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재미가 사라졌다. 취미부자 열정 만수르였던 나에게 번아웃이 찾아왔다.
게임을 좋아해서 일찍부터 게임 회사를 다니기 시작을 했고 25년이 넘게 게임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세월은 흘러서 주 6일 근무 환경은 주 5일로 바뀌었고 여가 시간은 많아졌다. 나의 20대는 인라인과 스노보드 타기, 여행, 사진 찍기, 물고기 키우기를 하고 스타크래프트, 월드오브워크래프트 등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업무 환경도 많이 바뀌었다. 둥근 CRT 모니터는 얇고 평평한 모니터로 바뀌었고 키보드와 마우스에 선은 사라졌다. 무겁고 시끄러웠던 PC는 사라지고 손안에 들어왔고, 게임 플랫폼은 PC에서 모바일로 변화되었다. 데이터베이스는 클라우드 환경으로 옮겨 갔고 업무 환경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렇게 나는 지금까지는 새로운 환경에 쉽게 적응해 나갈 수 있었다.
많이 힘드셨겠어요.
회사에서 평소 사용하지 않았던 개발언어가 업무로 주어졌다. 지금까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은 어렵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 도전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게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시니어가 가져야 할 전문성을 나에게는 찾을 수 없었고 나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한순간 쓸모없는 인간이 되는 것 같았다. 회사에서의 일이 재미가 없어지고, 집에까지 우울함을 가져오게 되었다. 평소에 즐겨 하던 것들도 재미가 없어지고 잠만 늘어나게 되었다. 잠을 자고 꿈을 꾸면 현실을 피할 수 있었고 나에게 위안을 주었다.
코로나까지 겹치면서 외출이 줄어들었고 어느 날 거울을 보니 언제나 밝게 웃던 얼굴엔 심술이 가득한 살이 들어붙었다. 바닥에 앉으면 살찐 배 때문에 몸을 가누기 힘들었고, 신발을 신을 땐 잠시 숨을 참아 몸을 숙여야 신을 수 있었다.
스스로 상황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고, 회사에서 제공하는 정신건강 프로그램인 '내 마음 읽기'를 신청했다. 상담을 해 주는 직원은 내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었다. '아 그러셨구나, 많이 힘드셨겠어요.' 하는 말에 내 마음은 뻥 뚫리는 듯했다. 회사에서 힘든 이야기를 누구에게 나누어본 적이 없었는데 힘든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위안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질문을 받았다. '일을 못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나요?' 아니었다. 직장 동료들은 내가 노력하는 것을 알아주었고 도움을 주고 있었다. 내가 나 스스로를 가두고 잘해야만 할 것 같았다. 지금까지 좋은 평가를 받아왔고 하는 일마다 좋은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지금 하고 있는 업무도 그래야만 할 것이라고 스스로를 가두고 한계를 주었나 보다.
10살 어린 직장 동료들에게 모르는 것을 물어보고 차근차근 배워 나갔다. 새로운 개발언어는 배움은 늦었지만 지금까지의 나의 경험은 문제상황을 파악하고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자신감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찐 살도 25킬로그램을 빼서 몸도 마음도 가볍게 변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주어진 기회를 나를 위해 쓰기 시작했다.
산에서 마주친 하얀 엉덩이
요즘 유행하는 취미들을 찾아보았다. 등산, 러닝, 골프, 헬스, 수영, 자전거와 같은 운동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고, 걷는 것을 좋아해서 등산으로 눈을 돌렸다. 운동복을 입고 오래된 등산화를 신고 배낭을 메고 뒷산으로 들어갔다. 계단이 잘 정비된 작은 산이었다. 계단 몇 개를 올라왔는데 숨은 턱까지 차올랐고 가뿐 숨을 내쉬게 되었다. 마침내 전망이 탁 트인다. 오랫동안 이 동네에 살았지만 산에 오를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었는데... 이제야 24층 아파트가 나와 같은 눈높이에 서게 되었다. 멀리 우리 집도 보인다. 이보다 낮은 아파트는 평소엔 수줍어 보여주지 않았던 초록색 머리를 보여주었다. 전망대에서 잠깐 숨을 고르고 다시 작은 언덕을 다시 올라갔다. 언덕 끝에 오색의 처마가 아름다운 팔각정이 보였다. 팔각정에서 내려다보니 아래로는 8차선의 넓은 도로가 있었고 자동차들은 어디를 그리 바쁘게 가는지 빠르게 지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팔각정에서 나오려는데 하얀 엉덩이가 보였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목소리도 하얀 귀여운 판다였다. 검은 귀와 검은 코는 앙증맞았고, 검은 조끼에 검은 바지를 입은 듯이 가만히 앉아서 팔각정에서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판다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자신을 소개해 주며 재잘대었다. 어린 판다 산을 무척 좋아한다고 했다. 반짝이는 눈으로 애원하는 듯 바라보는 판다에게, 나는 잠깐 고민을 했고, 함께 전국의 산을 여행하면 좋을 것 같다고 제안을 했고 판다는 좋다고 했다. 선물같이 찾아온 판다에게 '산타는판다'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판다는 나에게 산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었다.
산에 가면 마음이 편해진다. 도시의 소음과 일상에서 벗어나 등산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새의 지저귐도 없는 고요함을 느낄 때가 있다.
정상에 올라서 보는 풍경은 최고다. 산 위에서 산그리메가 낮게 깔려 있는 모습을 보면 우주에 떠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몸은 힘들어도 머리는 맑아진다. 허벅지는 터질 듯하고 심장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힘차게 뛴다. 숨이 가빠와 잠깐 쉬게 될 때, 복잡한 세상에서 머리를 잠시 쉬게 해 준다.
성취감과 자신감을 올리게 해 준다. 다시 내려올 산을 왜 올라가지? 하지만 아는 맛이 무섭다고 정상을 밟아 봐야 성취감을 알게 해 준다.
나는 동심을 잊고 살았지만 어린 판다는 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산을 바라보았고, 건강한 에너지를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존재 같았다.
그렇게 삶이 지루하고 무료해질 때 산타는판다와 함께 산을 찾아 자신감을 되찾고 성취감을 느껴서 전국 방방곡곡을 다녀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