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깡 할머니

손톱소설

by 김쾌대

"이거 변변치 않지만 장례식에 보태줘"


읍내에서 밥집을 하는 엄 씨가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찾아왔다. 나는 어젯밤 기온이 영하 15도 아래로 떨어질 거란 예보를 듣고 푸드뱅크 사무실에서 동파에 대비해 이런저런 조치를 매조지하고 열두 시가 넘어서 집에 돌아와 잠들었는데 내가 잠이 든 사이 안 씨 할머니는 자신의 거처에서 저체온증으로 아침에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다름 아닌 일주일에 한 번씩 반찬을 싸 들고 방문하는 나한테 말이다. 발견 당시 움막과 다름없는 허름한 방 안에, 지난 몇 년 동안 매주 들여다보았기 때문에 마치 내 집처럼 친숙한 그 방에 왜소하고 볼품없는 할머니가 얼어죽은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굳어있었다. 혹시나 잠이 든 건지 확인하려고 몸에 손을 대는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죽었구나….' 할머니가 혼자 지내면서 기초생활 수급 대상자인 걸 잘 알고 있던 나는 면사무소 담당자에게 연락해서 시신을 안치소로 옮기게 했다. 그다음 담당자는 아마 가족관계등록부를 열람해서 관계가 끊어진 가족이 있다면 연락을 취하게 될 것이다. 일정 기간이 지나도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무연고자로 분류된 할머니는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화장처리가 될 것이다. 평소 이웃들과 왕래가 없던 안 씨 할머니를 조문하기 위해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뜻밖에도 엄 씨가 방문해서 놀랐다.


엄 씨를 데리고 밖으로 나와 함께 담배를 피우며 얘기를 듣다가 나는 정말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의 말인즉, 지난 몇 년 동안 안 씨 할머니가 자신의 식당에 지원받은 쌀을 시중의 절반 가격에 팔아왔다는 고백이었다. 쉽게 말해서 쌀로 깡을 한 것이었다. 지자체에서는 기초생활 수급 대상자에게 쌀을 지급하지는 않는다. 무슨 말이냐 하면 문제의 그 쌀을 꼬박꼬박 가져다드린 게 바로 내가 운영하는 푸드뱅크라는 소리이다. 후원자들의 십시일반 도움으로 운영되는 푸드뱅크에서 관내 삼십여 명의 노인들에게 반찬을 매주 무상 보급하는 것은 기본 업무였지만, 20㎏ 쌀 한 가마니를 지원하는 대상자는 전적으로 푸드뱅크의 총괄 책임자인 나의 재량으로 결정했다. 내가 안 씨 할머니를 각별하게 눈여겨보게 된 것은 이유가 있다. 칠 년 전쯤 푸드뱅크에서 처음 부임하고 대상자들의 형편을 살피기 위해 가가호호 방문한 적이 있다. 이전에 활동하던 다른 지역과 다름없이 노인들은 다들 궁색하고 외로운 삶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안 씨 할머니의 첫 만남에서 잊을 수가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때도 오늘처럼 추운 겨울날이었는데 방 안에 들어서니 할머니가 보온 밥솥에 전원을 넣고 (쌀을 담는 용기 부분을 들어 내고) 열선이 지나며 따뜻하게 덥혀진 빈 공간에 손을 넣고 비비고 있었다. 사회복지 활동 이십 년이 넘게 지내며 처음 보는 난방법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 안 씨 할머니의 배경이 궁금해졌다.


