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연구 코디네이터에 대하여
*본 글은 종이책 출간 전 발행 글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향후 출판 서적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한두 달을 흥청망청 귀국 후 정착금(코이카 단원을 하고 귀국하면 정착 지원금을 준다)을 써 버리고 나니 슬슬 취업의 압박이 다가왔다.
남자 친구가 먼저 취업을 했는데 돈이 바닥 나서 급한 마음에 채용해 준다는 회사 아무 데나 들어갔다. 사실, 취업은 내가 먼저 했는데 작은 규모의 종합병원 정형외과 병동에 갔다가 왜 간호사 안 하고 나왔는지 새록새록 기억이 나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이전 병원보다 퇴보한 환경에 차라리 이전 병원에 다시 들어가면 갔지, 여기 오래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하루 만에 유니폼 반납하고 나왔다.
대개 간호학과 졸업생들이 그렇겠지만 타과 대학생들에 비해 스펙이 전무하다. 그나마 열심히 영어성적 만든 친구들은 토익이라도 있지만 간호사 면허증 하나로 취업이 커버되니까 기타 자격증은 만들 생각도 안 한다.
인생 첫 스펙이라는 것을 돈 내고 만들어보기 위해 컴퓨터 학원에 등록했다. 쉬운 것 먼저 하고 영어 학원 등록해서 토익 점수 만든 다음 주 5일 근무 혹은 야간 근무 안 하고, 환자 보는 일 안 하는 직장 찾아야지, 라고 생각했다. 오전에 컴퓨터 자격증 학원 다니면서 돈도 슬슬 바닥나니 오후엔 주사실 알바를 했다.
사람인에 이력서를 등록하고 계속해서 지원했다. 신중하게 고르고 골라 지원하니 연락이 한 군데도 오지 않았다.
6개월을 생각하고 스펙 쌓는 시간을 가지려고 했는데 부모님한테 또다시 등골을 브레이킹 하려니 취업이 안 되는 직종도 아니라서 무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는 도살장 끌려가듯 병원에 가게 되는 모습이 싫었다.
임상간호사 업무가 싫었던 건 아니다.
결정적 이유는 교대근무'만' 하는 간호사는 한국에 없었기 때문이다.
회식이다, 교육이다, 뭐다, 불려 나가고 틈만 나면 펑크 나는 스케줄에 오락가락하는 정신상태와 극심한 업무강도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안에서 느낀 동지애와 뿌듯함마저도 다시 병원에 들어가려는 시도를 하루 만에 무산시켰다. 고로, 임상으로의 회귀는 아닌 것으로 판명난 셈이다.
사람인에 이력서를 수정해서 즉시 지원되는 곳만 지원했다. 클릭 한 번이면 1분에 열 곳 넘게 지원이 가능했다. 열 군데 넘게 지원해서 어디에 뭐를 지원했는지도 몰랐다. 방문간호사, 제약회사 교육간호사, 의료기기 방문 판매원, 3개월 계약직 보건소 알바 등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 가장 하고 싶었던 건 "연구간호사"였다.
연구간호사는 간호사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명칭이 간호사 선생님들이 주로 일하셔서 그렇지, 연구 코디네이터(CRC)가 정식 명칭이다. 임상병리사 선생님들도 많이 하신다.
임상 연구에서 환자를 대면하고 검체를 채취하고, 데이터를 정리하고 경리 업무까지 동시에 하는 역할인데 세부적으로 연구과마다 교수님마다 병원마다 다르다.
TMI
의약품, 의료기기는 임상시험을 거쳐 안전성이 확보되어야만 시장에 출시할 수 있다. 제약회사에서 실험을 해서 약을 만드는 일만 있는 게 아니다. 약을 만들기 전 단계부터 출시 후 시장조사에 이르기까지 임상시험 과정이 보통 10년 걸린다고 보면 그 안에 관련된 직종의 숫자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중, 임상시험과 관련된 일에는 대학병원이나 일반병원의 의사들이 연구 혹은 제약회사의 제안 등으로 본인의 분야와 관련 있는 임상시험을 맡아서 한다. 진료와 함께 연구를 병행하려면 제반되는 행정, 보고서 작성, 환자 대면 등의 업무에 투입될 인력이 필요해서 채용한다.
이때 채용된 인력들이 CRC, 임상 코디네이터가 되어 임상시험을 조정해주고 관리해주는 일을 하게 된다. 그 외에도 CRA(임상시험관리자), PMC(시판 후 관리자), Medical Writer(임상실험 작성자) 등의 이름으로 다양한 임상시험 관련 직종이 있다.
제약회사로의 채용은 기본 스펙이 출중한 사람들이 유리하다.
영어점수가 높고, 학벌과 전공 관련도가 높을수록 원하는 조건의 회사에 채용할 수 있다.
병원으로의 채용은 복지 수준이 회사보다 현저히 부족하기 때문에 주로 임상에서 일했던 간호사들이 육아와 병행하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 하는 경우가 많다. 전공과마다(내과, 외과, 암 전문 등) 4대 보험이 되냐, 안 되냐, 교수님 소속이냐, 아니냐에 따라 인센티브나 페이 수준이 천차만별이다. 임상시험이 항상 생기는 게 아니고, 연구가 2-3년 가다가 접을 수도 있기 때문에 계약조건이 안정적이지 않다. [출처: 현직 CRC선생님이자 대학 친구 KSJ]
관심 있는 분들은 이곳을 참조하시길 바란다.
http://www.kacrc.or.kr/sp_main/main.php [한국임상연구코디네이터협회]
여하튼, 그런 쪽으로의 사무직은 내가 지원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지원했는데 면접 연락은 왔으나 번번이 그쪽에서 원하는 경력과 과가 아니어서 떨어졌다.
