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생활부터 봉사단원까지
*본 글은 종이책 출간 전 발행 글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향후 출판 서적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나는 뭐하나 제대로 끝내지 못하고 왔다.
처음 간 종합병원에서의 신규 생활도 어렵고, 무섭단 이유로 도망치듯 나왔고, 두 번째 간 병원 생활도 1년 만에 해외봉사 갈 거라면서 후다닥 뛰쳐나왔고, 내 의지로 간 봉사활동도 2년을 못 마치고 중도 귀국이라는 미명 하에 불명예스럽게 쫓겨났다.
4년 다닌 간호학과 생활은 학점이 3.xx이 되지도 못한 채 졸업장만 겨우 받아서 나왔다. 내세울 수 있는 건 졸업장(성적이 형편없는)과 간호사 면허증이 전부다.
한국에서 쭉 자라온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주어지는 가장 큰 선택은 입시일 것이다. 학교, 전공, 내 수준에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 등을 선별해서 '실패'하지 않도록 선택해야 한다. 스카이냐, 인 서울이냐, 지거국이냐, 의대냐, 공대냐, 하는 선택은 개인의 삶에 따라 달라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애매모호한 경계의 그 '실패'를 하지 않으려 머리를 싸매고 공부를 하기도, 고민을 하기도, 상담을 받기도 한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비평준화 지역이고, 수능시험을 잘 볼 자신이 없던 차에 수시 비율이 높아져가던 시기라 비교적 내신 올리기가 수월한 학교로 진학했다. 개교한 지 3년째 되던 모교가 지금은 13년이 되어간다니 시간이 참 빠르다.
그럼에도 1등 같은 건 해 본 적이 없다. 그럭저럭 의/약학대를 제외한 전문대 및 지방대의 보건계열 학과를 진학할 수 있는 내신으로 여기저기 찔러 넣었다.
증폭된 불안감으로 절대 '실패'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부모님의 등골을 브레이킹 하면서 전국에 있는 학교에 수시 원서 창을 불나게 드나들었던 시간이었다.
수도권 전문대, 지방대 4년제 합격하고(현재 간호학과는 4년제 일원화로 전문대도 동일한 간호학 학사 나옴), 왜?, 라고 물을 만큼 희한하게 수도권이 아닌 부산으로 간다.
당시 20년 가까이 살아온 고향이 떠나고 싶다는 떠돌이 심보가 심각하게 발동한 탓도 있었고, 전라도가 고향이었던 아버지가 20살이 되던 해에 상경하셔서(조부모님 포함 모든 식구들 상경) 수도권 외 타 지역에 연고가 없던 까닭에 지방(시골 아님, 수도권을 떠난 지방)에서 살아보고 싶었던 이상한 로망(?)이 있었기 때문에 택한 결정이었다.
선택에 대한 후회가 없는 성격 탓인지, 부산에서 살았던 4년은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접근성이 좋은 동네인 부산은 꼭두새벽부터 가야 하는 병원 실습에 제격이었다. 수도권 및 충청/강원권에서 학교를 다닌 주변 친구, 지인들은 퐁당퐁당 고시원이나 모텔, 찜질방에서 자기도 하고, 교통편이 오래 걸려 새벽 4시부터 나왔다는 이야기 등 50분 걸리는 거리가 최장거리였던 내게는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학교가 국립대라거나, 언급하면 누구나 알만한 지방 사립대는 당연히 아니었다. 굳이 여기까지, 왜 그런 학교에?, 라는 의문도 있었지만 내 수준에서 최선이었고, 나쁘지는 않았던 곳이라 생각해서였다.
문제는 나쁘지는 않네,라고 '선택'했지만 학과 내에서 내 수준은 나쁜 수준이었고(ㅎㅎㅎ), 최악은 면했구나,였다.
그나마 졸업 전에 취업이 되는 과의 특성상, 집에서 차로 한 시간이 좀 넘는 규모 있는 종합병원에 합격했다.
집을 떠나 있으면서 일을 다니는 건 좀 힘들기도 하고 이럴 때 엄마 버프(에너지 보충)를 써 보는 거지, 하면서 집 근처로 지원서를 냈고, 경쟁률이 좀 있는 연봉이 꽤 높은 대학병원들은 다 떨어지고, 딱 한 군데 붙어서 면접을 보고 붙었다. 차분히 졸업 때까지 국가고시 준비하고 무사히 통과했다.
간호사 국가고시 합격률은 94% ~ 96%를 상회한다. 간혹, 변별력을 높인 해는 88%까지 떨어진 적도 있다 하지만 저 정도 합격률에서 떨어지면 동네 망신이라면서 겁을 준다. 그렇지만 아직도 현업에 계시는 이모도 그렇고, 다른 수많은 선생님들도 떨어지고 나서 굴욕과 아픔을 딛고 오랫동안 좋은 간호사, 보건의료 관계자로 활동하고 있다. '실패'는 실패가 아닐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이런 학생이지만 뽑아주셔서 감사하다는 마음이 무색하게 멘탈이 붕괴되고, 안 그래도 둔하고 느린 손이 붕괴된 멘탈과 함께 떨기까지 하면서 최악의 신규로 낙인찍히고 도망치듯 사직하고 면담 2시간 만에 사직이 결정되고 나오게 된다.
그다음 병원엔 잘 적응하고 지냈지만 머리와 몸이 태초부터 아둔해선지, 실수는 줄어들어도 없어지진 않았다. 매 순간 줄어드는 실수에 마음 놓이지 않고, 단 한 번의 실수라도 내 손으로 간호사가 아니라 잠재적 살인자가 될까 가슴 졸이며 출퇴근하는 일이 싫어졌다.
언제까지 해야 할까, 그만둬도 다시 가야 할 병원생활이라면 마음을 다잡고 여기서 계속하고 싶은데 어쩌지, 고민하다 발견한 봉사단원 모집공고.
목돈 없이 장기간 생활하는 개도국 생활과 진로를 변경할 수 있는 기회, 이거다 싶어 지원해서 갔다.
이전 정부부터 지속되는 청년 해외취업 정책의 일환으로 봉사단원 파견자를 계약직 해외취업자로 신분을 변경했다고 한다. 덕분에 정말 많이 뽑고 있고, 자주 파견하고 있어 최근 면접장에는 사람이 휑할 정도로 경쟁률을 느낄 수 없다 한다(최측근의 증언=파견 중인 동생).
그렇게 간 봉사활동조차 문제까지 일으키며 부적응자가 됐다. 뭐하나 제대로 한 것도 없는 것 같고,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끈기도 없어 보이고 어디 하나 정착하지도 못했다.
'실패'한 셈이다.
후회는 없다. 순간순간 내가 한 선택, 행동이었기 때문에 반성은 할지언정, 후회는 하지 않았다.
앞날이 걱정될 뿐이었다.
이런 조각 경력으로 뭘 할 수 있을까.
원하던 삶은 무엇이고, 잘 살 수 있을까.
인생에 실패는 없다지만 이대로 실패자라고 생각하며 못나게 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