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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철화 Aug 01. 2024

한 여름에 내리는 눈

미용실 원장은 문을 활짝 열어놓고 청소 중이다. 일찍 틀어놓은 에어컨 덕에 미용실 안은 시원하고 쾌적하다. TV 예능프로그램의 유쾌한 웃음이 시선을 뺏는다. 몇 년 전만 해도 오는 순서대로 머리를 손질해 줘 기다리는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는데, 이젠 예약하고 정한 시간에 가면 되니 편하다. 청소를 마치고 자리로 안내한다. 


거울 속에 흰머리 무성한 낯선 아저씨가 있다. 언제 이렇게 하얗게 세었을까? 세월의 흔적이 얼굴 곳곳에 묻어난다. 링컨은 "사람은 나이 40세가 되면 자기 얼굴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했는데, 지금 내 얼굴은 어떻지? 젊었을 때 사진을 보면 낯간지럽고 촌스럽기 그지없다. 세월을 잘 보냈는지, 책임질 만한지 모르겠다. 다만, 주름진 얼굴이라도 지금의 내 모습이 좋긴 하다. 

코파일럿 프로그램이 그린 이미지.


가운을 걸치고 나면 분무기 소리가 ‘칙칙’. 이어지는 가위 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사각사각’ 머리카락을 자르며 생기는 경쾌한 리듬. 자연스레 눈을 감는다. 나만의 명상시간이다. 네다섯 살 정도 되었을 때 엄마 손에 이끌려 갔던 이발소. 내가 가면 이발사 아저씨는 자연스럽게 나무 받침을 꺼낸다. 의자에 앉아도 키가 작으니 의자 팔걸이에 나무 받침을 걸쳐 놓고 나를 앉힌다. 그제야 아저씨와 눈높이가 맞는다. 


‘사각사각’ 소리와 리듬은 잠을 부르는 치명적 멜로디다. 리듬에 맞춰 이리저리 고개를 휘젓다 아저씨에게 여러 번 꿀밤을 맞았다. 이발기에 머리카락이 씹힐 때면 ‘악’ 소리와 함께 인상이 찌푸려졌다. 꼬마의 짜증이 귀여웠던지 아저씨는 크게 웃으며 ‘미안’하신다. 엉덩이를 받치던 나무 판이 필요 없어지고 어색하기만 했던 미용실이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사각사각’ 가위질 소리는 잠을 부른다. 


눈앞으로 흰 눈이 쏟아져 내린다. 우수수... 세월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검은색 가운 위로 눈이 수북이 쌓인다. 흰머리는 그저 나이 듦의 상징이 아니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내 어린 시절 추억과 삶의 여정에서 만난 굴곡과 역경이 담겨있다. 지혜와 성숙함도 새겨져 있다. 다만, 그것을 찾는데 시간이 좀 많이 걸린다. 언젠가 그것이 보일 때를 위해 흰머리를 검은색으로 덮지 않으려 애쓴다.


가위질마다 기억이 떠올랐다가 흩어지길 반복한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싸인 내공이 흰 눈 되어 떠나간다. 이제 짐을 내려놓고 편히 지내라고 한다. 


내려놓는 일이 반복된다고 다 비워지지 않듯이, 단정히 보일만큼은 남겨두고 보내기로 했다. 긴 머리의 일탈을 꿈꾸지 않는 건 오랜 직업의 후유증일 수 있겠지만 짧게 정돈된 머리는 마음을 편하게 한다. 


내일이면 다시 세상의 짐을 머리에 이고 지내겠지만 곧 다가올 한 여름에 내리는 눈을 기대하며 소중한 삶의 흔적을 훈장처럼 지니고 지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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