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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노니 Oct 02. 2019

[출간전 연재] 파견후 삶, 원래 이런가요

매운맛이라고 했지, 불맛이라고는 안 했잖아

*본 글은 종이책 출간 전 발행 글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향후 출판 서적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첫 3개월

학수고대하던 파견의 시간이 도래했다.

파견하자마자 사무소에서 주는 숙박비에 맞춰 미리 예약한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파견지역 활동을 시작했다. 


호텔과 기관은 모두 지역 시내 중심지에 있어 출퇴근 및 생활하기가 편리하고 좋았다. 와이파이가 있고, 뜨거운 물이 나오며 바로 앞에 먹을만한 식당이 있는 밤에도 환한 곳이었다. 처음엔 다 좋고, 들뜨고 신나는 기분이 들었다.

첫 집, 주변 풍경


1. 기관 업무

첫 출근을 하자 기관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유창한 영어로 다시 한번 나의 역할과 업무를 이야기해주며 OJT (파견 전 기관 탐방) 시간에 둘러본 진료과 중 Dressing & injection room에서 일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내 의견과 기관장의 생각을 수렴하여 첫 근무부서는 처방받은 처치를 주로 하는 '처치실'이 되었다.


나의 일은 옆에서 필요한 솜을 채워주거나 거즈를 잘라 소독통 안에 솜을 채워 넣고 소독기에 돌리는 등, 간단하고 보조적인 업무였다. 그마저도, 대부분의 시간은 여유로웠고 환자가 없는 비어있는 시간엔 각 과를 돌아다니며 직원들과 인사하고 얘기하며 얼굴을 익혀 나갔다.


그렇게 처음 일주일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즐기는가, 싶더니 이내 내 눈에 차지 않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다른, 위생과 소독의 개념 그리고 사람들의 인식이었다.


한국의 병원에선 병원감염으로 인한 2차 감염을 의료인이 해선 안 될 실수로 간주하며 이것을 최소화시키기 위한 시스템을 구축하려 지난 반 세기 동안 무수한 노력을 다해왔다. 나의 지난 4년간의 대학 교육과 1년간의 병원 현장에서의 경험은 그 모든 노력들의 집합체이며 몸에 익은 습관들이었다. 


그 모든 체계를 무너뜨리고 현지 직원들이 하는 대로 편하게 소독이 되지 않은 상태로 상처부위를 대충 닦거나 오염시키는 행위는 하고 싶지 않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하던 대로 지키려면 일단 눈에 보이는 현장의 것들을 부인해야 하는 일이 우선이었는데 이 부분에서 나의 적은 경험과 미숙함들이 송곳처럼 드러났다.


'이런 것들이 가장 먼저 부딪히는 부분이라고 배웠는데 정말 어려우면서도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군!'


무시하거나 혹은 시스템을 긍정적으로 변화해 보자, 하는 단원(실습생 같은)의 마음만으로는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무시를 하려면 다른 일을 하고 있어야 했는데 다른 일을 하자니 아직 언어가 미숙해서 환자를 응대하는 게 안되고 가만히 있자니 왜 가만히 있냐고 도우라고 한 소릴 듣거나 였다. 시스템을 긍정적으로 변화해 보자는 생각으로 가만히 업무를 기록하고 사진에 담고 하는 것도 하루, 이틀 한두 시간이지, 매일 출근하면서 내 업무(실습생 같은)를 팽개쳐 두고 그것만 하자니 역시나 직원들의 눈총이 따가워졌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어느 부분은 맞는 말이지만 한 편으론 완벽하게 틀린 말이었다. 시간은 우리에게 길지 않은 시간이고(1-2년), 대개 문화와 언어를 익히기만 해도 지나가는 시간은 3년이라고 봤을 때 단원에겐 너무도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 1-2년을 가만히 보내기만 해도 그 사이에 기관 직원이나 기관장과 트러블이 속출할 게 뻔한 일이다, 라는 개인적인 주관이 나를 지배했고, 나는 정말 단원으로 온 보람을 1이라도 느끼고 싶은 과도한 열정에 사로잡혀 마음의 스트레스가 천천히 축적되어 가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2. 열정적인 시간들

파견이 한 달 지난 단원은 [활동 지원물품]을 사무소에 요청할 수 있다. 양식에 맞춰 필요한 물품의 견적서를 가게에서 받아서 신청하면 사무소에서 본부에 승인을 받으면 입금과 동시에 활동에 필요한 물품을 살 수 있다. 


