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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노니 Oct 29. 2019

[출간전 연재] 1분기 봉사단원 활동과 시련

1분기 활동기, 그리고 제재조치

*본 글은 종이책 출간 전 발행 글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향후 출판 서적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2월 ~ 4월

1. 한국문화의 날

학교보건을 준비하면서 지역 내 단원들과 함께 한국문화의 날 행사를 준비하고 치르게 되었다.


지역 봉사단원들이 마음이 잘 맞기도 했고, 봉사단원들이라면 한 번씩 다른 한국인 단원들과 협업으로 한국을 알리는 행사나 보건교육 활동, 시네마 천국 등의 활동을 상상한다. 

(물론, TV에서 비치는 모습같이 일회성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지만 행사를 준비하면서 한국에 대해서 홍보하는 효과는 지역사회 내에서 꽤 영향력 있어 보인다)


뭔가를 준비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각자 파트를 담당해서 학교에 연락을 해보고, 수도 사무소에도 활동에 대해 얘기하고 지원해 줄 수 있는 물품과 사람(?)을 지원받고 세부 프로그램들을 준비해나가는 과정에서 아귀가 맞물린다는 표현처럼 딱딱 맞아떨어져 갔다.


물론, 한국처럼 탁! 탁! 맞춰져서 모든 게 순조롭진 않았지만 단원 혼자서 기관 안에서 씨름하는 것보단 훨씬 든든하고 잘 이뤄져 나가는 활동이었다. 억지로 누군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각자 원하는 방향의 봉사단원 활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힘이 나서 한 활동이었을 것이다. 


준비기간 동안 전시할 사진을 고르고, 현장 답사를 가고, 공연을 위한 현지 태권도생들을 섭외했다.


단원들이 개인 사비로 지출해서 한국을 홍보한다니 사무소 측에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창고에서 남는 물품들을 주기도 했고, 행사 당일에 현장요원으로 봉사를 오시기도 했다.


행사는 성황리에 끝을 마쳤고, 이때의 활동은 단원 언니가 대표로 현지평가회의에서 발표하여 작성된 큐시트, 인쇄물, 프로그램 등은 전 지역의 단원들과 공유할 수 있도록 사무소를 통해 배포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런 활동들을 기대했던 단원들에게 귀중한 자료로 잘 쓰였다고 하니 고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수막을 인쇄업체에 주문하고, 요리 시식을 위해 직접 만들고, 전통놀이 등의 프로그램을 위한 물품을 준비하느라 행사 전날에는 잠을 못잤다.
200석이 넘는 자리를 꽉 채우고도 자리가 없어 뒤에까지 가득찼다. 맨 앞줄엔 단원들의 기관 동료들과 일본 봉사단원들이 착석해 주었다.
단원들뿐만 아니라 한국문화에 관심 있는 고등학생/대학생 친구들의 값진 봉사가 있었다.


2. 교사 대상 응급처치 교육

준비 중이던 학교보건교육은 학교에 있는 단원들의 요청에 따라 교사를 대상으로 한 단순 응급처치 교육으로 실시됐다. 학교 선정은 선배 단원들의 학교들이 1순위였고, 지역 보건국에서 연결해서 만나게 된 교육국장님이 선정해준 공립학교들이 2순위가 되어 교육 순서를 정했다. 


총 13개 학교에 사전 방문해서 교장선생님과의 면담 후에 교육일을 지정하고, 당일에 교사들에게 미리 공지해서 되도록 많은 선생님들이 들을 수 있도록 했다.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공립학교 선생님들은 연수나 교육을 가게 되면 이를 장려하기 위해 NGO나 국가에서 교육비를 지급한다. 본인이 수업을 듣고 그 시간을 시간당으로 계산해서 근무수당으로 친다는 것이다. 


문제는 단원들이 봉사로 하는 교육에도 돈을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우리는 교육받을 때 돈을 받아야 해. 얼마 줄 수 있어?"


혹은, 코워커나 협조를 해 준 교장선생님이 금전적, 물질적 요구를 강행할 수 있다.


"교육하는 거 도와줬으니 나한테 얼마 줄래?"

"이거 말고(지급한 응급 처치함), 응급용 침대랑 책상이랑 선반도 필요해. 해 줄 수 있어?"

라는 식이다. 


한국에서 들으면 어이없지만 원조받는 것에 익숙하며 우리는 그런 처지야, 라며 늘 해 왔던 관행들에 대해 단신 부임한 단원 개인에게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가 한 번, 두 번 반복되다 보면 염증을 느끼고 결국은 모든 활동에 의욕을 잃고 에라, 모르겠다, 심정이 되기도 한다. 


어떻게 단원이 그럴 수 있냐고 할 수 있지만 까이는 것만 반복해서 몇 달 동안 되는 일이 없으면 기존에 갖고 있던 좋은 마음도 싹 사라져 버리기 마련이다.


