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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을 정리하는 법 Jun 21. 2020

저는 반찬 가게 아들입니다.

 엄마, 

 엄마가 반찬 가게를 시작한 지 10년이 지났을까요? 중학교에 입학할 때쯤부터 명절마다 가게 일을 돕느라고 연휴 때 친구들과 놀지도 못한다 투정을 부린 기억이 나니 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 엄마가 가게를 처음 시작하고 맞은 명절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설이었나 추석이었나는 이젠 가물가물 하지만 제가 동생과 함께 방을 쓰던 그 집에서 산적 꼬치를 끼운다고 가족이 다 같이 좌탁에 둘러앉아 저마다의 쟁반을 채우던 모습이요. 그때부터 우리는 우리 가족의 차례니 제사뿐 아니라 온 동네의 차례와 제사를 책임지는 셈이었죠. 그즈음 우리 집 냉장고엔 우리 가족 먹을 반찬이 아니라 다른 집 차례상에 오를 산적 꼬치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죠,


 그때 참 어렸던 아이는 설이며 추석, 가끔은 정월대보름까지 가게에 나와 "땡꼬포오새(동그랑땡, 산적 꼬치, 명태포 전, 오징어튀김, 새우튀김) 사세요"를 외치며 시장 상인들에게 이쁨을 받았어요. 엄마 가게의 냉장고에는 

땡 10,000

꼬 15,000

포 30,000

오 10,000

새 20,000

이렇게 적힌 주문 쪽지들이 가득 붙어있었고, 저는 그 주문에 따라 소쿠리에 가득 담겨있는 튀김이며 전을 밤새 포장했어요. 엄마한테 이거 다 팔면 집에 가냐고 물어보면 "아직 집이랑 가게 냉장고에 꼬치랑 고구마, 명태포 더 튀길 거 한참이나 있다"라고 알려주셨죠. 전날 밤부터 낮까지 엄마는 전을 부치고 할머니는 튀김을 튀기고 저는 계속 손님들 주문을 받았죠. 


 명절 전날까지 제사음식들을 팔다가 장사를 접으면 엄마와 나, 외할머니는 같이 밥을 먹으러 갔죠. 다들 튀김이랑 전 때문에 기름 냄새는 맡기도 싫다며 연휴에 여는 가게는 삼겹살 집뿐이라 고기를 먹고 집에 갔어요. 명절 연휴에는 여행이나 귀향길에 오르는 다른 집들과 달리 우리는 방바닥에 다들 누워 지루한 텔레비전만 쳐다보고 엄마랑 나는 이제 질려서 쳐다도 보지 않는 튀김, 전을 부엌을 오고 다니던 아빠와 동생이 집어먹는 모습이 반찬 가게 아들내미 가족의 명절이었죠. 

 

 사실 그런 명절들 가운데서도 가장 좋아하던 날은 정월대보름이었어요. 할머니께서 한 솥 삶으신 시금치에서는 김이 나고 있었고 그 와중에도 빨리 나물은 식혀둬야 한다고 할머니는 그 뜨거운 나물에 맨손을 넣으시고 휘휘 저어 김을 빼셨어요. 그때 가게가 참 예뻤어요 시금치, 콩나물, 무생채를 스티로폼 용기에 담으면 녹색, 노란색 그리고 흰색이 조화롭게 담긴 한 그릇이 나오는데, 가게 앞에 줄지어 놓인 나물들의 색감이 지금도 선명해요.  아, 왜 보름날이 좋았나 생각해보니 그 날은 쉬는 날이 아니라 학교를 마치고 가게에 왔기 때문인가 봐요. 그러면 가게 안에 스테인리스 그릇에 가득 담겨있는 나물들의 향연을 보았고 찰밥에 원하는 나물들을 덜어가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죠. 씀씀한데 오묘한 고소한 맛이 나는 취나물과 아주까리부터, 들깻가루에 무쳐 향이 좋은 꼬들꼬들한 토란대를 실컷 먹을 수 있었어요. 그러다 토란대를 너무 많이 먹어 목이 까끌까끌해서 혼이 났던 기억도 나네요. 

