 것도 오래전 일이기도 해서 감정을 만들 일도, 생길 일도 없었다.
햄버거를 먹기 전까진 그랬다.
얼굴과 이름만 아는 단원 둘이서 수도에서부터 비행기를 타고 쭉 같이 왔다. 말할 사람이 둘 밖에 없기도 하고, 비행기에서 휴대폰도 안 되니 이런저런 얘기하면서 갔다. 이때도 둘 다 그냥 ‘사람’이었다.
다음 날부터 활동을 하기에 앞서 동네 구경, 단원들 기관 구경하고 점심시간에 자주 가는 수제버거집(말이 수제버거지, 패스트푸드점이 없는 여기선 최고의 레스토랑)을 갔다. 내가 수제버거를 우걱우걱 먹고 있는 모습에 꽂혔다고 한다. 희한하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역시 모르겠다. 사귀고 나서 들었을 때 엥? 했다.
사람들이 잘 먹는다, 복스럽게 먹는다 하더니 진짜 잘 먹는 걸로 썸을 타게 될 줄이야. 본격적인 섬섬한 사이가 된 건 그의 알게 모르게 관심 주기 기법이 통해서다. 활동할 때 묵묵히 도와주고, 챙겨주고, 그런 걸 계속 주변에도 암시를 줘서 같이 있던 언니들이 "걔가 너 좋아하는 것 같아." 하는 소리를 듣게 했다.
수법이 아주 지능적이었다.
결국 넘어갔고, 우리는 은근슬쩍 너네 지역도 가고, 수도에서도 보고, 우리 지역도 다시 오고 그랬다. 그의 출국일 석 달 전부터 일어난 일이었다. 귀국 직전에 섬섬한 사이가 되다 보니 한국 가서 만날 기회도 있을 거라 생각해서인지 그는 별 말없이 귀국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혼자만의 짝사랑인 줄만 알아서 고백을 못했다고 한다. 한국 와서 천천히 보면서 넘어왔을 때 고백하려 했다고 한다. 썸을 타며 어떻게 날 더 좋아하게 만들지 고민했다고 한다.
눈치가 빠른 줄 알았는데 살아보니 곰탱이 아저씨다.
맑은 어린이
1분기 때, 유치원에 있는 동기 단원 언니의 기관으로 지역 단원들이 운동회를 도와준 적이 있다. 인디언 띠도 만들고, 달리기도 하고, 과자 먹기 게임, 동영상도 틀어주고, 노래도 불렀다. 마지막 시간엔 모두에게 풍선을 불어서 나눠줬는데 애들이 손이 미숙해서 풍선을 자꾸 터뜨렸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지금부터 터뜨리는 풍선은 끝이라고, 풍선이 더 이상 없다고 하면서 귀가시켰다.
풍선이 없다, 없다 하는 말을 듣고는 집에 가려던 한 어린이가 선생님들 풍선 더 없어요?, 라고 해서 단호하게 없다고 하니 그럼 선생님들은 어떡하냐면서 자기가 들고 있는 풍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아닌가?!!
너무 귀엽고, 고마워서 우린 집에 가면 많아서 네 거는 너만 가지면 돼,라고 말했더니 행복하게 웃으며 돌아갔다.
매일같이 돈 달라고 길거리서부터 기관에서까지 달라, 달라, 하는 얘기만 듣다가 쪼끄만 꼬맹이가 가장 소중한 풍선을 우리한테 주려고 했다니,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참전용사 할아버지
파견초, 집에 가는 봉고버스를 탔는데 참전용사 할아버지를 뵈었다. 그땐 너무 정신없어서 그렇군요, 하고 인사했었는데 좀 더 얘기하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볼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후에도 보건국 국장의 아버지도 참전용사 출신이었다는 얘길 듣고, 암하라 주에선 한국전에 참전한 고마운 분들이 많이 계셨다는 걸 알게 됐다.
(나중에 찾아보니 암하라족이 왕실 친위대로 있어 황제의 명령으로 파견을 많이 갔다고 한다)
벼룩과 빈대, 쥐, 그리고 고양이, 기타 등등
벼룩은 물어뜯듯이 뜯어서 벌에 쏘인 것 같다. 빈대는 밤마다 침대 밑에서, 소파 밑에서 올라와 수면을 방해한다. 쥐는 비가 오면 처마 밑에 들어왔다가 틈이 있으면 집 안으로 침투한다.
벼룩을 퇴치하는 건 불가능 하지만 피할 순 있다. 귀가 후 모든 옷을 현관에 벗어두고 샤워실로 향한다. 가방과 기타 소지품도 탈탈 마당에서 턴다.
빈대는 침대를 포기하거나 소파를 포기한다. 초가삼간을 태운다는 옛말이 결코 옛말이 아니다.
쥐는 잡아야 한다. 밤마다 돌아다니기 때문에 어떻게든 낮에 잡아야 한다. 낮에는 구석에 들어가 있기에 연기를 태우고 시끄러운 소음을 유발해서 기절시킨다. 확인되는 장소를 뒤져 쥐를 잡는다.
