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야 뭐해, 빨리 와! 오늘 열 번 할꼬야~~"
새벽 2시를 향해 가는 편의점 계산대 앞에서 젊은 여성이 소리를 질렀다. 저쪽 진열대 쪽에서 순박하게 생긴 청년 하나가 맥주 몇 캔과 안줏거리 몇 가지를 들고 와서는 여자가 먼저 내려놓은 콘돔 옆으로 상품을 쏟아냈다. 콘돔은 모두 세 팩이었다. 밤 10시부터 다음 날 아침 8시까지 야간 알바를 하는 배 정우 씨는 차분하게 모든 상품의 바코드를 찍고 나서는 봉투가 필요한지도 물었다. 남자가 괜찮다고 하는 동안 술이 거나하게 취해 보이는 여자는 남자의 몸에 자기 가슴을 비벼대며 주체할 수 없는 몸의 열기를 달래려고 하는 것 같았는데 얼굴이 화끈거리는 쪽은 정우 씨가 아니라 오히려 남자 쪽이었다. 서울 강남 한구석 모텔이 밀집한 지역의 편의점은 한밤중에도 손님의 발길이 끊어지는 일이 드물다. 정우 씨는 이곳에서 지난 3년 동안 평일 야간 알바조로 근무 중이고 오늘은 그 유명한 불금의 밤이다.
전쟁터의 포로를 끌고 가듯 남자의 목을 붙잡고 편의점을 나가는 여자를 뒤따라서 정우 씨는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갔다. 예상대로 둘은 편의점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모텔 입구를 향해 가고 있었다. 코로나 시절 동안 모텔방을 잡고 술을 마시는 청춘들이 늘어나서 오늘 방이 있으려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정우 씨는 '여자가 열 번이나 포식을 하면 내일은 과연 늦지 않고 체크아웃을 할 수 있으려나….'라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여자가 저렇게 대놓고 민망하게 활개를 치는 요즘 세태가 못마땅한지 낮게 혀를 쯧쯧 차며 담배를 비벼 껐다. 편의점 야간 시간에는 별의별 손님들이 드나들었다. 초저녁부터 자정까지는 비교적 바쁜 사람들이 밀려들어 신속하고 머뭇거림 없이 계산을 마치고 총총히 사라졌지만, 그래서 몸은 바쁘고 정신은 없어도 시간은 참 잘도 흘러갔지만, 밤 열두 시를 넘기고 한풀이 꺾이면 가끔씩 예상하지 못한 진상들이 애를 먹이곤 한다.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취객부터 자신이 찾는 물건이 없으면 역정을 내는 인간도 있고 구매한 물건을 가져가서 뜯어놓고선 다시 돌아와 뻔뻔하게 환불이나 교환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젊은 친구들의 경우에는 갑질을 당하는 경우도 많고 특히 여성 알바들은 신변의 위협까지도 느껴야 했다. 그래도 정우 씨는 환갑을 넘긴 처지여서 비교적 봉변을 당하는 일은 없었지만, 여기에는 정우 씨 특유의 고분고분한 태도도 크게 한몫을 하였다.
정우 씨의 좋게 말하면 무난한 (냉정하게 말하자면 우유부단하고 심약한) 성격은 가정환경에서 잉태되어 커졌다고 봐야 한다. 지방 신문기자를 하는 아버지는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이었는데 이에 비해 식당 운영을 하시던 어머니는 자기 고집이 세고 기질이 좀 드센 편이었다. 집 안에서 늘 시끄러운 부부싸움을 벌이는 부모님 때문에 정우 씨는 어려서부터 눈치를 보는 일이 많았고, 말싸움에서 아버지를 이기지 못한 어머니는 정우 씨에게 분풀이하는 일이 많아서 억울하게 혼나면서 대들지도 못하고 집 안 한 구석에 처박혀서 눈물도 많이 흘리며 자랐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이들이 대개 그렇듯이 정우 씨는 자기주장을 강하게 펴지 못하는 대신에 궁시렁거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대학 졸업 후 자그마한 중소기업에 들어가서도 살벌한 영업/판매 부서가 아닌 인사/총무과에서 가늘고 길게 직장 생활을 마쳤고 마흔 여덟 살에 조금 일찍 퇴임한 이후 어머니가 운영하셨던 식당을 물려받아 홀 매니저를 볼 때도 식자재 사입과 매상/세금과 관련한 회계 업무를 보며 직원들을 휘어잡고 이끌어 가는 아내의 잔소리에도 얼어 죽을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묵묵히 이를 받아냈으며 코로나가 터지면서 식당을 폐업하고 편의점 알바로 취업해서 온갖 모진 꼴을 당하면서 크게 화를 내거나 분통을 터트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마음이 불편하고 울적한 날이면 그는 밖에 나와 담배를 피우며 그저 혼자 궁시렁거리기만 했다.
