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꿈

손톱소설

by 김쾌대

'언제쯤 오는 거야?'


성호 씨는 카톡에서 자신이 한 시간 전에 보낸 메시지를 지은이 아직 확인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살짝 빈정이 상하려는 것을 느꼈다. 만약에 두 사람이 연애 초기의 뜨거운 사이였다면 요즘 통용되는 읽.씹(읽고 대답이 없다는 뜻)에서 차라리 가벼운 밀당의 기운이라도 흘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결혼 30년 차를 바라보는, 닳고 닳아 새로운 흥분이라고는 별로 남은 것이 없는 중년 부부지간이라서 '읽지 않음'은 '읽.씹'보다 더욱 무시를 암시하는 행위로 여겨질 수 있다. 텔레마케팅 회사에서 팀장을 지내는 지은은 오늘 토요일 주말 저녁을 맞아서 모처럼 동창 모임에 참석하여 스트레스를 풀고 있는 중이다. 성호 씨는 핸드폰의 대답 없는 대화창을 들여다본다. 생각이 복잡해서 막히거나 마음이 착잡할 때 그는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습관이 있다. 바닷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 틈만 나면 해변으로 나가서 몇 시간이나 멍하니 바다를 쳐다보며 시간을 보냈던 성호 씨다. 그는 매우 사려 깊은 타입의 남자였다. 대기업 기술 개발팀에서 부서장을 맡고 있는 성호 씨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거실 소파에 앉아서 한 손으로는 TV 전원을 켜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냉장고에서 꺼낸 맥주 한 캔을 따려는 중이었다. 저녁밥을 혼자서 차려 먹고 설거지를 마치고 빨래를 모두 돌려서 널었으며 거실 바닥 청소까지 마친 지금 성호 씨의 마음은 개운하다 못해 후련기까지 하다. 시간은 밤 열한 시를 향해 가고 있는데 잠시 후면 그가 빠지지 않고 챙겨 보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동물의 왕국>이 케이블에서 재방송을 시작할 것이다.


오프닝 나레이션이 흐르면서 성호 씨는 시원하게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이때를 대비해서 아까 집 근처 편의점에서 1+1 할인행사로 걸렸던 마른안주 번들 팩 봉지 중에 하나를 뜯어 내용물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다가 불현듯 아까 설거지를 마치고 음식물 쓰레기와 종량제 쓰레기봉투를 밑에다 가져가서 처리하는 일을 깜빡하고 놓쳤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지금이라도 가져다 버릴까 하다가 이제 막 시작한 프로그램이 끝나면 처리하기로 마음먹는다. 사실 며칠 전에 성호 씨는 지은과 언성까지 높여가며 싸웠는데 문제의 발단은 바로 택배 상자들 때문이었다. 평생 회사 생활을 하느라 집안일은 나 몰라라 하고 살았던 세월이 삼십 년인데 최근에 그는 무지막지하게 쏟아져 나오는 생활 쓰레기에 기겁을 했고 특히 크고 작은 택배 상자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뭐랄까, 마치 낭비의 화신이 싸놓은 배설물처럼 느껴져서 입이 근질거리던 성호 씨였다. 퇴근하는 지은에게 상자들을 가리키며 저기에 담겨 배송된 물건들이 정말 필요한 것들이냐고 살짝 가시 돋친 말을 뱉었다가 가뜩이나 그날 회사에서 진상 고객들로 몸과 마음이 파김치가 된 지은에게 된통 구박을 받아 본전도 못 찾았던 그였다. 신혼 초에는 청순하고 고분고분한 사슴 같았던 아내였는데 언제부터인지 앙칼지고 사나운 고라니처럼 바뀐 현실에 심기가 불편한 성호 씨였지만 그렇다고 사생결단의 자세로 전투를 치르기에는 성호 씨도 지은 씨마냥 변했다. 늙어버린 것이다.


그가 늙어가는데 가속을 붙이는 건 사실 집안일이 아니었다. 성호 씨가 이끄는 부서는 핸드폰 간 네트워크 시스템 구축과 안정화를 담당하고 있는 엔지니어링 개발 파트였는데 근속 30여 년을 하면서 요즘처럼 인력 문제로 골머리를 썩어본 적이 없는 상황이었다. 직급과 직책이 없어진 요즘 조직 체계에서 부서원들은 주기적으로 이직이나 퇴사 문제로 고민들을 했다. 주로 입사 5년 차와 10년 차를 맞이하는 사람들이 두드러지게 몸살을 앓았는데 모두가 평등하게 업무를 분담해서 수평적으로 연계하겠다는 경영지침의 이면에는 예전처럼 수직적인 위계질서가 주는 끈끈한 조직문화는 없어서 다들 모래알처럼 흩어져서 개인적으로 고민하고 결정하는 일이 잦았다. 20세기에 입사해서 조직 생활을 거쳐온 성호 씨는 부서장으로서 거취 문제로 흔들리는 21세기 직원들과 면담도 해보고 회유도 해보고 설득도 해봤지만, 씨알이 먹히지 않았다. 특히 5년 차 아래의 젊은 직원들은 컴퓨터나 핸드폰의 자판을 두드리는 속도가 어마무시하게 빠른 것만큼이나 회사를 그만두는 일도 광속처럼 일사천리였다. 그렇게 자리에 공석이 생기면 떠난 사람이 진행하던 프로젝트 업무를 남은 이들이 나눠서 맡게 되었는데 추가 업무로 볼멘소리를 내는 부서원들을 다독이는 일도 성호 씨가 감당해야 했고 이것 또한 만만치 않은 스트레스였다.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토요일 오전에 사무실로 나와서 부서의 쓰레기통을 비우듯 부서원들 업무의 보완해야 하는 부분을 도맡아 처리하는 날이면 성호 씨는 퇴근 시간을 앞두고 홀로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는 일이 많았다.


