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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미준 Jan 17. 2020

분홍 여인, 그리고 색각이상자의 눈에 비친 세상

그는 난생 처음 붉은 노을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시작은 분홍 여인이었다


작년 이맘때였나, 외출을 했다가 집에 가기 위해 전철을 탔다. 겨울이었고, 겨울풍경이 으레 그렇듯 사람들은 대부분 검거나 어두운 색 계열의 옷을 입고 있었다. 누군가가 분홍색 외투를 입었다면 단연 눈에 띈다. 나와 대각선으로 마주앉은,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분홍색 패딩점퍼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분홍색 가방을 메고 있었다. 치마도 분홍, 양말도 분홍, 신발도 분홍, 머리색도 분홍이었다.


특이한 패션을 많이 봤는데 이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분홍색으로 도배한 사람을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참 별난 사람이 다 있네'라고 생각했다가, 그 다음에는 뭐 하는 사람일까 궁금해졌다. 그렇다고 직접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어서 머릿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대학생일까? 회사원일까?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 어떤 친구들과 어울릴까? 어떤 노래를 좋아할까? 남자친구가 있다면 어떤 사람일까? 휴대폰으로 문자를 주고 받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말투는 어떨까? 목소리는 어떨까?


그날의 강렬한 인상을 나는 놓칠 수 없어 휴대폰을 꺼냈다. 노트앱을 펼쳐서 간단히 기록을 남겼다. '전철에서 만난 분홍 여인.' 며칠 동안 그녀를 생각했다. 그리고 이 사람을 주인공으로 어떤 소설이 만들어질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브레인 스토밍의 시간. 분홍색. 마니아. 색. 직업. 색각. 불편. 분홍 여인이라는 단 하나의 소재에서 파생한 것들이 소재창고를 채워나갔고, 드디어 한 편의 짧은 소설을 구상하기에 이르렀다.



색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색'을 가지고 만지작거린 결과, 새 소설의 주인공은 색각이상자, 흔히 말하는 '색약자'로 정해졌다. 나는 살면서 한 번도 색깔 때문에 불편한 경험을 한 적이 없다. 주변에 색약인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도 '그런 사람도 있구나' 생각하는 정도였지, 색으로 많은 규칙을 결정해둔 세상에서 그들이 얼마나 큰 불편을 겪고 있을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전철노선도나 신호등 색깔 구분하기처럼 내가 별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해낼 수 있는 작업이 색약자들에게는 꽤나 불편한 작업이고, 일자리 경쟁에서도 선택의 폭이 좁고 때로는 불이익을 당하는 현실에 놓여있다는 걸 나는 그 전까지 알지 못했다. 그들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감히 소설 주인공으로 내세워도 되는 걸까. 하지만 유튜브에서 한 색각이상자가 전용 안경을 쓰고 처음으로 산마루에 드리운 노을의 색을 감상하며 눈물 흘리던 영상을 본 뒤, 나는 겸허한 마음으로 그의 편에 서서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글 쓰는 자의 소명일 터.



몇 년 전, 네이버에서 전철노선도를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환승구간을 통과한 노선이 어느 방향으로 뻗어있는지를 일반적인 색각으로는 금방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색약자나 색맹자는 구분이 힘들다. 비슷해 보이는 색깔의 여러 노선이 겹쳐 있으면 노선의 방향성을 알 수가 없어 종점을 확인해야 한다. 그래서 일반 색각자보다 노선을 해석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이 점에 주목한 네이버에서 여러 번의 취재와 연구 끝에 색약모드 전철노선도를 내놓았다. 네이버를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배려 섞인 서비스를 제공하려 애쓰는 걸 보면, 과연 네이버가 국내 1위 포털 자리를 수년 째 유지하는 이유가 있구나 싶다.




글쓴이: 지미준

1982년생.

2018년 단편소설 《김 씨의 구두》로 계간 [소설미학] 신인상 당선.

카카오 브런치에 일상과 생각을 담아내는 에세이스트. 일러스트 도안사였다가, 번역사였다가, 영어강사였다가, 뜬구름 잡는 딴따라였다가, 어느 날 번개를 맞은 것처럼 영감이 떠올라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아무도 모른다. 바로 내일, 우리가 무엇이 되어 있을지는.

주요 작품: 단편소설 《김 씨의 구두》, 《빌라에서 생긴 일: 엘리베이터》, 《‘나의 투쟁’》, 《베토벤은 아니지만》, 장편소설 《토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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