새벽 여섯 시가 다가오면서 정우 씨는 출출한 허기를 느꼈다. 졸면서 깨면서 보던 손흥민이 출전한 축구 경기를 끄고 유통기한이 지나서 판매할 수 없는 품목 중에서 샌드위치와 우유를 집어 들고 자리에 돌아와 먹기 시작하다가 '건강에 더 신경을 써야 하는데...'라며 중얼거리는 정우 씨였다. 지난달에 극심한 복통을 느껴서 병원에 갔다가 담낭결석(담석증) 판정을 받고 수술까지 마친 그는 요즘 부쩍 의기소침해졌다. 친구들처럼 방광이 약해지며(혹은 비대해지며) 바지에 소변을 지리는 일은 없었지만 그 대신 청력이 약해지면서 손님들에게 되묻는 일이 잦아져서 보청기 사용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기도 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서 남은 샌드위치를 씹어 삼키려고 하는데 '딸랑~'소리가 나더니 손님 하나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아까 그 모텔의 주인인 황 사장이 담배를 사러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정우 씨보다 십 년 터울로 윗 연배인 그는 칠순 나이가 무색하게 혈색도 좋고 벗겨진 머리도 번들거리면서 빛이 나는 스타일이었는데 가끔씩 들러서 반말을 지껄이며 정우 씨를 하대하고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곤 했다. (물론 거기에 발끈하며 대응하는 정우 씨는 아니었지만) 그런 황 사장이 거침없이 계산대로 와서 담배를 주문하면서 '젊은 놈이 일은 안 하고 팔자 좋게 밥이나 처먹고 있냐?'라고 특유의 비아냥거리는 멘트를 날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라면 그냥 흘러버리고 넘어가야 하는데 오늘은 정우 씨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가 발끈한 이유는 '일은 안 하고'라는 말에 걸려 넘어진 것인데 담석 제거 이후 평생 남의 눈치 보며 노새처럼 일만 하는 자신이 요즘 너무 처량하고 한심하게 느껴져서 남모르게 부아가 치밀곤 했는데 하필이면 남보다 못한 황 사장'놈'이 역린을 건드리고 만 것이었다. 정우 씨는 무서운 눈으로 황 사장을 째려보다가 계산대 아래로 손을 스르르 내렸다. 거기에는 주말 야간 알바인 베트남 처자, ‘프엉’을 위해 호신용으로 비치한 후추 스프레이와 강철 호신봉이 있었다. 마음 속에서 호신봉을 집어 들어 번들거리는 황 사장의 머리통을 수박을 깨듯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이 넘실거렸던 것이다. 예사롭지 않은 정우 씨의 태도에 황 사장은 움찔하다가 번들거리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도대체 뭐 하고 있냐'라며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정우 씨는 호신봉을 집었다가 깊게 한숨을 쉬고는 그걸 내려놓고 대신 한 쪽에 붙어있는 비상호출 벨을 눌렀다. 잠시 후면 지구대에서 경찰들이 찾아올 것이다. 정우 씨는 천천히 황 사장에게 궁시렁거리지 않고 또박또박 말을 건넸다. 당신, 그냥 두지 않겠다라고. 경찰이 오면 명예훼손과 모욕죄로 고소할 테니 그리 알라고. CCTV에 녹화된 영상이 있고 당신 말은 내가 핸드폰으로 녹음까지 했다고. (물론 두 번째 말은 허풍이었다) 그 말을 들은 황 사장의 머리통이 레드에서 옐로우로 바뀌더니 허겁지겁 담배를 집어 들고 편의점 문을 열고 나가서 건너편 자신의 건물로 도망치고 말았다.
찾아온 경찰들에게 대략의 상황을 설명하고 고소할 수 있냐고 묻자 경찰들은 모텔로 가서 황 사장에게 주의하라고 할 테니 다음에는 꼭 녹음을 하셔서 물증이라도 확보하라고 얘기했다. (정우 씨는 경찰들에게 일은 안 하고 팔자 좋게 처먹는다는 내용을 과장해서 크게 부풀려 얘기하고 자신이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고 진술했는데, 만약에 그가 청력이 온전해서 그 앞에 던졌던 '젊은 놈이'를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그는 비상벨을 누르는 대신 어쩌면 호신봉을 집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것은 황 사장을 위해 매우 다행이라면 다행인 점이다) 편의점 문밖에서 경찰이 돌아가는 것을 본 정우 씨는 담배 하나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인 후 길게 허공에 내뿜었다. 담배 연기 사이로 건너편 모텔 객실 등이 하나 켜져 있는 게 보였다. 어쩌면 아까 그 커플이 지금 열 번째로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문득 정우 씨는 아까 자신이 들은 게 '열 번'이었는지 '여러 번'이었는지 미심쩍은 생각이 들면서 다음 주에는 꼭 시간을 내서 보청기를 사러 나가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