원칙대로라면 저 순서대로 가 맞으나, 현지 사정이 한국의 시스템과 맞춰 갈 수 없는 시간적/제도적 한계 때문에 보통 먼저 견적서를 받고 사무소에서 승인될 것 같다 하는 통보와 함께 물건을 구매하고 영수증 처리는 돈이 들어오고 나서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활동 지원물품비를 신청할 수 있게 되자 그동안 필요하다고 생각한 물품들을 다 사기 시작했다. 가장 기초적이면서 쉬운 손 씻기 관련 세정제, 비누, 포스터 등을 사다가 기관 회의 시간에 발표하고 각 실마다 붙이고 나눠주었다. 


예상보다 직원들은 세정제나 비누를 잘 썼고, 가끔씩 나를 보며 이런 것을 해 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러한 작은 심리적 보상이 이뤄지자 흥분한 황소 같은 나의 과도한 열정은 멈출 줄을 몰랐다.


친해진 직원들은 종종 나를 초대하고 식사를 하면서 되도 않는 나의 현지어 실력에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어디서 온 줄도 모르는 아시아 여자애와 유대관계를 쌓는 데 시간과 정성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처치실 직원의 집


맥주와 식사를 잔뜩 준비해서 다 먹을 때까지 보내 주지 않았다.


직원들은 바쁜 시즌이 되면 나를 종종 부르기 시작했다. 


예방접종실에 NGO에서 주사를 나눠주면 환자들이 몰리는데 이때 손이 필요하니 이제 곧잘 시스템도 이해하고 대충 말귀도 알아듣는 나를 빌려달라고 주요 근무지인 처치실에 찾아와 예약(?)을 하곤 했다. 


필요하다니까, 뭐, 나쁘지 않지, 하는 마음으로 이 일 저일 불려 다니면서 위와 같은 위생관념의 상충과 답답한 나의 마음들이 점점 수면 위로 떠올랐고 그다지 봉사자 답지 않은 아르바이트생 같은 마인드로 기관일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처치실에서 아이 화상 치료 부위 소독하는 중



3. 눈 돌아가게 만든 것

본론에 앞서, 나라는 한 인간의 본성을 설명해야 할 것 같다. 남편의 입을 빌린다면 '멍멍 돌+아이'고, 친부모님의 입을 빌린다면 '성정이 지랄 맞은' 인격체였다. 


물론, 사람은 고쳐쓸 수 없는 고유한 성질의 그 무엇이므로 변했다고 할 순 없지만 이때의 과도한 마찰들과 남편의 보다듬이 나를 그나마 사람처럼 살 수 있게 만든 오늘을 있게 한 것 같다.


여러 가지 문화적, 체계적 차이가 있었는데 그중 가장 분노하게 한 일은 환자를 쥐똥만큼 생각하는 어떠한 표현들에 있었다. 


병원에 있으면 감염이라는 위험부담은 어쩔 수 없이 존재한다. 그만큼 잘 배운 사람들이 예방을 위해 애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주객이 전도되어, '너 같은 오염체를 위해 위험부담을 안고 싶지 않다.'는 표현들은 나와 몇몇 현지 직원들 간의 사이를 벌어지게 만들었다.


배경인즉슨, 아프리카에 있는 수많은 질병 중 단연 1위는 에이즈(HIV 양성)다. 대부분은 에이즈로 발전하기 전 단계인 HIV 보균자 상태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들 중 꽤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집단은 '어린아이'들이다. 모체로부터 감염된 영유아부터 부모 및 외부 환경으로부터 감염된 어린이들까지 다양한 어린 친구들이 HIV 보균자로 보건소에 다니면서 정기 검사를 한다. 


아이가 됐건, 어른이 됐건, 이들은 대상자이고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은 의료진이다. 정규 교육을 받고, 기관에서 고용한 의료인이라는 사람들이 대상자를 극도로 '혐오'하는 일상이 만연한 곳이었다. 


