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일 좋은 일

손톱소설

by 김쾌대

"한결 젊어 보이시는 것 같아요!"


오전 9시의 미용실은 한산했다. 연호 씨는 오늘 중요한 면접이 있다. 두어 달 동안 리크루트 앱에서 구인 정보를 검색했는데 최근에 사무직에서 중견 관리자를 뽑는다는 공고가 떴다. 주저하지 않고 즉각 이력서와 지원서를 보냈는데 어제 회사에서 연락이 와서 오늘 회사로 방문하라고 했다. 어제는 전화를 끊고 아웃렛으로 나가서 정장 한 벌과 와이셔츠에서 벨트와 구두까지 풀세트로 면접 복장을 준비했다. 그리고 미용실에 전화를 걸어 평소에 자기 머리를 만져주는 해연 실장에게 예약 여부를 물었다. 미용실 오픈 시간은 10시였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평소 상냥한 그녀라면 왠지 들어줄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해연 실장은 흔쾌히 나오시라고 했다. 연호 씨는 '지난 화이트데이 때 미용실에서 원장 몰래 건네준 초콜릿이 효력을 발휘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드라이를 끝내고 제품까지 바른 후에 전신 거울을 들여다보니 정말 십 년은 더 젊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연호 씨는 나쁜 일이 그렇듯이 좋은 일도 한꺼번에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최근에 악재가 거듭되며 작년에 멕시코에서 한국으로 귀국했을 때 사실 죽음을 각오하고 왔던 것이다.


연호 씨는 서울 소재 대학 서반아(스페인)어 학과 96학번 출신이다. 재학 중에 IMF가 터지면서 들어가고 싶었던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망하고 졸업한 이후에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서 전전긍긍하다가 외삼촌이 이민을 가 계신 멕시코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옆좌석에는 같은 과에 다니며 썸을 타다가 2002 한일 월드컵 거리 응원 때 급속도로 친해지며 애인으로 발전했던 주연도 앉아있었다. 그녀 역시 얼어붙은 국내 취업 시장에서 졸업 후 직장을 얻지 못하다가 취집을 결심하고 소심했던 남친 연호에게 작업을 걸어서 프러포즈를 받아내고 결혼까지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친정이 망하고 생지옥 같은 한국보다는 이국적인 멕시코에서 차라리 깔끔한 출발을 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멕시코에 정착하기 시작한 두 사람은 거기서 아이 둘을 낳았고, 외삼촌 회사에서 무역일을 배운 연호는 오 년 후에 오퍼상을 열고 독립해서 미국에 섬유 제품을 팔기 시작했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죽을 만큼 일을 해서 십 년 동안 큰돈을 벌게 되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교육을 위해 캘리포니아에 큰 저택을 사들여서 아내와 아이들을 보내고 기러기 아빠가 되었다. 외롭고 쓸쓸한 밤도 많았지만 사업과 가정을 일구는 보람이 커서 그럭저럭 지낼 만했고 행복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솔기처럼 틑어졌던 재앙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2018년 그날, 몬테레이에는 밤까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내의 고급 식당에서 거래처와 사업 미팅을 마치고 세단 뒷좌석에 몸을 실은 연호는 긴장이 풀리며 피곤이 몰려와서 설핏 잠에 빠져 있었다. 교차로에서 멕시코인 기사가 차를 세우고는 보스를 향해 "제페(Jefe)!!"라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눈을 뜨려는데 앞쪽에서 커다란 천둥이 치는 소리가 들렸다. 총소리였다. 불과 몇 미터쯤 앞에서 마피아 두 명이 어느 행인에게 총을 발사했고 총을 맞은 행인이 쓰러지자 둘은 서둘러 도망을 치면서 연호의 차 옆으로 스쳐 갔다. 목격자가 있는 것을 감지한 그중 한 명이 운전석을 향해 남은 총알을 몇 발 쐈는데 기사의 머리를 관통한 한 발이 뒷좌석 연호의 오른쪽 넓적다리에 박혔다. 병원에 후송되어 응급처치를 받고 이후 일 년 동안 재활 치료를 거쳐 퇴원하게 된 연호는 멕시코 사업을 정리하고 미국의 가족에게 합류했다.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던 탓일까, 십 대 후반의 아이들은 아빠라는 존재를 부담스러워하는 듯이 보였다. 연호는 몇 개월 후에 아이들이 냉담했던 이유가 실은 그동안 자신의 자리를 주연의 골프 코치를 하는 젊은 놈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리에 총알이 박힐 때처럼 눈에서 불꽃이 일어났고 이혼 소송에 들어갔는데 공교롭게도 코로나도 시작되었다. LA 근교 모텔에서 코로나에 걸려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다 깨어난 연호는 삼 년 가까이 진을 빼는 소송에 염증을 느끼고 미련 없이 모든 재산을 아내와 아이들에게 넘겨주기로 하고 서류 작업이 끝나자마자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홀로 남아 여생을 보내는 노모(老母)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고 자살을 하기 위해서였다.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있는 홀어머니는 연호의 얼굴을 보고 죽은 남편이 돌아왔다고 좋아했다. 그리고 멕시코로 간 연호가 타국 생활에 애들 키우느라 힘들 텐데 걱정이 되니까 당신이 한번 가서 만나보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어머니도 환하게 웃었고 연호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에 지켜보던 여동생이 펑펑 울었다. 면회를 마치고 차를 마시며 이혼 사실을 모르는 여동생이, 사업이 잘될 때 오빠로부터 지원을 받아 강남에 아파트를 마련했던 여동생이 올케와 조카들은 언제 한국에 오느냐고 물었을 때 연호의 눈에서 그제서야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이후 서울 변두리에 허름한 월세방을 얻은 연호는 밤낮으로 어떻게 생을 마감해야 할지 고민했는데, 사는 것도 힘들었지만 죽는 일은 그보다 더 힘들었다. 생명을 유지하는 일에서처럼 생명을 마감하는데도 용기가 필요했는데 연호는 그런 부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졌던 욕실의 곰팡이가 다시 피듯이 무료하고 따분하고 희망 없는 일상이 슬며시 회복되기 시작했다. 때가 되면 밥을 먹고, 중고등학교 동창들도 만나서 술도 마시고, 사이사이 미국에서 처방받은 재활 치료 약도 챙겨 먹었다. 옷은 아무렇게나 입고 다녔지만 머리카락은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라서 미용실도 다니게 되었고, 거기서 마음을 주고 싶은 해연 실장도 마주치게 되었다. 그렇게 2022년 가을과 겨울이 지나고 새해가 밝았고 이제는 마침내 어쩌면 새 시작을 할 수도 있을지 모르는 직장을 얻기 위해서 면접 자리까지 나가게 된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넓은 사무실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중견 관리자를 모집한다는 공고답게 면접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중년 남자들이었고, 별도의 면접실이 아닌 개별 책상에서 팀장들로 보이는 회사 사람들이 면접자를 앞에 앉혀 놓고 질문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 직원 한 명이 다가오더니 이름과 핸드폰 번호를 묻더니 구석에 있는 책상으로 안내했다. 면접관은 머리에 포마드 기름을 바른 전형적인 육십 대 아재였는데 두꺼워 보이는 얼굴 피부 위로 깊은 주름이 파여 있었다. 자리에 앉자 그는 연호가 제출한 이력서를 훑어보면서 출신 학교들을 확인하고 멕시코에서의 사업 이력을 보면서는 뭔가 불만족스럽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그는 자꾸만 최근에 주로 누구를 만나는지를 집중적으로 물었기 때문에 연호는 미리 마음속으로 준비했던 멕시코에서의 직원 관리 노하우를 미처 말하지도 못했다. 돌아가시면 연락을 주겠다는 형식적인 답변을 듣고 맥이 풀려서 건물을 나온 연호는 근처에 있는 슈퍼마켓에 들러 차가운 음료수를 한 병 샀다. 파라솔 의자에 앉아 타는 속을 달래는데 어느새 주인아주머니로 보이는 분이 나오더니 회사 건물을 가리키며 저기 면접 보러 오셨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녀는 '코로나가 끝나가니까 다시 사람들 모집을 하는 모양이네'라며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저 회사가 매우 유명한 다단계 회사라고 알려줬다. 연호는 다 마신 빈 병을 테이블 위에 놓고 슈퍼로 들어가서 다시 새로 한 병을 사서 들이켰다.