요즘처럼 머리가 아플 때 위안이 되는 것이 바로 <동물의 왕국>을 시청하는 일이었다. 바다를 보며 자란 사람에게 열대 초원이나 사바나, 그리고 사막이나 밀림 같은 자연환경은 언제나 신비로운 매력으로 다가온다. 사실 성호 씨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이 목숨을 걸고 쫓고 쫓기는 장면을 연출할 때 묘한 짜릿함을 느끼곤 했다. 바다에 풍랑이 일고 폭풍이 쏟아질 때 그는 바닷속에서 살아가는 물고기들의 움직임을 보지 못했다. 권태로운 가정생활이나 평등해 보이는 회사 조직 행태도 바다를 닮아서 파문이 일어나더라도 서로 물어뜯는 약육강식의 야만적인 모습을 연출하지는 않는다. 그저 바닷속에서 조용히 숨어서 바다가 잔잔해지기를 기다리는 물고기들처럼 다들 평상시로 돌아가기를 숨죽여 기다린다고 성호 씨는 생각하며, 하지만 바닷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모르는 일이라고도 또한 상상하기도 했다. 큰 평수의 브랜드 아파트에 걸맞은 최신형 대형 모니터를 통해 동물의 왕국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운이 좋은 일이었다. 만약에 지은이 외출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녀가 드라마를 시청하는 동안 성호 씨는 자기 방에서 작은 컴퓨터 화면으로 보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맥주를 마신 탓인지 소변이 마려워진 성호 씨는 화장실로 가서 변기에 쭈그려 앉았다. 도시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21세기의 문명인 남자들은 대부분 앉아서 소변을 보는데 성호 씨는 자신이 회사에 입사했던 초반에 부서의 직속상관이었던 허 과장이 떠올랐다. 신입 사원인 자신에게 여름날 '성호 씨, 개혀?'라고 물어본 뒤 계곡으로 데려가 그 비싼 배받이 수육과 전골을 사주었던 그는 IMF 이후 구조 조정을 담당하는 책임자로 직책을 맡은 후 부하 직원들을 보호하겠다며 자신이 회사를 그만두는 편이 차라리 속이 편하겠다고 선언한 후 퇴직한 뒤 현재까지 연락이 끊어진 사람이었다. 복날 보신탕에 술을 거하게 나눠 먹은 두 사람은 별이 총총하게 빛나는 밤에 계곡물 앞에 서서 나란히 오줌발을 갈겨대기도 했다. 모두 20세기 후반에 일어났던 까마득한 예전의 일이었다.


프로그램이 거의 끝나갈 무렵, 성호 씨는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토요일인 오늘도 아침부터 오후까지 사무실에서 일을 처리하고 와서 피곤함이 밀려든 모양이었다. 그는 꿈을 꾸기 시작했는데 자신이 어느 동물원을 걷고 있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 있어서 그리로 가보니 사자 우리 앞이었는데 갈기가 멋있게 난 숫사자가 자리에 앉아서 탐스러워 보이는 고깃덩이를 뜯어 먹고 있었다. 그러다가 사자는 갑자기 일어서더니 어슬렁거리며 한편으로 이동했는데 거기에 놀랍게도 양변기가 놓여 있었고 더욱 놀랍게도 사자가 그 위에 사람처럼 걸터앉았다. 성호 씨는 눈을 의심하며 살피다가 속에서 뭔가 느꺼운 감정이 솟아나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너는 그러면 안 돼. 바보 같은 놈아, 너는 사자란 말이야!'라는 말이 목구멍으로 넘어왔고 성호 씨는 무모하게도 울타리를 넘어서 사자 우리 안으로 몸을 던져 들어갔다. 사자에게 직접 말을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는데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난리가 났다. 그리고 바로 옆 원숭이 우리의 나무 위에 모여 있던 원숭이들은 성호 씨를 향해서 뭔가를 던져대기 시작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택배 상자들이었고 그들의 얼굴은 최근에 회사를 그만둔 사원들의 모습이었다. 이런 아수라장에도 개의치 않고 성호 씨는 마침내 변기 위에 앉아 있는 사자 앞에 섰다. 그리고 그 녀석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데 눈동자가 있어야 자리에 뻥 뚫린 구멍이 나 있고 그 안으로 깊은 암흑이 파도처럼 고요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저쪽 문에서 사파리 복장을 갖춘 동물원 조련사가 나오는데 그이의 얼굴이 지은인 것을 확인한 성호는 '늦으면 늦는다고 연락을 했어야지'라고 소리를 치다가 잠에서 깨었다. TV 모니터 화면에 <동물의 왕국>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면서 배경 화면으로 야생에서 위풍당당한 모습을 자랑하는 진짜 사자의 모습이 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실제 사자의 모습이 분명했지만 그건 그림 속의 떡처럼 어디까지가 실재(實在)인지 의구심이 드는 형상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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