고집이 세고 무뚝뚝한 성정이어서 가깝게 지내는 사람도 없기에 나는 매주 반찬을 전해주며 사비를 들여 드링크제며 간식을 함께 전하면서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두 계절이 지날 무렵 할머니는 살갑게 구는 내게 조금씩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젊어서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서 아들 하나를 키우다가 아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자동차 정비공으로 취직을 하면서 재혼을 했다는 것이었다. 재혼한 남편 양반은 공사판에서 일하는 잡부였는데 살림 차린 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현장에서 추락사하며 다시 혼자가 되었다고 했다. 재혼을 하며 호적 정리를 해서 서류상으로는 남남이 된 아들에게 연락할까 했지만, 괜히 짐이 되는 게 싫어서 연락을 끊고 식당 찬모를 전전하다가 늙어서 몸이 성치 않게 되면서 일자리가 끊기고 폐지를 줍는 일을 하며 하루하루 연명한다고 했다. 기초생활 수급자에게 지급되는 생계비 지원만으로는 여름철 폭염의 냉방이나 겨울철 혹한기의 난방이 어렵다는 걸 이해하면서도 나는 솔직히 안 씨 할머니의 지나치게 궁색한 행태가 탐탁지 않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내가 할머니에게 화가 났던 사건이 발생했다. 지역에 있는 대기업 자동차 생산 공장에서 일하는 선배 하나가 사내에서 봉사와 구제를 하는 동호회를 만들었는데 어느 날 내게 도움이 필요한 대상자를 추천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나는 안 씨 할머니가 떠올라서 전기장판이 된다면 하나 부탁한다고 했고 선배는 흔쾌히 승낙했다. 홈쇼핑에서도 많이 팔렸던 전기장판을 마련해서 선배와 동호회 사람들이 할머니를 방문했는데 그녀는 매몰차게 문전 박대를 하며 누가 이런 걸 달라고 했냐며 역정을 냈다는 얘기를 들었다. 엉거주춤 돌아서는 일행에게 할머니는 다음에는 쌀을 가져오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 사건 이후 나는 더 이상 사비를 터는 일은 하지 않았고 그저 할당된 반찬만 빠지지 않고 전하면서 지냈다.


안 씨 할머니의 아들이 찾아온 건 엄 씨가 방문한 다음 날이었다. 기름때 묻은 자동차 정비복을 입고 쭈뼛거리면서 병원 로비로 들어오는 그를 보며 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리던 나는 그를 이끌고 지하 안치실로 데리고 가서 시신을 확인시켜 주었다. 엄마의 얼굴을 확인하고 그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더니 통곡하며 오열했다. 나는 밖으로 나와 자리를 비켜주었다. 한동안 시간이 흐르고 그가 병원 밖 흡연구역에서 기다리는 내게 왔다. 나는 그에게 엄 씨에게서 받은 조의금 봉투를 전했는데 그는 두 손으로 받으며 몸을 굽혀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담배를 한 개비 꺼내서 피우면서 내게 또 놀라운 얘기를 전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어머니가 자신에게 매월 일정 금액의 돈을 부쳐주었다는 말을. 금액을 듣던 나는 직감적으로 그 돈이 안 씨 할머니가 생계비 지원금 대부분과 쌀을 깡해서 마련한 현금과 추운 겨울날 난방도 없이 맨몸으로 떨어가며 버텨서 아낀 전기요금 등이 모인 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들은 내게 자신도 재혼한 얘기와 여자를 잘못 들여서 등골이 파이고 있다는 처지와 이제 어떻게 가정을 이끌어 갈지 막막하다며 울먹였다. 그이를 보내고 나는 할머니가 기거하던 방으로 찾아갔다. 대낮인데도 컴컴한 방은 너무나 단출했다. 한 편에 비닐로 된 가림막이 있어서 들춰보았는데 그 안에서 할머니의 젊은 시절 앨범이나 싸구려 패물, 각종 잡동사니 등과 함께 홈쇼핑에서 광고하던 전기장판(내 선배가 문전 박대를 받으며 놓고 갔던)이 놓여있는 게 보였다. 저걸 켜고 자기만 했어도 죽기까지는 안 했을 거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코에서 뜨거운 바람이 나오면서 눈에서는 더 뜨거운 눈물이 떨어졌다. 나는 죽은 안 씨 할머니가 미웠다. 내가 그녀를 만난 이래 이토록 아프고 시리게 미운 적이 없을 만큼 안 씨 할머니가 미웠다.

매거진의 이전글흑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