고맙다는 소리보다 위와 같은 일들을 먼저 방어하는 마음으로 교장선생님들과 면담을 가졌다. 결과는 의외였다. 오히려 당신들이 제공해 줘야 할 것들과 심지어 나에게 강사료로 얼마를 줘야 하냐는 질문까지 듣고 나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저 필요한 부분에 대해 공유할 수 있어 행복하다는 인사를 끝으로 교육일에 다시 방문했다.

교육을 받으면서 필기하는 선생님들 모습


교육 후 설문지를 현지어로 번역해서 받은 후 다시 번역해서 통계를 냈다. 이때 통계를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티오피아에서 보건교육은 체육 시간에 포함되어 있으며, 학교 보건에 대한 책임은 해당 지역의 보건소에서 관할한다고 되어있을 정도로 공립학교에서 보건이란 체육활동 중에 하나 정도로 여겨진다. 


그래서 선생님들도 위생 개념 정도로 보건을 대하지, 학생이 다치거나 아프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 2차 성징이 일어나는 아이들에게 적절한 교육과 지도가 잘 이뤄지지 않는다. 


우리라면 아주 사소한 출혈, 화상, 감염, 위생의 개념을 조금 더 확장해서 알려주는 것뿐이었지만 질문도 많이 받았고 체육 선생님들은 따로 USB에 교육 자료를 받아갈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일개 단원이 일회성으로 한 응급처치 교육으로 에이즈에 대한 두려움이나 고정관념이 한 번에 달라지지 않지만 이러한 교육으로 선생님들에게서 '아..!' 하는 모습을 봤다면 너무 긍정적인 판단일까. 


모두가 좋은 선생님이 아닐 순 있어도 교사로서 자긍심과 자부심을 갖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선생님들은 교육을 들으러 오셨고, 장소가 협소해도 바깥에 서서 필기하던 모습은 약간의 뭉클함을 주었다.



3. 소아과 외벽 벽화

기관 안에서도 뭔가를 하긴 했다. 

손세정제를 사다 주면서 직원회의 시간에 손 소독 교육도 하고, 신체검사 기구가 없거나 낡은 곳에는 수도에서 직접 주문한 의료용 물품들을 가져다주었다. 


그럼에도 외부에서 하는 학교 보건 일보다는 별다른 임팩트 없이 지나갔다.


그러던 중, 기관장이 소아과 외벽에 남은 면들에 아이들을 위한 벽화를 그려줄 수 있냐는 요청을 받았다. 아무래도 기관장 회의(봉사단원의 기관장들을 모두 한 곳에 모아 워크숍을 연례행사로 진행함-from 코이카 사무소)에서 선배 단원의 벽화작업 얘기를 듣고 솔깃했던 것 같다.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고, 해 본 적 없는 걸 하려고 왔으니까 부딪혀보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수락했다. 

곧장 현장 사업을 했던 선배 단원에게 SOS를 보냈고, 밑그림부터 재료 구입까지 시간을 내어 도와주었다.

총 세 면을 채웠다. 마지막 면은 옆에 건물이 새로 생기는 바람에 가려졌다.

벽화작업을 하는 날에 때 마침 다른 나라에 있다가 사정이 생겨(여기서 발생하는 사정들은 코이카에서 제대로 수요조사를 못하거나 파견이 안 되는 곳으로의 우격다짐 파견을 강행해서 생김) 국가 변경을 하게 된 단원이 오는 날이어서 풍성한 고급 인력들과 함께 당일치기 벽화를 완료했다. 


언제나 자기 일처럼 도와준 단원들은 한 줄기 빛이었다. 



4. 제재조치

모든 게 순조로웠고, 현지인들과 크고 작은 다툼도 있긴 했지만 별문제 없이 생활하고 있었다. 


성공적인 단원 생활이 될 줄 알았던 내게 제재조치가 내려왔다. 

이유는 주거지 이동 문제였다. 

계약일보다 앞서 짐을 옮긴 게 화근이었다. 

같은 동네였고, 계약일보다 이사를 먼저 하면 안 되는 줄 모르기도 했으며 담당 코디네이터에게 이 일을 말하기도 했었다. 


그 당시, 담당 코디는 "아 그러셨냐?"라고 넘어가서 문제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 못했다. 

사무소에 허락을 안 받고 이사를 한 것도 아니고 이미 다 컨펌받은 사항에 대해 짐을 일주일 먼저 옮겨 놓는 게 그렇게 큰 일이었는지 내가 규정집을 외우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좀 억울했다.


단원에게 제재조치는 옐로카드와 레드카드로 나뉜다. 옐로카드는 '주의'이고, 옐로카드 두 개면 '경고', 경고가 두 개면 자격 박탈로 당장 짐 싸서 한국행 비행기를 타야 한다. 


주의건 경고건 제재조치 사항은 단원평가에 남게 되고 향후 코이카 취업 및 현지 코디네이터에 응시할 때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중도 귀국도 그렇다.


