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씨, 미안한데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경기도 양평의 풍경 좋은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어느 기업의 연수원에 5월의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고 있었다. 연수원은 6층짜리였는데 1층에 사무실과 식당이 있고 2층부터 5층까지는 강당과 각종 세미나를 위한 회의실이 배치되어 있으며 맨 위층은 통유리로 둘러싸인 전망 좋은 라운지 카페까지 갖춘 단독 건물이었다. 몇 년 전부터 비트코인 열풍이 불며 거액 투자에 성공하며 급성장한 신생 기업이 이전에 기도원이었던 해당 건물을 인수하여 최신 기법으로 리모델링 공사를 마쳤다고 했다. 오늘은 노동절이라 연수원에는 당직 직원 한 명만이 1층 사무실에서 휴일 근무를 하고 있고, 그의 지시를 받은 진규 씨와 황 씨는 하루 일당 30만 원짜리 외부 유리창 물청소 작업을 하기 위해 아침 8시부터 로프에 매달려서 일하고 있다. 휴일이 끝나고 이틀 뒤에 이곳에서 이백 명도 넘는 직원들이 한데 모여 단합 행사를 치른다고 들었는데 두 사람은 점심시간이 다가오는 지금, 4층 마무리를 하던 중이었고 어제 술을 과하게 마신 황 씨가 배가 아프다며 줄을 내려 지상으로 내려가 버린 것이다.
진규 씨도 따라 내려가서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올까 잠깐 고민하다가 6시에 정시 퇴근을 하기에는 남은 작업량이 빠듯하게 느껴져서 4층까지는 마무리하고 식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혼자 남아 화장실로 간 황 씨를 기다리며 줄을 잡고 롤링을 하며 옆으로 움직였다. 아침에 작업을 개시하며 옥탑에서 줄을 사릴 때부터 오늘 처음 만난 황 씨의 벌건 낯빛을 보며 ‘저 사람 술깨나 마시겠구나’라고 혼자 추측해 본 진규 씨였다. 하지만 능숙하게 매듭을 묶고 주 줄과 보조하는 줄을 ‘앙카’를 통해서 내리는 황 씨를 보며 오늘 파트너 때문에 애먹을 일은 없겠다고 안심했던 진규 씨는 자신도 서둘러 '코브라'라고 불리는 유리창 닦이를 챙겨 ‘똥 판’에 올라탄 뒤 앉아서 밑으로 향했다. 그는 오늘도 무사하게 ‘샤클’(브레이크 부분)이 잘 작동되기를 속으로 기도했다. 맨 위의 카페 통유리를 닦으면서 황 씨는 핸드폰을 꺼내서 트로트 노래들을 크게 들으며 일했는데 진규 씨는 어쩔 수 없이 이어폰을 끼고 라디오를 들었다. 이어폰은 줄 때문에 성가시고 귀찮은데 다혈질로 보이는 황 씨를 자극하기 싫어서 어쩔 수 없이 그래야 했다. 사실 진규 씨도 다부진 몸매를 가졌기 때문에 황 씨에게 밀릴 건 없었지만 라디오에서 나오는 소리는 큰 음악 소리에 묻히면 알아듣기 힘들었다. 라디오가 좋은 건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서 그냥 음악만 듣는 것보다 덜 지루하고 시간도 잘 갔다.
황 씨를 기다리며 진규 씨는 잠깐 핸드폰 속 손녀딸의 사진을 본다. 환하게 미소 지으며 할아버지를 향해 손을 흔드는 손녀는 진규 씨의 고명딸 수민의 무남독녀인데 수민을 생각하면 진규 씨는 한숨부터 나왔다. 진규 씨의 가족 사랑은 각별했는데 그건 진규 씨의 아버지가 일사 후퇴 때 평안남도 맹산에서 피난 열차를 타고 남으로 혈혈단신으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진규 씨의 조부모와 가족들은 전쟁통에 모두 죽었고 천신만고 끝에 김천에서 자리를 잡은 진규 씨의 부친은 고아가 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서 자손을 많이 보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진규 씨와 누이동생 한 명만 세상에 남겼고 진규 씨는 다행히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그는 무뚝뚝한 성격으로 아들 둘은 엄하게 키웠지만 서른 중반에 얻은 수민에게 만큼은 녹을 듯한 감정을 숨길 수가 없어서 속된 말로 물고 빨고 애지중지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민의 결혼식 날, 신부 입장 시간에 딸의 손을 잡고 옆에서 함께 걷던 진규 씨는 신부보다 더 눈물을 쏟아서 나중에 아내에게 핀잔까지 듣고 말았다. 그런 수민이 최근에 찾아와 코로나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엄 서방의 가게가 망했고 많은 빚을 지게 됐으며 집을 날리게 되었다며 울며불며 도와달라고 매달렸다. 평생 유명 브랜드의 복사기 대리점을 운영하며 성실하게 돈을 모아 자식들 공부 다 시키고 이제 은퇴하여 연금 수령을 하는 삶으로 여생을 편하게 보내려고 했던 진규 씨는 자기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수민의 전세 보증금을 만들어 주고 원리금을 갚기 위해 일당이 높은 일자리를 수소문하다가 건물 유리창 닦이 로프공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지금까지 8개월째 일하는 중이다. 진규 씨는 처음 시작하면서 딱 3년만 고생하면 된다고 다짐하며 낯설고 물선 이 바닥에서 하루하루를 악착같이 보내고 있다. 그의 선친은 살아생전에 술만 마시면 처자식을 두들겨 패곤 해서 일찍이 의절하고 가출하여 서울 변두리에 자리를 잡아 조용히 살아왔던 진규 씨였지만 어쩌면 그의 몸속에는 아버지의 강인한 생존 본능의 피가 흐르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 사진을 훑어보고 작업을 시작하려는데 돌연 빗방울이 후두두 안전모를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서 보니 어느새 먹구름이 몰려와 하늘이 어둡기만 하다. 지나가는 소나기라고 생각하며 개의치 않고 유리창을 닦는데 산 위쪽 어딘가에서(아니면 아래쪽에서) 급하게 만들어진 돌풍이 진규 씨가 매달린 지점으로 불면서 줄을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싶었던 진규 씨가 밑으로 내려가려고 샤클을 조작하는데 말을 듣지 않았고 당황한 진규 씨는 보조 줄을 잡고 버티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강한 바람에 널판 위에 걸터앉은 그는 대책 없이 줄이 움직이는 대로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진규 씨의 눈 앞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살아계시는 동안 수도 없이 들었던 피난 열차 창문에 죽기를 각오하고 매달려서 끝내 살았노라는 음성도 들렸다. 그는 줄을 놓치면 안 된다고 되뇌었지만, 비에 젖은 로프는 점점 미끄러워지면서 진규 씨가 움켜잡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땅으로 추락했다. 누워서 올려다보이는 하늘은 야속하게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청명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고 바람에 흔들리는 로프와 깔판이 눈에 들어왔다. 진규 씨는 수민이 어릴 적에 함께 놀았던 놀이터가 떠올랐다. 수민은 유난히 그네를 좋아했고 진규 씨의 팔이 아플 때까지 뒤에서 계속 밀어달라고 떼를 쓰곤 했다. 흐릿하게 좁아지는 시야 사이로 비가 그친 하늘이 높고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