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다 보면 조울증이 가벼운 감기처럼 스쳐 지나가곤 한다. 어떤 날은 단 한 줄의 문장도 짓지 못해서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고, 또 다른 날에는 내가 쓴 글이라고 믿기지 않아서 우쭐하다가 현재 내 처지를 생각하면 또 다른 자괴감에 빠진다. 그렇게 보면 밝고 좋은 날보다 어둡고 흐린 날이 더 많아 보인다. 문학은 어쩌면 우울한 사람들의 놀이터이다.
전쟁터에서는 어떨까? 삶과 죽음이 갈리는 그곳에서는 오직 참혹한 비극만이 난무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사방에 죽음의 그림자와 냄새가 진동하는 곳에서도 사랑이라는 꽃이 피어난다. 고대 나일강 변에서 이집트와 누비아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뮤지컬 <아이다>는 당시 누비아의 공주 '아이다'와 적국 이집트의 장군인 '라다메스', 그리고 그의 약혼녀이자 이집트 왕국의 왕위 계승자인 '암네리스' 공주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나온다. 물론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문학적으로 창작된 허구의 이야기이다.
타이틀 롤은 제목에서 나와 있듯이 전쟁에 패해 포로로 잡혀 온 '아이다'이다. 그녀는 약소국의 공주이지만 신분을 드러내지 않으며 비참한 노예의 신분에 처한다. 최고 권력자의 몰락이라서 더욱 비참한데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관객뿐만이 아니라 그런 그녀의 모습에 승자의 위치에 있는 장군도 그녀에게 빠져든다. 장군은 사랑에 눈이 멀어 조국을 등지고 아이다를 구출하려고 한다. 그로 인해 그는 조국은 물론이고 배우자가 되기로 약속한 약혼녀마저 배신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약혼녀는 어느 순간 모든 사실을 알게 되며 둘을 처형하기로 한다.
너무 흔하고 익숙한 클리셰라서 새로운 것이 나올까 싶은 플롯이다. 그런데 공연을 접하게 되면 벅찬 감동이 몰려온다. 뻔한 삼각관계의 러브 라인에서 벗어나 관객에게 던진 특별한 주제 의식은 무엇일까?
여주인공 '아이다'의 고뇌가 두드러졌다. 포로로 잡혀 와 신분을 숨겼다는 것은 일신의 안전을 위한 평범한 안전장치였다. 특별한 것 없는 그녀는 이후 동족들이 포로로 잡힌 캠프에서 그녀를 알아본 사람들이 자신들을 구해달라는 간절한 요청에 동요하고 마침내 결단을 내리지만, 사랑하는 연인 '라다메스'와 사랑에 빠지고 있는 자신이 동족을 배신하고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란 사실에 고뇌한다. 이런 처절한 갈등 때문에 마지막에 그녀가 조국을 구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죽음을 맞이할 때 울림이 크게 다가온다. 적재적소에서 나오는 엘튼 존의 주옥같은 넘버들이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며 깊은 호소력을 가지고 관객들에게 다가오며 몰입하게 만든다. 엘튼 존의 음악적 미학은 마력이 있다. 심금을 울리기 때문이다.
조연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또 다른 여주인공인 '암네리스'의 변화도 감명 깊다. 그녀는 공연 초반부에 화려한 의상을 선보이며 자신이 무소불위인 절대 권력자의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강변하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녀는 공연이 진행되면서 사랑하는 약혼자인 '라다메스'가 자신에게 애정이 식어가며 왜 점점 멀어지는지 모르겠다는 투정을 부린다. 엄친아가 그렇듯이 그녀는 대제국의 공주이기 이전에 한낱 철부지였다. 자신의 약혼자와 자신의 시녀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거기까지는 특별할 것이 없다. 그녀가 위대한 점은 그동안 자신의 삶이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걸 통감하며 각성을 하였다는 것이다. 배신한 약혼자와 친구와도 같았던 시녀가 붙잡혀 왔을 때 그녀는 둘을 함께 매장하라는 처형을 내리며 깊은 통찰이 서린 판결을 내린다. 엘튼 존의 음악이 역시 감동을 끌어낸다.
뮤지컬 <아이다>는 디즈니라는 애니메이션 회사가 본격적으로 뮤지컬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기획하고 제작한 작품이다. 이러한 도전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미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망해가던 디즈니를 <알라딘>, <라이언 킹>으로 다시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서게 만든 불세출의 극작가인 '팀 라이스'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팀 라이스'는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함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에비타>를 만들어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뒤 디즈니에 입사하며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 작가이다. '팀 라이스'는 위대한 문학가이다. 석관묘에서 발굴된 남녀(아이다와 라다메스)의 미이라에서 시공을 초월한 사랑 이야기를 상상했다는 점이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 그 정도 메시지는 문학이나 공연 예술까지 않더라도 실제로 고대에 살았던 국내 어느 부부의 유골과 함께 발굴된 절절한 편지 한 장이면 충분하고 더욱 실감이 난다.
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현상 너머에 있는 의미를 밝혀주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과 사랑, 권력과 배신, 지도자와 대중이 펼쳐지는 역사 뒤에서 그 수레바퀴를 돌리는 보이지 않는 힘과 본질(고뇌와 결단, 성찰과 성장)에 대한 사색을 통하여 서사에 깊이가 생기고 결이 만들어지고 보는 이로 하여금 사유하게 만드는 동기를 부여하게 만드는 일이 작가가 지녀야 할 자세라고 생각한다. 문학을 하면서 우울한 날들이 많지만, 그래도 그 속에서 짧게 빛나는 순간들이 나에게 영감을 주고 용기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