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방산, 10.1km, 6시간

겨울산의 아름다움

by 산타는판다

"판다야 오늘은 계방산에 갈 거야"

계방산은 대한민국에서 다섯 번째로 높은 산으로 높이가 무려 1577미터이다. 계수나무의 좋은 향이 난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산이다. 오대산국립공원에 속해있지만 오대산보다 더 높은 산이다. 드라마의 주인공보다 더 잘생긴 조연 같은 느낌인 건가. 이 말을 들은 판다는 깊은 산으로 들어갈 기대에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는 빨리 가자고 날 일으켜 세우며 부추긴다. 판다는 겨울이 좋다고 했다. 눈을 밟을 때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다고 했다.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지나가는 느낌이 좋다고 했다.


영하 28도


오늘은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 체감온도가 영하 28도까지 내려갈 만큼 강추위가 예보된 날이었고, 전날 강원도에는 눈이 많이 내려서 버스가 원래 예정되었던 들머리로 가지 못하고 날머리에 등산객들을 내려주었다. 간혹 안내산악회버스가 목적지를 이렇게 바꾸는 경우가 있는데, 계방산의 들머리는 변경되었지만 예정했던 계방산을 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걱정하는 마음과는 다르게 판다는 추위는 걱정도 안 되는지 눈 밟을 생각에 들떠있었다.

"판다야 오늘은 무척 춥고 눈까지 내려서 조심해야 해"

신신당부를 하고 버스에 내렸다. 주차장부터 하얀 눈으로 덮여있었고 주차장바닥은 땅땅 얼어붙어 있었다. 발에는 올해 처음 신는 아이젠을 착용을 하고 방한에 신경 써서 옷을 덧입었다. 입에는 하얀 입김이 나고 이었지만 바람은 불지 않아서 체감온도가 크게 와닿지 않았다. 오히려 걷다 보니 땀이 나서 챙겨 온 목도리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서둘러 사람들을 따라서 등산을 시작한다. 미리 준비했던 산행경로와 달라져서 앞사람을 따라 길을 걷는다. 산을 오르는데 옆 능선으로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들어온다. 눈이 쌓인 능선과 파란 하늘과 하얀 햇빛은 각자의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뭇가지에는 상고대가 녹아다가 다시 얼어붙으면서 생긴 얼고대가 펴있었고, 햇살을 받아서 반짝이고 있었다. 아직 등산을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어서 기대가 컸다.


종소리

눈길을 걷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평소에는 계단이었을 길도 눈에 파묻혀 계단은 사라지고 더 급한 경사로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평소보다 더 발을 높이 들어야 했다. 앞사람이 밟아놓은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무릎까지 푹푹 들어가 빠지게 된다. 그 눈 아래의 지형은 보이지 않아서 여차하면 넘어져서 온몸이 눈에 덮인다. 그때 나도 잠깐 조심하지 못한 순간 눈길 옆으로 넘어졌다. 그 광경을 보던 판다는 웃으며 "와아아아아아아아아! 판다친구가 됐네!" 하며 자기도 옆에서 같이 뒹굴며 온몸을 하얀 눈으로 덮어버린다. 검은 옷에 하얀 눈이 묻어서 판다가 더 좋아했나 보다.

길을 걷는데 종소리가 들린다. 종도 없는데 종소리라니, 평소에 산에서 들어본 적 없는 소리였다. 얼고대들이 바람에 부딪혀서 실로폰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런 재미있는 소리를 한참 듣던 판다가 들어본 적 있는 소리라며 가만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한참을 생각하더니 겨울왕국에서 안나가 울라프를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스벤의 뿔에 나뭇가지가 걸렸을 때 나는 소리라고 설명을 해주었다. 맞아! 영화에서 봤던 그 장면과 같은 소리를 듣고 있었다. 맞장구를 쳐주니 판다는 신이 나서 홀짝 뛰며 나뭇가지를 흔들면서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좋아한다. 그리고는 얼고대를 입에 대고는 아이스크림 먹듯 혀로 할짝거리며 나를 바라본다. 혼날 것을 알면서도 호기심을 주체 못 하고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해서 편한 마음으로 함께 웃어주었다.