방으로 돌아와 허탈하게 누워있는 연호의 핸드폰에 알람 소리가 울렸다. 해연 실장이 지금 퇴근하는 길이라며 약속 장소를 재차 묻는 메시지였다. 아침에 머리를 다듬고 나오면서 연호는 해연에게 오늘 면접 잘 마치고 저녁에는 밥을 사겠다고 했다. 평소의 그라면 감히 그런 용기를 내지 못했을 텐데 새로운 직장을 얻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고, 결정적으로 오픈 시간 전이라서 원장이 미용실에 아직 출근 전이어서 단둘이만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사십 중반의 자신에게 이제 삼십 대 초반의 해연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연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빼앗기는 걸 막을 수도 없었고, 특히 오늘 아침에는 만에 하나 그녀가 교제를 허락한다면 어쩌면 죽는 대신에 살아갈 이유가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어렵다면 멕시코에 그녀와 함께 돌아가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고 해야겠다. 언젠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받게 될 약간의 유산도 아직 끊어지지 않은 미국쪽 거래처와의 사업 밑천으로 부족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나쁜 일만 연거푸 몰려서 오는 건 아닐 수도 있어.’라고 생각하며 용기를 냈다. 면접에 갈 때처럼 말끔하게 단장하고 예약해뒀던 약속 장소인 멕시코 식당으로 갔는데 해연이 거기 있었다. 향 좋은 와인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비우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연호는 오늘 면접 얘기는 자세히 말하지 않고 더 좋은 곳에서 연락이 왔다고 둘러댔다. 환하게 웃으며 얘기를 듣던 해연이 들고 온 핸드백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더니 연호에게 건네줬다. 조심스럽게 열어서 내용물을 봤더니 보험 안내 인쇄물이었고 해연은 미용실 일만으로는 경제적으로 힘이 들어서 투잡을 갖기로 했다며 응원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살다 보면 나쁜 일이라는 게 한꺼번에 몰려서 오곤 하니까 좋은 시절에 미리 대비를 하시라'라는 말도 덧붙였다. 연호는 생글거리는 그녀의 얼굴을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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