 

 그땐 나도 참 어렸는데, 물론 지금도 다 컸다고 얘기할 순 없겠지만요. 요즘은 그게 고민인 것 같아요. 어떻게 되면, 언제가 되면 내가 다 컸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제가 이런 고민을 하는 동안에도 엄마는 새벽이면 일어나 농수산물시장 업자들에게 전화를 걸고 물건을 받고 현대 포터 용달차를 타고 가게 셔터 문을 올리겠죠. 그러면서도 스무네 해 동안 엄마는 나한테 참 많이도 기대 왔다고 이야기했어요. 자취를 시작하고 나서 오히려 엄마 반찬을 더 자주 먹게 되는 것 같아요. 저번에 보내주신 열무김치는 혼자서는 다 해치울 수 없는 양이어서 친구들과 조금씩 나눠먹었더니 택배 주문은 안 받느냐고 주변에서 난리입니다. 봄이 오면 달래 무침을 보내주시고, 가끔씩 나 좋아하던 고사리는 잊지 않고 넣어주시고, 지난번 집에 갔을 땐 

"이거 엄마 어릴 때 먹던 건데 시장가니 있더라"

며 쑥부쟁이를 무쳐주셨죠. 생긴 건 쑥과 하나도 안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희한하게 쑥 맛이 나는데 콩비지랑 같이 먹어도 맛있겠다 생각했어요. 이럴 때마다 하여간 아들을 나물 박사로 키우시려는 셈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 제 또래에 이렇게 다양한 나물 맛을 알아가며 살 수 있는 것은 복 받은 일이라 생각해요. 


 어릴 땐 다들 이렇게 사나 보다 당연하다 여겼을 법한 일들이 크고 나서야 우리만 아는 사실임이 밝혀졌을 때 놀라기도 해요. '고들빼기로 김치를 담근다는 사실'과 '음력 9월 9일엔 구구제를 지낸다는 사실'을 동시에 아는 집은 많지 않을 거예요. 이건 다 전라도에서 내내 사셨던 외할머니와, 전라도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결혼을 하고 가게를 차린 엄마와 함께 가게일을 도왔기 때문이겠지요. 개중 '밤국'은 정말로 아는 사람이 없는가 봐요? 네이버니 구글이니 검색을 해봐도 나오질 않고 주변에도 밤죽이니 밤묵은 알아도 밤국은 정말 처음 듣는다는 눈치더군요. 어쩌면 제가 이 글을 쓰는 게 세상에 밤국을 처음 알리는 일이 될 수도 있겠군요. 단팥이며 밤이며 달달한 재료는 다 들어가 국처럼 쑨 밤국은 물김치나 담던 큰 김치통에 넣어두고 절대 숟가락으로 바로 먹는 게 아니라 국자로 덜어야 한다고 배웠어요. 안 그럼 빨리 쉰다고요. 마음 같아선 한 번에 다 먹을 자신 있으니 숟가락을 바로 집어넣고 싶지만 퇴근한 아빠도 맛 보여드려야 하고 내일 아침 대신으로도 먹어야 한다니 참아야지요. 


 사실 이렇게 말해도 밤국 맛을 모르는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에요.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런 건가 봐요. 세상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저만의 무언가가 생긴다는 것이요. 이젠 예전처럼 어린아이 손 같은 고사리가 아니라 야산에 제멋대로 자란 고사리처럼 이리저리 치여 억세게 자라 버린 저지만 '주변에서 찾을 수 없는 밤국의 맛을 알아가며 산다는 것', 그리고 '어릴 적 가족과 다 같이 온 동네 산적 꼬치를 끼우고 시장을 돌아다니며 튀김을 팔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이런 것들이 결국 제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려주는 출처이지 않을까요. 이런 것들을 이해받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가족으로 탄탄히 묶여있는 건가 봐요. 

어머니, 그래서 저는 반찬 가게 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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