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저녁, '아무도 오지 않는 밤'

mu-02

by 김쾌대

비가 오는 휴일에 생각나는 뮤지컬이 있다.
한국 창작 뮤지컬의 1세대 작품, <사랑은 비를 타고>가 바로 그것이다.
제목에서부터 비가 내리고 있으니 생각이 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작품에서 말하고자 했던 비는 사랑을 상징한다.
이 공연의 마지막 엔딩곡이 '사랑'인 이유이다.

주인공은 모두 세 명인데 장년으로 접어든 형과 청년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남동생, 그리고 둘 사이에 느닷없이 뛰어드는 이벤트 회사 이십 대 초반의 신입 여직원이다.
형의 생일날 저녁, 당사자는 정성스럽게 생일상을 준비하는데 극 중에는 나오지 않는 여동생 두 명을 초대하였기 때문이다.
남자 동생과는 의절 상태로 지낸 지 오래여서 초대 명단에는 없었다.
혼자 지내는 처지에 오랜만에 살붙이들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생각에 가슴이 부풀었지만 야속한 여동생들은 전화를 하더니 이런저런 핑계로 불참을 전한다.
낙심에 빠진 형은 주방에서 나와 거실의 창밖을 통하여 주룩주룩 내리는 빗물을 보면서 한탄스러운 노래를 한다.
오늘 소개할 넘버, '아무도 오지 않는 밤'이다.

중년으로 접어들면 밤에 잠을 못 이루며 뒤척이게 된다.
젊었을 때는 내일 해야 할 일을 계획하며 들떠서 잠을 못 이뤘다면 나이가 들면서는 점점 어제 이루지 못한 것들을 곱씹으며 오늘이 좀 쓸쓸해진다.
별로 이룬 것도 없이 시간만 흘러가는구나, 라는 감상에 젖어 드는데 밖에서 비까지 내리면 물심양면으로 촉촉해진다.
청춘이 생동감 넘치는 봄비라면 중년은 차갑게 흐르는 겨울비와도 같다.

제목이 동명으로 번안되었지만 완전히 다른 작품인 미국 뮤지컬 영화(Singing in the Rain)에서 진 켈리가 빗속에서 춤을 추는 장면은 그야말로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 된 듯하다.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어느 때보다 간절한데 사랑할 대상을 찾기가 만만치 않다.

등을 돌리고 자고 있는 배우자도 그렇고 둥지를 박차고 나가 버린 (혹은 준비에 여념이 없는) 자식들도 소원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쓸쓸하게 젖어있는 형의 집으로 연락이 끊기었던 동생이 불쑥 찾아온다.

동생은 형이 자신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피아니스트의 길을 포기하고 평범한 음악 선생으로 지내는 사실에 그동안 화가 많이 나 있었다.

형도 형의 인생이 있는데 왜 자신을 위해 희생을 하고 그걸 빌미로 사사건건 참견과 집착을 보이는지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것이다.

형과 화해를 하기 위해 찾아오지 않은 이상 둘의 만남은 서먹하고 어색하기만 하고 급기야는 감정싸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서로에게 '늘 그런 식이야'라며 주고받는 노래가 한껏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농작물에 가뭄도 문제지만 홍수도 역시 피해를 준다.

사랑이 부족해도, 과해도 받는 사람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데 솔직히 어느 인간이 완벽하게 사랑을 시전하며 살 수 있을까.

비 내리는 거리를 걸으며 물 한 방울 묻지 않겠다는 희망 사항만큼이나 부질없는 바람일 뿐이다.

내 경우에는 부모님이 원수처럼 싸우며 지내시면서도 반대급부처럼 첫아들인 나에게 모든 걸 쏟아붓는 홍수와 같은 사랑을 주셨다.

나는 무력하게 그 사랑 앞에서 한도 없는 고마움과 끝도 없는 부담을 모두 느끼며 자랐다.

독립하여 가정을 이뤄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늘 애정이 넘치지 않도록 자제하기 위해 노력하며 지냈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아서 늘 고민이다.


양념처럼 등장해서 관객의 혼을 쏙 빼놓는 사회초년생 실수투성이 여자 배우의 열연에 힘입어 관객들은 점점 공연으로 몰입하게 된다.

그녀의 등장으로 날을 세우며 대립하던 형과 동생도 점점 마음을 열고 마침내 화해를 이루게 되며 막을 내리게 되는데 마지막 장면이 참 따뜻하고 훈훈해서 좋았다.

비 오는 날이면 문득 생각나는 뮤지컬, 올해로 26년째 장기 공연을 이어가고 있는 스테디셀러 공연, 처음 뮤지컬을 시작하려는 사람에게 좋은 입문작으로 손색이 없는 작품.

아무도 오지 않는 밤에 상념에 빠져 뒤척이는 중년에게 꼭 소개하고 싶은 공연이다.


*영상: 동생들에게 오지 못한다는 전화를 끊고 쓸쓸하게 노래를 부르는 형의 모습.

https://youtu.be/irG7dxh7W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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