몰래 온 손님으로 쥐만 있는 줄 알았더니 가끔씩 마당에 놀러오는 고양이랑 지붕위의 원숭이도 있었고, 배 타러 호수 가면 하마도 있었다. 동부에 있는 하이에나와 남부에 있는 악어는 보지 못했다.
단수와 정전, 나의 친구 되었네.
우기가 되면 소중한 페트병 친구들을 모아둔다. 물을 담아두고 단수가 되면 사용한다. 정전이 되면 추운 우기(에티오피아는 고도가 높아 연중 기온이 초가을 날씨다)에 끓인물을 페트병에 담아 죽부인 삼아 잠이 든다. 전기담요를 쓸 수 없기에 그리한다.
자세히 보면 다르다.
동양인으로서 한중일의 비교를 알 수 있는 눈처럼 아프리카 대륙 내 국가 간 사람들의 생김새도 구별할 수 있는 눈이 생겼다. 더불어 흑인이라고 다 같은 흑인이 아님을 느껴 분위기를 통해 유럽인지, 미국인지, 아프리칸인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에서 에티 사람 같은데, 하면 에티오피아 출신이고, 케냐 사람 같은데, 하면 케냐 사람이더라.
자이카 친구들
일본 파견 봉사단원들과 지역에서 마주칠 일이 많아 연락하며 지냈다. 새로 이사했을 때 집들이도 하고, 그 친구들이 협력활동으로 운동회를 할 때 도와주러도 가고, 우리가 한국문화의 날 행사를 할 때 필요한 물품도 지원해주고(모자란 프라이팬 등), 방문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켜줬다.
정말 고마운 친구들.
알게 모르게 있던 일본 사람들에 대한 배타적인 고정관념이 우호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잔지바르 (탄자니아의 섬)
마지막 국외 휴가로 다녀왔던 잔지바르는 2년여의 시간 중에서 가장 인상 깊게 남는다. 일상생활이 힘들 때 잠깐 다녀온 3박 4일 여행이 임팩트 있듯이 나에게도 그러한 시간이 잔지바르에서의 5박 6일이었다.
- 같은 아프리카라도 유명한 관광지는 다르구나
- 사람들이 놀리지도 않고 귀찮게 따라오지도 않네
- 한국과는 또 다른 자유를 느낌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의 자유가 휴식을 허락했다. 남편과 언젠간 다시 꼭 와야 할 여행지 중 하나.
(남편은 귀로 여행 때 갔던 나미비아, 남아공, 짐바브웨의 빅토리아 폭포가 나랑 다시 가고 싶은 여행지다)
길거리 아이들
먼저 귀국한 선배 단원 언니가 길거리에서 병들어 쓰러진 아이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오면서 돕게 된 무리가 있었다. 도중에 만났다 헤어지길 반복하다가 내가 다니는 현지 교회를 통해서 숙식을 해결해 주는 곳을 찾게 되었고, 그 돈은 단원들이 자발적으로 걷어서 생활비로 부쳤다.
조를 짜서 두 명이 이 주에 한 번씩 필요한 것과 약을 사서 방문했다. 그렇게 2달이 채 되지도 않아 아이들은 또다시 거리로 나갔다. 남은 아이 한 명은 계속 남아있겠다고 했으나 마지막엔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을 듣지 못했다.
태권도를 배우고 싶다 해서 태권도 학원도 다니게 해 주고(이렇게 사교육을 보내는구나 싶었음), 몸에서 이가 많이 나와 직접 씻기기도 했는데 너무 안타까웠다.
길에서 다시 우연히 마주쳤을 때, 자기는 다신 안 돌아갈 거라고 길에서 규칙 없이 지내는 게 편하다고 할 때 한 시간을 붙들고 서 있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을 만났다는 사람들
한류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다. BTS가 지금의 BTS가 되기 전부터 확인된 팬만 에티에서 몇 백 명은 넘었던 것 같다. 가끔 우릴 보고 연예인 보듯 놀라기도 했다. 수도에 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어머, 한국인!" 하는 소리에 연예인 같은 웃음을 날려보기도 했다.
동네에서도 길 가다 만났던 십 년 전 왔던 단원의 이름을 기억하며 나한테 그 사람과 친구냐고 묻더니 지나갈 때마다 커피며, 음식이며 배 터지게 대접하던 슈퍼 아주머니도, 내가 우산이 없어 우산 좀 같이 써줄 수 있냐고 했을 때 도와준 친구도, 랄리 밸라 관광지서 아침을 대접해주고 공항 가는 차를 예약해준 친구도, 현지어로 말이 통할 때마다 초대하기를 좋아하는 에티 사람들도, 한국인을 만났다고 또 다른 외국인에게 말하겠지요.
당신들의 정이 고마웠고, 그립습니다.
70년대 한국에 온 미국 봉사단원들이 한국을 회상하면
정이 많은 한국 사람들이 가장 먼저 기억나는 것처럼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