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조가

손톱 소설

by 김쾌대

"여보, 어떤 옷이 더 어울려요?"


얼어붙었던 산천에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꽃망울들이 자태를 뽐내기 시작하는 봄이다. 고향 남도에는 매화가 언뜻번뜻 지나간 자리에 반가운 산수유 환하게 피고 서러운 동백은 뚝뚝 떨어지고 있을 것이다, 라고 재학 씨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중이었다. 분당의 중앙공원 근처에 자리 잡은 브랜드 아파트 401호 거실에서 올해 여든 네 살의 재학 씨는 지금 먹과 벼루를 옆에 두고 붓글씨를 쓰는 데 여념이 없다. 묵향 가득한 공간으로 따사롭고 평화로운 아침 햇살이 향기에 묻어 집 안 구석구석으로 침투하고 있다. 아침밥 설거지를 마치고 안방에 들어가서 곱게 단장한 뒤 지금 양손에 각각 옷 한 벌씩을 들고 거실로 나오며 재학 씨에게 물어보는 사람은 그의 마나님이 되시는 동갑내기 박정숙 여사이다. 인근 출석 교회에서 오전 10시부터 시작하는 여전도회 모임에 어떤 옷을 입고 갈지 부군에게 묻기 위해 나왔는데 재학 씨는 한지 위에서 천천히 꿈틀대는 붓의 움직임에 집중하느라 곧바로 응대하지 못하고 있다. 정숙 씨는 속이 탄다.


1940년 음력 7월 생인 정숙 씨는 살아오면서 자주 애를 태우고 살았는데 가정 형편이 박복해서가 아니라 타고난 성격이 급하기 때문이었다. 집 안으로 치자면 오히려 일제 치하에서 광산을 할 정도로 유복했으니 얼핏 뭐 하나 아쉬운 것 없는 환경이었는데, 친정어머니는 태중에 좋다는 보약이며 약초를 너무 많이 먹어서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어린 정숙 씨에게 종종 푸념하는 조로 얘기하곤 했다. 그래서 지역에서 유일하게 고려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에 합격하여 플래카드까지 걸렸던 신랑 이재학 씨는 신혼 초기에 신부가 방안 가구들의 배치를 바꾸기 위해 혼자 분주하게 밤새도록 끙끙거리는 행태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첫 단추부터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던 재학 씨였지만 중도에 갈라서는 파국까지 면하게 된 것은 부유한 처가의 아낌없는 학비와 유학 경비 등의 물질적 지원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재학 씨가 무던하게 삶을 지속한 데에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재학 씨가 대학에 입학한 이듬해 4·19 혁명이 일어났는데 하루 전날인 4월 18일에 모교 학생들과 거리로 나섰던 그는 청계4가에서 정치 깡패들에게 습격당하여 부상을 당했다. 이로 인해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분노로 혁명당일 10만 명이 운집한 도심에서 경무대로 향하던 도중에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하는 현장에서 같은 대학생들이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목격했다. 분노는 공포로 바뀌었고 오후 3시에 발령된 계엄령 이후 시위대가 자신의 모교인 고려대학교에서 자정 무렵 해산할 때까지 그는 자신의 하숙방으로 도망쳐서 벌벌 떨며 방 안에서 보냈다. 이후 약간의 실어증까지 찾아와서 학교를 휴학하고 고향에 내려간 재학 씨는 그의 사연을 듣고 지역의 인재를 보살펴야 한다는 지역 유지, 박흥배 씨(후에 장인이 되었다)의 지원과 보살핌으로 일상에 복귀하게 되었다. 혼례를 올리던 날 동네 사람들은 모두 신붓집인 밀양 박씨댁의 은공을 칭송했고 재학 씨는 복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그리고 이후 미국에 유학하여 박사 학위를 따고 귀국해서 모 대학의 교수로 임용된 이후에도 현실 정치 참여에는 눈길조차 돌리지 않고 살았다. 그에게는 상아탑에서 진리를 탐구하고 학생을 교육하는 일이야말로 비겁한 자신이 혁명의 희생자들에게 속죄하는 일이라고 여기며 평생을 자숙하며 지냈다.


