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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노니 Dec 11. 2019

[출간전 연재] 갑작스러운 귀국, 그리고 기다림

중도 아닌 중도 귀국

*본 글은 종이책 출간 전 발행 글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향후 출판 서적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 발단

섬섬한 사이를 키워가던 그가 내가 있던 지역으로 영양교육 왔을 때부터 요청한 일이 있었다. 본인과 같은 지역에 계신 시니어 선생님(50세 이상 일반봉사단원은 시니어 단원이라 일컬음)이 고아원 같은 곳에서 봉사활동을 하시는데 그 기관도 현지 사람에 의해 개인이 운영하는 곳이라서 위생교육 같은 인력과 물자가 필요한 일이 있다며 미끼를 던졌다. 남부에 와줄 것을 요청했다.


나와 같은 지역에 있는 단원 언니들 손잡고 가려했으나 시기가 너무 일러 신규단원들은 안된다는 말에 나만 개인 휴가를 써서 갔는데 여차 저차 해서 교육은 못하고 단원들이랑 같이 트레킹만 다녀온 진짜 휴가를 보내다 왔다. 


이때 일주일을 그의 집에서 보내고(그의 집이 베이스캠프라서 모두들 여기서 모이고 해산했음) 다시 일정을 잡았다. 그가 귀국하기 일주일 전에 가기로 약속했다.



2. 전개

그 날이 다가오기 두 달 전, 1년에 두 번 있는 안전 집합(전국의 단원들이 수도에 집결해서 위급상황 대비 훈련도 하고, 안전 교육도 받는 날)이 있기 전에 작년에 했던 한국문화의 날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작년보다 하는 것도 많아져서 인력이 필요해 전국에 있는 단원들 중 자원봉사자를 요청했고, 당연히(?) 그도 왔다. 그렇게 또 왔다 갔고, 이젠 가끔 구실을 찾아내 연락도 자주 하는 사이가 되었다. 26년 모태솔로 인생에 이런 날이 있구나, 하면서도 왜 여기서 하필 여기서,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문득, 작년 안전 집합에서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났다. 소에 받히고 나서 유숙소에서 처음 본 사람이 저 단원이었지. 다음날 안전 집합 때도 인사하고 단원들이랑 저녁시간에 같이 보기도 했었지. 별 다른 감정이 없던 사람이라서 잊혔었는데 더듬어 보니 내 뇌리에 박힌 게 하나 있었다.


안전 집합이 끝나고 각자 지역에 따라서 대절한 버스를 타고 공항에 가거나 수도를 가는 작별의 시간이었다. 이 날이 마지막 인사인 단원이나 코디네이터(구 관리요원; 단원들의 복무를 담당하는 관리자)들도 있어 각자가 인사하기 분주한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눈을 보면서 인사하던 중 무표정에 아무것도 없었는데 희한하게 뭐라 설명하기 힘든 인상이 박혔다. 호감?, 관심?, 얼굴이 맘에 듦?, 그런 감정이 아니라 누가 '탁!'하고 뒤에서 친 듯한 느낌이 화살처럼 지나갔다.


'뭐지? 내가 그 단원 좋아하나? 아니면 그 단원이 나 좋아한다고 착각하는건가.’

진짜 그랬더라면 임지 복귀 후에도 계속 생각이 났을 텐데 그러진 않았다. 

이름도, 얼굴도 가물가물해질 즈음 다시 만났고, 우리 둘 다 그때 마음이 없었던 건 분명했다.

(결혼을 하고 나니 이때 기억이 예지력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헤어졌으면 기억도 안 났을 것임으로 패스)



정신없이 행사를 치르고 나서 일이 터졌다. 아주 사소한 데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공항으로 보낼 사람들도 보내고 나서 밥 준비를 하러 들어갔는데 가스가 떨어졌다. 가스통을 교환하는 사람이 왔다. 가스는 LPG 가스통을 돌려가며 쓰기 때문에 시장에 있는 현지 사람이 온다. 시장에 있는 현지인들은 가격을 좋게 말하면 흥정하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후려치기를 잘한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기에 그들과 실랑이를 벌이다 보면 신경이 곤두섰다.


액수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가스가게 점원이 교환을 하러 왔고 택시비로 500원이 더 나왔으니 돈을 더 달라고 요구했다. 


배고프고 피곤한 데다가 집 안(행사 동안 주로 이용한 다른 단원의 집)에서까지 실랑이를 벌인다니 짜증이 올라왔다. 시비가 격화되자 집주인이 와서 말리다가 급기야 집주인 아저씨와 불이 붙게 됐다.


이들 집주인과는 이전 단원이 갑자기 귀국하게 되면서 빈집이었다가 다시 단원이 와서 소개까지 시켜줬기에 사이좋은 사이로 친분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사람과 싸우게 된 것이다. 왜 그렇게 상황이 돌아갔는지는 지금으로도 이해할 수 없으나 내가 확실히 잘못한 상황이었다. 


너네들은 항상 그런 식이야, 못된 사람들, 하면서 옆에 있던 막대기를 벽에 두드리면서 나가라고 큰 소리를 냈다. 단원들도 나와서 말리고, 아저씨와 나는 흥분을 쉽게 삭이지 못하고 그대로 누구도 풀 마음 없이 돌아갔다. 


