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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미준 Apr 09. 2020

집순이에게 작업실이 생겼다

작가님, 계약합시다!

백수 집순이의 민폐짓


3년 전에 이사를 하면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글만 썼다. 수입도 거의 없었다. 간혹 번역을 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오면 용돈벌이 삼아 머릿속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영어 단어들을 기억 깊숙한 곳에서 끄집어내며 일을 하곤 했다. 단언컨대 언어는 근육 같은 것이다. 학문이 아니라 습관으로 완성되는 것. 쓰지 않은 기간에 비례해 많은 단어들이 기억에서 지워졌다. 여행지에서 겨우 기본 대화를 하는 정도다. 4년간 공부했던 일본어는 이제 글자를 읽는 방법조차 기억이 안 난다.


무슨 생각으로 소설을 쓰기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분명 마음 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있는 분노의 덩어리가 갑자기 툭 튀어나와 어떤 인간에게 복수나 해보자는 생각으로 펜을 잡았던 것 같은데, 정작 완성한 글은 구두쇠가 주인공인 콩트였다. 짧은 소설을 완성하고 나서 자신감이 붙은 건지,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어느 날 갑자기 번개 맞은 것처럼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이디어가 쏟아지는데 받아낼 그릇이 작았다. 호흡이 긴 글을 쓰는 건 처음이었다. 심폐소생을 해가며 꾸역꾸역 소설 하나를 완성했더니 1년이 지났다.


서투르게 써내려간 첫 소설을 제본까지 해서 문학공모전에 응모도 했다. 결과가 탈락이 아니길 바랐던 건 너무 큰 욕심이었을 것이다. 몇 번의 퇴고와 응모와 탈락을 거치고, 나도 돈 좀 벌어야 가족에게 면이 설 텐데 하는 현실적인 생각으로 일을 계획하고 있을 때 한 출판사 대표를 만나게 되었다.



운칠기삼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사람의 일이란 정말이지 안개 속과 같다. 출판인 카페에서 가까운 지역 사람들끼리 번개를 하네 마네 하다가 안양의 한 출판사 대표님과 연락을 주고받게 되었는데, 내가 일러스트레이터 프로그램을 조금 다룰 줄 안다고 했더니 일을 부탁하셨다. 부탁받은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비용을 물어보시기에 그냥 밥이나 사달라고 했다. 일을 처리해주고 이틀 후 대표님에게 식사하자는 연락이 왔다. 날짜를 잡고 예약된 식당에서 대표님을 처음 만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금과 같은 관계가 되리라고는 나도, 대표님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날 대표님은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걸 처음 알았고, 나는 마침 써놓은 장편소설을 소개했고, 고맙게도 내 원고를 읽은 대표님이 며칠 후 계약을 하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고, 그 와중에 나는 나 같은 신인에게 덜컥 손을 내미는 대표님의 의중이 의심스러웠고, 결과적으로 계약 미팅에서 생각보다 진지하고 다양하게 영업을 구상하고 있다는 대표님의 이야기를 듣고 믿음이 생겨 계약서에 서명을 했고, 덕분에 넓진 않지만 집에서 멀지 않고 글쓰기에만 집중할 수 있는 작업공간을 얻었다.



결코 자유롭지 않은 자유계약자


그렇지 않아도 집에서 글쓰기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아 한적한 카페에 포인트를 잔뜩 쌓아놓은 채 출퇴근하기도 했고, 공유오피스를 알아보기도 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신기하기만 한 인연, 소망하던 일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상황. 이걸 대체할 말은 '운' 말고는 없어 보인다.


가끔 블로그에 프리랜서의 삶에 대해 글을 남기지만, 업무환경의 자유도가 늘 효율을 높이는 건 아니다. 자기관리가 철저하지 않으면 일상과 업무의 경계가 사라진다. 24시간 전체가 업무시간이 돼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경계가 사라진다는 건 시계가 없다는 것. 시계가 없으면 지금이 1시인지 2시인지, 언제쯤 해가 떨어지고 식당에 손님이 몰릴지 알기 어렵다. 프리랜서로 일하려면 시간관리도 중요하지만 공간의 구분 또한 필요하다. 일상과 업무의 경계를 만드는 일차원적 방법은 공간을 분리하는 것이다. 프리랜서는 자유롭게 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자유롭지 않은 사람들이다. 업무를 위해 시공간을 설정하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


나는 출판사 대표님의 배려로 얻은 작업실을 평일에 거의 매일 드나든다. 원고 수정이나 자료 조사, 아이디어 회의 등의 일을 한다. 출퇴근 시간은 내 마음이지만 가급적 일정한 시각에 일하려고 노력한다. 오전에 늦게 일어나는 편이라 작업실에는 점심시간에 출근해서 저녁 식사 전에 퇴근한다. 집에서 펜을 들었다 놨다 TV를 켰다 껐다 냉장고를 열었다 닫았다 소파에 누웠다 앉았다 하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10시간을 숨표 없이 일하느니, 일 말고 다른 할 짓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분리된 공간에서 짧은 시간 집중하는 게 훨씬 낫다.



글쓴이: 지미준

1982년생.

2018년 단편소설 《김 씨의 구두》로 계간 [소설미학] 신인상 당선.

카카오 브런치에 일상과 생각을 담아내는 에세이스트. 일러스트 도안사였다가, 번역사였다가, 영어강사였다가, 뜬구름 잡는 딴따라였다가, 어느 날 번개를 맞은 것처럼 영감이 떠올라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아무도 모른다. 바로 내일, 우리가 무엇이 되어 있을지는.

주요 작품: 단편소설 《김 씨의 구두》, 《빌라에서 생긴 일: 엘리베이터》, 《‘나의 투쟁’》, 《베토벤은 아니지만》, 장편소설 《공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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