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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미준 Oct 08. 2019

날 괴롭혔던 너를 이해해보기로 했다

단편소설 《빌라에서 생긴 일: 엘리베이터》를 집필하며

중학교 3학년 때였다. 같은 반에 ‘정희’라는 애가 있었다. 일진...이라고 하기보다는 일진의 언저리에 걸쳐있었다고나 할까. 까무잡잡한 피부, 작은 얼굴, 작은 키, 체형과 달리 사나워보이는 눈매를 가진 애였다. 틱틱거리고 상대를 무시하는 듯한 말투가 거슬렸지만 나에게 피해를 주거나 하진 않았다. 그래서 그냥 좀 기분 나쁘고 싸가지 없는 애라고 생각했다.


시험기간이 다가왔다. 정희는 내 뒷자리에 앉았다. 그 애를 본격적으로 싫어하게 된 건 아마 그때부터가 아닐까 싶다. 시험 도중에 뒤에서 정희가 나를 쿡쿡 찔렀다. 답안지를 보여달라고. 나는 처음에는 무시하다가 결국 답안지를 뒤로 돌리고 말았다. 주지 않으면 얼마나 나를 괴롭힐지 대강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희의 커닝은 시험 때마다 반복되었다. 학년 초에 결정된 번호로 1년을 보내야 하니, 시험 때마다 내 자리는 항상 정희 앞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정희는 매번 내 등을 쿡쿡 찔렀다.


남이 고생해서 얻은 지식과 결과를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얻으려는 그 애에게 슬슬 화가 났다. 나는 더 이상 그 애에게 답안지를 넘겨주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찔러도, 아무리 내 이름을 불러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그 애는 나에게 말도 걸지 않았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다가 비웃듯 피식거렸다.


며칠 후, 나와 정희가 주번이 되었다. 일주일 내내 그 애는 주번 역할을 하나도 하지 않은 채 나만 남겨놓고 가버리기 일쑤였다. 안 그래도 못마땅한데 주번 책임까지 내팽개쳐버리니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정희에게 너도 주번인데 왜 아무것도 안 하고 일찍 가버리냐고 말했다.


그러자 그 애에게서 쌍시옷 들어간 욕설과 함께 의자가 날아왔다. 쿠당탕! 드디어 그 애가 나에게도 깡패 본성을 드러냈다. 나도 같이 의자를 던졌다. 다행히 교실에 남아있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다친 사람은 없었다. 그날, 머리채를 잡고 싸웠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정희나 나나 다친 데는 없었다는 것. 의자만 던지고 쌍욕만 주고받다가 끝났던 것 같다.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려고 일진이나 꼴통들 앞에서는 몸을 사리게 마련이다. 정희 역시 조금은 그런 감정으로 대하고 있었는데, 막상 나에게 의자가 날아오니 계산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나도 눈이 돌아버렸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나서 오히려 편해졌다. 그 애는 더 이상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물론 말도 안 걸었지만), 보복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학교에 나에 대한 헛소문이 돌긴 했지만, 그게 그 애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나는 그저 누군가의 입에 의해 성범죄 피해자에서 피해자가 아닌 사람으로 처지가 뒤바뀌었을 뿐이다. 그리고 진실은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가까운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많은 작가들이 마음에 안 드는 인간들을 자신의 소설에 등장시켜 간접적으로 응징하곤 한다. 나 또한 그렇다. 정희라는 이름을 소설 속에 넣고 버무려 질식시키고 싶었는데, 쓰다 보니까 알게 되었다. 얘도 한 인간이라는 것. 그 애가 나에 대해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퍼뜨려 나의 명예를 떨어뜨리려 했다고 믿고 싶지만, 지금껏 그렇게 믿었었지만, 소설 속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뼈가 부러지는 정희를 그리며 측은한 마음이 들 때는 헛소문으로 나를 괴롭히려 한 게 그 애가 아니었길 바라는 마음도 든다. 여전히 그 애가 밉지만 그 애도 자기 삶에 대한 변명을 할 기회는 가져야 하지 않을까. 너무 미워하지는 않기로 했다.



글쓴이: 지미준

1982년생.

2018년 단편소설 《김 씨의 구두》로 계간 [소설미학] 신인상 당선.

카카오 브런치에 일상과 생각을 담아내는 에세이스트. 일러스트 도안사였다가, 번역사였다가, 영어강사였다가, 뜬구름 잡는 딴따라였다가, 어느 날 번개를 맞은 것처럼 영감이 떠올라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아무도 모른다. 바로 내일, 우리가 무엇이 되어 있을지는.

주요 작품: 단편소설 《김 씨의 구두》, 《빌라에서 생긴 일: 엘리베이터》, 《‘나의 투쟁’》, 《베토벤은 아니지만》, 장편소설 《게토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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