그러던 중 한 헤드헌터로부터 제약회사 계약직 제안이 왔고, 다른 하나의 기관에서도 연락이 왔다. 바로 면접이 가능하냐는 질문에 개인 소속 연구겠구나, 생각하고 별 기대 없이 갔다.
건물도 그렇고, 의사 선생님이 있는 외래가 아니었다. 여러 명이 함께 사용하는 사무실이 있었고, 회의실로 보이는 장소로 가서 면접(이라기 보단, 질의응답 시간 느낌)을 봤다.
선생님은 임상에 종사하는 분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그제야 내가 뭐에 지원했지, 머리를 굴렸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평범한 임상시험연구원은 아니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질문사항은 현재 연구에서 필요한 역량들을 세세하게 말씀하시면서 문서작성을 할 줄 아는지, 영어로 메일을 쓸 수 있는지, 채혈도 할 수 있는지, 행정 업무도 가능한지 등을 물어보셨다.
이미 단원 활동을 하면서 다 했던 것이라 세세하게 어떤 종류의 보고서를 작성했고, 영어를 사용한 이력, 현재 하는 주사실 알바, 행정 업무와의 관련성 등을 이야기했고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언제부터 일할 수 있냐고 물어보셨다.
'아, 아직 제약회사에서 연락이 안 왔는데.......'
일단 알바를 하니 8월부터 출근 가능하다, 얘기하고 돌아갔다.
남자 친구에게 확실한 합격을 받아놨다고 얘기하고 알바도 다음 주까지만 하고 그만둔다고 통보했다.
그 날, 연구책임자 선생님은 2달 동안 못 뽑던 사람을 뽑게 되었다고 과장님께 행복한 보고를 했다고 한다. 계속되는 지원자들의 면접에 지쳐가던 과장님이 딱 내가 면접 보던 날, 이번에도 아니겠지, 하시고 다른 선생님들만 면접을 진행했는데 합격자가 나온 것이다.
7월 말까지 연락을 준다던 헤드헌터는 연락이 없었고,
자연스레 합격한 기관으로 출근을 준비하고 8월 1일에 출근했다.
사무실로 출근하는 일반 회사원으로 전철을 타 보니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지옥철이 왜 지옥철인지 실감했다. 전철을 타고, 버스로 갈아타서 한 시간 조금 안 걸려 도착한 사무실에 가니 내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의자와 책상과 컴퓨터라니, 심지어 내가 온다고 필요한 사무용품 몇 가지를 새 거로 사서 가지런히 자리에 놔두셨다.
그것만 봐도 벅찬 행복이 차올랐다.
'미생에서 보던 그 사무실이야!'
구글 회사 같은 으리으리한 사내 복지 시설은 바라지도 않았다. 앉을 책상 있고, 의자 있고, 컴퓨터와 사무용품이 공급되는 사무실에서 보는 업무라니, 꿈만 같았다. 심지어 점심시간이 다가오기도 전에 뭘 먹을지 고민을 하다가 시간이 되면 우르르 식당으로 갔다.
많은 사람들이 하는 평범한 일상이 내겐 드라마 주인공 같은 하루로 보였다. 아무 때나 화장실을 가도 상관없었다. 물도 마시고 싶으면 떠다 마시고, 탕비실에 가서 차도 타 마실 수 있었다. (쓰다 보니 유치하지만 이런 게 로망인 사람이었다)
명찰도 나오고 명함도 신청했다. 사내 전산시스템도 익히고, 연구책임자 선생님이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브리핑해주시면서 점심시간을 이용해 부서 회식을 했다.
한국인가, 싶었다.
좀 지나고 나서 보니 기관 안에서도 내가 있던 부서과가 정말 좋은 분위기였고, 과에 따라 여타 다른 회사와 비슷하게 명령하고 피라미드 구조를 따르는 곳도 있었다.
물론, 월급은 줄었다. 재미있는 점은 그 정도가 30만 원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났는데 이유인즉슨, 전에 근무하던 병원도 공공병원이라 평달 월 급여가 짠 편이었다. 동생도 내가 다니던 병원에 간호사로 일했는데 그때는 내 급여의 1/3 올라서 다닐만했다고 한다.
내가 하던 일은 일반 연구간호사와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단순 코디네이터 역할을 뛰어넘어 연구 전체를 관리하는 관리자 역할이었다. 연구가 착수되는 시점이었고, 연구비가 나온 지 3달째 되던 시기였다.
연구비 행정 처리를 정리하고, 예산에 맞게 짜는 일과 연구적으로 대상자를 모집하고 검체를 채취해서 시료를 보관한 다음 분석업체에 맡기고 결과가 나오는 대로 통계 프로그램을 이용해 분석을 한 뒤, 논문을 쓰는 게 내 일이었다.
봉사단원이었을 때 하던 일과 거의 흡사했다. 활동계획이 생기면 그것에 맞게 예산을 짜서 본부에 필요한 물품을 요청하고 비용처리를 영수증 붙여서 올린 다음 집행한다. 집행되는 활동은 보건 교육이나 보건소 내 물품 구비 등이었다. 차이점은 통계 분석하고 논문을 쓰는 일이었다.
활동만으로 채워지지 않았던 지식은 학교에 가야만 채워지는 줄 알았는데 돈을 벌면서 배우게 되었다. 이보다 적합한 직업을 찾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