그날 밤, 아저씨는 집주인 단원 언니를 불러 뭐라 하더니 사무소로 연락을 했다. 나는 저 단원이 내 집에 안 왔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경악할만하다면 경악할 만하고 별일 아니라면 별일 아닐 수 있는 현지인과의 다툼이었다. 물론 잘잘못을 따지자면 내가 잘못했으나 이곳에서 겪은 폭행, 성희롱, 소매치기, 사기 등을 생각하면 정말 잘 참아 왔다고 생각했는데, 사무소에선 입장이 달랐다. 단원에게 문제를 제기한 현지인이 있고, 심지어 그 단원은 제제조치를 받은 전력이 있었으니 이건 자격 박탈 사유였다.



3.  위기

안전 집합으로 수도 가기 일주일 전에 연락이 왔다. 사건 경위서를 쓰라했고 수도에 오면 보자고 말이다. 분위기가 위기로 가는 게 느껴졌다. 안전 집합에서 그를 만나긴 했지만 신경은 온통 저쪽이었다. 집합일이 끝나고 사무소에서 면담을 했다.



4. 절정

코디네이터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상황을 설명했고, 상황과 별개로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됐는지 얘기할 시간이 주어졌다. 어려서 그랬다지만 이건 명백히 단원과 나라의 명예를 훼손한 일이다는 결론이 났고 운다고 해결되지 않지만 그 자리에서 많이 울었다. 


그건 참회의 눈물이기도 했지만 그동안 마음고생에 힘들었는데 스스로가 힘든 걸 잘 견뎌냈다는 입증은 못하고 힘들다고 다 던져버렸다는 사실에 한심해서 그랬다.


재미있던 건 그 이후였다. 안전 집합 때도 이런저런 핑계로 만나자고 그와 선약이 있었고, 면담이 끝난 직후에 같은 지역 단원 언니와 그 단원이랑 수도에서 큰 재래시장 구경 가기로 약속했기에 눈물 닦고 갔다. 

끼고 다니던 선글라스로 부은 눈을 가리고 구경 잘하고 단원들과 저녁식사를 하고 헤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나를 기다리면서 단원 언니에게 나를 걱정했다는 얘기에 그전까지는 이러다 말 몽글몽글한 섬섬함이었는데 그 말을 듣고나서부턴 '나를 정말 좋아하나?' 하는 진지함이 생겼다.

취약점을 들켰는데도 별로 신경 안 쓴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랬던 것 같다.



4. 결말

그의 귀국일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고 남은 시간 동안 약속한 위생교육을 하러 남부로 갔다. 힘들어하는 나를 다독이는 게 전보다 더 눈에 띄었다. 예정대로 그는 먼저 출국해서 귀로 여행을 하러 남아공으로 갔고, 그즈음 나의 처분도 결정되었다.


활동을 열심히 해서 아쉬우나 그냥 둘 수는 없으니 나름(?) 마음 써준다고 자격 박탈 대신에 자진해서 중도하는 것으로 하고 귀국하는 걸로 하자 했다. 


이야길 들은 동기 단원 혹은 가까운 단원들이 사무소에도 전화를 하고 나에게도 전화를 했다. 탄원서 쓸 거라고, 나도 오늘 현지인이랑 싸웠다고, 내가 걔를 때렸는지 안 때렸는지 봤냐고, 만약 그 사람들도 사무소 연락처만 알아서 거짓말이든 진실이든 고자질만 하면 다 자격 박탈 아니냐며 항의를 했다고 전했다.


잘 모르는 사람들만 뒤에서 뭐 저런 애가 있냐, 면서 수군댔고 비슷한 시기를 지나온 단원들은 안타까움 반 사무소에서 너무 단호하게 처분한 것에 대한 분노함 반으로 연락했다. 소식을 접한 같은 기관의 친한 직원은 울면서 나도 현지인이니 내가 사무소에 전화하면 바뀌지 않을까, 했다.


나는 그쯤이면 되었다고 생각했고, 귀국 결론은 즉결 처분이라 사나흘 안으로 짐을 싸고 수도행 비행기를 탔다. 살던 집에서의 마지막 날, 그가 출국 비행기를 타기 직전,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때까지 그는 내가 자기보다 빨리 귀국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귀국 전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에게 활동을 할 기회를 줘서 고마웠고, 힘든 일도 얼마 안 남았으니 한국에서 건강하게 다시 보자는 내용이었다.


남아공을 지나 트럭킹이 시작했다고 나미비아 사진을 보냈을 때 사실 내가 너보다 빨리 들어간다고 전했다. 슬프지만 기쁜 내색이 채팅방 안으로 들어왔다. 결말이 이렇게 되어버려 아쉬웠지만 사실 조금은 기대됐다.


외로움에 찌들 때로 찌든 상황에서 애매한 썸띵만 남게 돼서 기분이 붕 떴다가 추락한 기분이었는데 4개월을 기다리지 않고도 곧 결말을 확인할 수 있다니 성격 급한 나에겐 오히려 재미있어진 상황이긴 했다. 공적으로는 수치스러웠으나 사적으로는 기대되는 아이러니한 심정을 갖고 귀국했다.


회한이 남지만 하고픈 활동 다 하고 와서 활동으로서 미련은 없었다. 다만 나름 적성에 맞는 활동 같다고 느꼈는데 다시 병원으로 가야 하나, 하고 싶다고 간 일도 제대로 끝내지 못했는데 앞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진로 고민을 하고 있는데 귀로가 끝나가는 그가 연락했다. 홍콩에 경유 중인데 기념품 뭐 사가냐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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