개발협력 분야로 취업을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억울한 건 억울한 거였고, 미래 나의 가능성 하나가 별 것 아닌 일로 꺾였다 생각하니 밤에 잠도 안 올 정도로 분하고 억울했다. 가뜩이나 혼자서 스트레스 조절도 못해서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와장창 몰아치니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그런 상태로 출근을 했고, 하필 그날, 나를 눈 돌아가게 만든 직원 중 한 명과 환자를 대하는 것을 두고 실랑이가 일어났다. 처음엔 내 말을 무시하는 직원을 향해서 의견을 피력하고 싶은 정도였는데 분노가 차오르며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해선 안될 행동을 하게 되었다.


사건은 환자한테 줄 항생제 주사기를 지저분한 책상에 버리듯이 둔 것에 대해 왜 주사기를 오염된 곳에 두냐는 언쟁이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주사기를 상대방에게 들이대면서 항의했고, 그녀의 목에 닿을 정도로 불쾌감을 표시했다. 조금 지나고 나서 사과를 하고 그 자리에서 풀 수 있는 고른 인성의 소유자였으면 좋았을걸, 그렇게 해결하지 못한 채 퇴근했고, 기관장의 귀에 들어간 사건은 고스란히 사무소 직원에게 전해졌다.


사무소에서는 기관장이 단원에 대해 전화를 했으니 증거가 남게 되어 제재조치를 주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단원의 심리적 고통을 고려하여 미리 담당 코디네이터가 방문해서 상담을 하고 돌아갔다. 


순순히 인정할 수 있는 나의 잘못이었지만 그보단 억울한 심정이 더 많았다. 이를 두고 옹호해주는 동기 단원들은, 출퇴근을 제대로 하지 않는 단원들도 많지만 기관장들은 신경도 쓰지 않기 때문에 나처럼 제재조치를 받지 않는다며 억울한 처사가 맞다고 위로했다.


그 말도 맞고, 내 잘못도 맞는 일이었지만 이미 결과는 나왔고 선택은 내 몫이었다. 


이대로 남은 활동을 하고 갈 건지, 이렇게 관계도 어그러졌으니 더 이상 한국 이미지 나빠지게 하지 말고 집에나 가든지, 였다. 


둘 중 어느 것도 시원하게 답이 내려지지 않았다. 

분명 내 실수고, 잘못이었지만 억울한 심정이 들었고, 밥맛이 없어졌다. 

하루에 한 끼를 겨우 먹거나 굶었다. 

그러다 보니 잠도 잘 안 오고 불면증에 시달렸다. 


출근을 제대로 못하면 또 안 좋은 소리가 흘러들어 갈까 무서워 출퇴근 도장만 꼬박꼬박 찍고 돌아와 TV를 보다가 배고프면 과자나 과일을 먹다가 잠이 들기만을 기다렸다. 두 시간이 지나도 잠이 안 오면 TV를 틀고 새벽이 올 때까지 멍하니 있었다. 


생각은 멈추지 않았고, 잠이 오지 않으니 미칠 것 같았다.


나를 아끼던 현지 직원들은 집에 데려가서 밥도 먹이고, 기관 안에서는 내 곁을 지켜주었다. 그래도 잠은 잘 수가 없어서 불면증 약을 먹게 되었다. 


보건소에 근무하니 약은 당연히 많았고, 직원이 준 약을 가져와 금요일 오후에 먹고 토요일 오후에 일어났다. 잠은 잤지만 약의 부작용이 있었는데 그건 ‘자살충동’이었다.


그 시기에 집에 쥐가 들어온 것 같아 쥐약을 사두었는데 그걸 먹으면 좀 더 쉽고 편하게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와서 한국에 가봤자, 나는 실패한 인생이겠지, 하는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면서 안 좋은 상상을 했다.


국내 교육 때, 자살을 한 단원이 사망 단원 비율 중 절반을 차지한다고 들었다.

'단순 질병이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아니, 그냥 한국에 돌아오면 해결되는 일 아닌가? 굳이 거기까지 가서 자살을 하다니, 정말 이해할 수 없군.'


이누이트족의 속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이 신는 신발을 신어봐야 한다-


사람이 우물에 갇히면 그 우물 안만 바라보게 된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 밖에서 바라봐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대신, 그런 무서운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정신을 다 잡았다. 더 이상 혼자 있으면 나는 위험해진다. 여기서 나가야 한다. 누구든 붙잡아 보자.


만일 내가 자살을 했을 때, 슬퍼할 가족은 둘째치고 그걸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될 단원들의 충격이 떠올랐다. 자살이건, 타살이건 단원이 사망한 직후, 발견하게 되는 건 지역에 같이 있던 한국 봉사단원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정상적으로 활동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한국에 일시귀국해서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된다. 같이 파견됐던 언니, 오빠들, 도와준 선배 단원들이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중간에 그런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 생각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피할 수 있었다.


정말 미안하고 고맙게도 단원들이 나에게 은인이 되었다. 얘기를 들어주고, 같이 분노해주고, 잠이 오지 않아도 약을 먹지 않도록 다른 방법들을 강구해줬다. 그리고 가장 도움이 되었던 한마디.


"네가 한 활동들은 쉬워 보이지만 쉽게 할 수 없는 것들이었어. 너만의 방법으로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나는 방법을 배우면 다음엔 쉽게 넘어지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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