하트모양 얼음

온도계를 보니 영하 17도, 습도는 56퍼센트였다. 아직은 바람이 불지 않아서 걷다 보니 추위를 모르고 있었다. 머리 위로 올라간 땀은 그대로 얼어서 머리카락과 모자에 하얗게 달러 붙었다. 머리 위엔 눈인지 땀인지 구분이 되지 않은 하얀 결정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얼려두면 체온유지에 좋지 않아서 털어가며 등산을 했다. 입김도 얼어붙어 속눈썹을 하얗게 만들었다. 그래서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새벽에 눈 뜰 때처럼 눈이 붙어 잘 떠지지 않는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잠깐 쉬어갔다. 물을 마시려고 챙겨간 페트병을 꺼내서 물병을 돌리는데 물병의 입구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물병을 이리저리 흔들어 겨우 작은 틈을 만들고 나서야 슬러시 같은 물을 조금 마실 수 있었다. 그때 멀리서 판다가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면서 오라고 한다. 그러면서 하트모양으로 얼어붙은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흔들어주었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나도 한껏 판다를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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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방산 정상에 갈수록 나뭇가지에 붙은 상고대는 파란 하늘에 하얀색 물감을 떨어트린 것처럼 얇게 퍼져나갔고 주변은 더욱 하얀 세상이 되었다. 나무는 무겁게 쌓인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등산로에 누워 있었고 둥근 터널을 만들었다. 그래서 중간중간 판다와 같이 네발로 기어서 터널을 뚫고 지나가야 했다. 그런 터널을 지날 때면 어김없이 얼고대의 종소리가 울려서 기분 좋게 만들어주었다.

뒤에서 판다가 나를 불렀다. 하얀 눈으로 덮인 나뭇가지에 까만 눈만 내놓고 깜빡이고 있었다. 일부러 못 찾는 척 두리번거리며, 애타게 판다를 여러 번 부르다가 눈을 마주치고는 활짝 웃어주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판다 잘 숨지! 온통 판다 세상이야! 판다들이 가득 숨어있는 것 같아!!!!!"

짙은 고동색의 나뭇가지 위에 하얗게 쌓인 눈들은 흡사 판다들이 뛰어놀고 있는 놀이터 같았다.


북극의 찬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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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다다르니 주변에는 바람을 막아주는 나무들이 없고 낮은 나무들만 남아있어서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이제야 영하 28도가 체감이 되었다. 하얀 눈이 두껍게 쌓여서 무슨 나무였는지 모를 낮은 나무에 판다가 올라갔다. 작은 키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높은 곳에서 바라보려고 했나 보다. 그 너머로 주변에 오대산 산자락이 보인다. 모두 내 눈높이 보다 아래에 있어서 우주에 떠있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북극의 찬바람이 손이 꽁꽁 얼어버릴 만큼 춥게 만들었지만 하늘을 더욱 깨끗하게 만들어서 저 멀리 우주 끝까지 보일 것 같은 맑은 하늘을 보여준다. 낮게 뜬 태양에 의해 생긴 굽이굽이 능선의 그림자는 거인의 지문 같았다. 자연이 만든 불규칙함은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눈뜨기 어려울 만큼 밝게 빛나는 하얀색과, 저 높은 하늘의 짙은 파란색은 질투하듯 하얀빛을 내리눌러 조화를 이룬다. 그 사이에 낀 능선들이 억울하듯 꿈틀대는 모습이다.

판다와 함께 고드름이 가득한 계방산의 정상석에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보니 내 모자 위에도 하얗게 눈과 얼음들이 달라붙어 판다의 하얀 머리와 닮아있었다. 판다는 크게 입을 벌리고는 깔깔대어 주었다. 바람을 피해 살짝 아래로 내려와 잠깐 쉬고는 왔던 길로 하산을 시작했다. 하산을 하며 판다는 끊임없이 조잘대었고 하산길은 지루하지 않았다.


계방산, 10.12km, 5시간 58분, 소모칼로리 2529kcal, 평균경사도 20%
상승고도 1033m, 하강고도 1026m, 최저높이 740m, 최고높이 1590m


산타는판다의 일기

와아아아아아아아아!!!!!

계방산 정상이다!!!!!

너무 예쁜 상고대를 보다니!!!!!

얼음옷을 입은 나뭇가지가 부딪힐 때마다 종이 울리는 아름다운 소리가 들려!!!!!

겨울산은 너무 아름다운 곳이었어!!

다음에 또 올께!! 기다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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