그렇게 재학 씨가 목소리를 낮추고 학문에 매진할 때 아내인 정숙 씨는 조용히 내조하는 일을 도맡지는 않았다. 미국 유학 시절에도 한인 교회에 출석하며 활발하게 사교적인 활동을 하던 그녀는 남편이 서울에 있는 대학교의 교수로 임용되어 한국에 귀국할 때 미국에서 사귄 고국의 유력한 고위층 지인들한테서 미리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이제 막 개발이 되기 시작하는 서울 강남 쪽에 집을 마련했다. 정서적으로는 불안한 편이었지만 지능에 있어서는 총명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일찍부터 깨우쳤던 그녀는 친정아버지가 광산을 말아 먹으며 화병으로 돌아가셨을 때도 집 안의 숨은 재산을 지켜냈고 그걸 밑천으로 강남 복부인 열풍에 한몫을 담당하며 무서운 속도로 재산을 불려 나갔다. 환갑을 지나면서 이남 일녀인 자녀들의 혼사를 치르던 시기에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하여 친정의 친일 행적 여부가 불거지고 이로 인해 재학 씨가 몸담고 있던 대학에서 불명예스럽게 퇴임하게 되었을 때도 그녀는 늘 주눅이 들어 눈치를 살피는 며느리들을 불러서 진상이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아버지의 진흙탕 싸움을 싫어하시는 성품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남편 역성을 들어가며 손주들의 학비로 보태라고 거액의 장학금도 전달했다. (물론 자신이 며느리들을 들들 볶아대는 것 이상으로 남편을 잡아먹을 듯 몰아붙인 이야기는 생략했다)


퇴임 이후에 재학 씨는 성균관 산하의 한림원에 드나들었다. 처음에는 집 안에서 잔소리를 그치지 않는 정숙 씨를 피해 시간을 보내려는 방편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한학(漢學)이 주는 매력에 심취하게 되어 학정 계제 2년과 한림 계제 3년 과정을 모두 이수하고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아 교수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 팔순을 앞두고는 주변에서 성균관장으로 추대를 받아 선거에까지 출사표를 던졌으나 상대 후보가 처가의 친일 경력 의혹 등의 비방으로 흑색선전을 하는 바람에 아쉽게도 고배를 마셨다. 대신에 팔순 잔치 때 이제는 모두 외국에 나가서 사는 두 아들 내외와 손주들 그리고 국내에서 정숙 씨에게 붙잡혀 교회에 나가면서 어머니의 온갖 요청에 묵묵히 수발 공양을 마다하지 않는 (자신을 꼭 빼닮은) 딸과 사위의 축하주를 받으며 안분지족을 느꼈던 재학 씨였다. 최근에는 성균관에서도 물러나서 집에서 소일거리로 서예를 하는데 한시(漢詩)와 문인화(文人畫)를 주로 하다가 지겹다 싶으면 오늘처럼 삼국시대의 향가(鄕歌)로 머리를 식히곤 한다. 안방에서 정숙 씨가 나올 때 그는 <황조가>의 마지막 구절인 '수기여귀(뉘와 함께 돌아갈꼬)'의 끝 글자인 '歸'자를 쓰고 있었는데 그런 그의 귓가에 정숙 씨가 재차 하이톤으로 다시 묻는 정숙 씨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 어떤 옷이 더 좋겠냐구요? 마지막 호흡을 다해 마무리를 하고 재학 씨는 고개를 돌려 정숙 씨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왼손에는 연두색, 오른손에는 분홍색 계열의 원피스가 들려있었다. 바야흐로 봄이 시작되었음을 느낄 수 있는 색상들이었다. 재학 씨는 안경을 벗고 슬쩍 바라보고는 만면에 웃음을 띄며 대답을 했다. - 응.


누가 들으면 기가 막힌 대답이었다. 어느 쪽이 좋냐는 which의 물음에 yes가 나오는 건 이만저만한 넌센스가 아닌데 놀랍게도 정숙 씨는 거기에 대해 화를 내지 않고 다시 안방으로 들어갔다. 왜냐하면 그녀도 대답을 듣기 위해 던진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안방이 닫히는 걸 확인한 재학 씨는 거실 창가로 다가가서 밖을 바라보았다. 봄볕이 따사로운데 아파트 건너편 전신주에 암수 서로 정다운 꾀꼬리 대신에 언제부터인가 도심을 점령하기 시작한 까마귀들이 걸치고 앉아있는 게 보였다. ‘저놈들이 싸는 똥은 참새나 까치와 달리 차에 달라붙으면 고약하게 지저분한데...’라고 재학 씨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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