왜 혐오라는 표현을 쓰냐면, 이미 표정과 거리가 그것을 입증한다. 부패한 사체를 보고 냄새를 맡은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고 1미터가량 폴짝 떨어져서 가까이 오면 손사래를 치면서 저리 가라는 시늉으로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고 문진을 하거나 처치(어쩔 수 없이 하는 직원은 가위바위보 져서 하는 식)를 하는 경우가 있다. 


좋은 직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그렇지 않은 직원들은 내가 그들을 혐오하고 싶게 만들었다.



4. 일상의 스트레스

동네를 비롯, 기관 안에서도 꾸준히 생김새가 다른 외국인을 놀리는 부류가 참 많았다. 조선시대 서양인들이 이런 맘이었을까, 싶었는데 진짜 그런 맘이었더라. 


아래 글들은 이전 Peace-corp 단원들(새마을 운동 시절, 우리나라에 왔던 미국 봉사단)이 겪은 수기를 엮은 글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런 소소한 일상의 스트레스와 '나 여기 왜 왔지?'하는 뫼비우스의 띠같은 물음들이 정전, 단수와 함께 스트레스가 되었다.


개념이 없다는 대상이 일반인이 아니라 보건의료인일 때 여기서 뭘하냐는 의문이 올라온다.


시대는 다르지만 입장이 같은 사람들의 마음은 시간이 흘러도 공감과 위로를 주는 사실을 위의 글들을 보면서 느꼈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내가 화내는 게 이유가 있구나, 하면서도 그러지 말아야지,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하는 마음이 외로움과 더불어 꾹꾹 눌러져 가는 시간들이 지나갔다. 


더 이상 기관 안에서 부질없는 싸움을 하며 애초에 단원 개인이 할 수 없는 일들에 매달리지 않기로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그럼 뭐하냐?, 하는 것이다.

나의 고민은 단원들의 공통 관심사이며 화두였다. 


의료기관이라는 보건소 직원들이 감염에 대한 인식이 그 정도였으니 학교에 있는 교육 단원들의 애로사항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같은 동네에 있던 교육 단원들은 항상 HIV 보균자 학생들이 한 학교당 1명 이상은 꼭 있었고, 부모의 감염은 확인되나 학생은 보균자가 아니었음에도 감염이 확인되지 않아 불안하다고 말하는 선생들도 있었다(이게 말이야, 방귀야). 


국내 교육을 비롯, 일정 수준의 교육을 받은 단원들은 보건 단원들에게 확인을 받고, 그들이 옳지 않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며 학교 보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연말을 맞이하여 근무지 이탈이 허용되고(국가 사무소마다 규정이 다르다, 에티오피아는 석 달 동안 근무지역을 이탈해서 수도나 다른 지방을 가면 안된다는 규정이 있었다), 동기 단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수도에서의 시간을 보낼 때, 사무소에서 당시 ODA 보건전문가로 계신 의사 선생님의 이야기는 큰 힘이 되었다. 


"현지 의료 체계 중 학교 보건에 대한 교육이 전무한 실정이라 지역 보건소로 파견했을 때의 목적은 단순히 보건소에 물품을 사주고, 보조업무를 맞는 것에 있지 않았다."

라고 하시면서 지역사회로 나가 현장 보건교육을 하는 데 의의가 있을 거라는 말씀을 해 주셨다.


중국에서 깔아준 수도 내 도시철도, 개발의 붐은 빠르게 일어난다.


휴가가 끝나고 난 뒤, 돌아와서 학교 보건에 쓰게 될 교육자료를 만들고 활동 지원물품을 구비하고 지역 단원들의 학교부터 교육일을 잡아놓고 준비 하기 시작했다.


현지 약국에서 판매하는 구급통을 참고하여 학교용 구급함을 만들었다.


교사들의 인식 개선과 학생들의 상처 치료를 위한 응급처치교육 자료와 구급함



현지 인심은 커피를 정성스레 대접하는 데에서 나타난다.


현지문화탐방으로 온 신규단원들과 함께 간 블루나일 폭포는 파견지역 주요 관광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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