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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쾌대 Oct 31. 2023

이솝 우화: 사람과 여우

독후 단상

"어떤 사람이 자기를 해코지했다는 이유로 여우에게 원한을 품었다. 앙갚음하려고 여우를 붙잡은 그는 기름에 담가두었던 밧줄을 여우 꼬리에 매달고 불을 붙인 다음에 풀어놓았다. 이를 지켜보던 신이 그 여우를 꽁지에 불을 붙인 사람의 밭으로 안내했다. 마침 수확기여서 밭에는 다 여문 농작물이 가득했다. 그는 울면서 여우를 뒤쫓아갔지만 아무것도 거두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여우에게 원한을 품었고 그 이유는 여우가 그에게 해코지를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우가 과연 어떤 해를 입혔는지를 궁금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 이야기에 나타나는 중요한 사실은 피해를 본 사람이 여우에게 직접적으로 응징을 했다는 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인류 최초로 민주주의 제도가 확립되어 실행되기 이전에 모든 범죄의 판결 및 형벌의 집행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사법권의 최고 자리에는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나 노예를 거느린 귀족이나 심지어 자녀를 둔 아버지와 같은 권위자가 있었다. 법률 시스템이 아니라 개인이 나름의 판단 기준으로 결정을 했기 때문에 임의적이고 때로는 편파적일 수도 있었고, 이 말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 얼마든지 휘둘리는 사례가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솝이 활동하던 B.C 6세기의 고대 그리스는 아직 민주주의 제도를 완성하기 이전의 시기였기에 어떤 사람이 여우에게 직접적인 보복을 하는 일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성을 갖추지 못한 개인은 탐욕에 있어서 멈출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혀 질주하는 것처럼, 복수에 있어서도 얼마든지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난도질을 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여우를 사로잡은 어떤 사람은 단번에 목을 베어버리는 대신에 여우가 오랫동안 고통을 느끼며 죽어가는 방식을 선택했다. 여우가 도대체 어떤 잘못을 이전에 저질렀는지 모르겠지만, 여우는 언뜻 가혹해 보이는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앙갚음의 희생제물이 된 듯 보인다. 나는 여기서 고대 그리스보다 1,000년도 더 이전에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제정되었던 <함무라비 법전>을 떠올리게 된다. 그 유명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대표 정신으로 압축될 수 있는 이 법전의 특징은 피해를 당한 당사자가 가해자에게 형벌을 가할 때 감정에 휘말려 과하게(부당하게) 보복하지 말라는 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눈을 뽑혔다고 해서 상대방의 눈도 뽑고, 귀도 자르고, 분기를 다스리지 못해서 팔다리도 날려버리고 그도 성에 안 차서 심장까지 도려내며 무참히 짓밟지 말라는 준령이다. (이를 동해보복법 同害報復法이라고 한다) 현재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의 분쟁을 지켜보며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관용은 고사하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냉정함이라도 지켜지고 있는지 깊은 탄식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한 가지 더, 앙갚음이란 말이 까슬하게 걸린다. 예문에 보면 '원한'이란 말과 함께 나오는데, 사안의 성격이나 양상을 보면 원한보다는 앙갚음이란 말이 더 적절한 사이즈의 복수심을 담고 있어 보인다. 앙갚음을 하게 만드는 마음 상태는 '앙심'(怏心)이다. '怏'(원망할 앙) 한자가 참 재미있다. 심방 변(忄)에 가운데 앙(央)이 결합된 글자인데 결국 '자신을 스스로 중앙에 놓는 마음'이라고 풀이할 수 있겠다. 지동설이 나오기 이전, 인류는 지구(나)를 중심으로 천체가 돌아간다고 여겼다. 어리석음의 소치였다. 과학이 발전하여 무지에서 벗어난 현재에도 심리적/정신적으로 자신을 세상의 중심이라 여기고 타인이나 환경을 자기 뜻에 굴복시켜 예속하려는 족속들이 끈질기게 적자 생존하며 지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국가 최고 원수인 대통령이, 사회지도층이라 불리는 엘리트 집단들이, 한 집안의 가장(家長)이라 불리는 어른들이 아직도 고대 그리스나 바빌로니아의 그들처럼 원시적이고 미개한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버젓이 고개를 들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코페르니쿠스적인 사고의 전환과 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나는 해답을 또 다른 '앙'에서 찾아보기를 권하고 싶다. '仰'(우러를 앙)이란 글자에 담긴 뜻으로 말이다. 어느 드라마에서 나온 '추앙'이란 대사로 유명해진 이 '仰'의 어원을 살펴보면 人(사람 인)자와 卬(나 앙)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卬자는 서 있는 사람과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을 함께 그린 것으로 누군가를 경배하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타인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자세는 비굴함으로 간이며 쓸개를 다 내주는 그런 얄팍함이 아니다. 경천애인(敬天愛人)이든 역지사지(易地思之)이든 마음을 바로잡을 수만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을 것이다. 자기가 평생을 걸쳐 소중하게 가꾸고 일궈온 추수 밭(인생)을 한순간 화재와 화마로 다 잃고 망연자실하게 지켜보지 않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글자가 살아남아 후대에 전해진다는 것은 거기에 담긴 뜻이 죽지 않고 현재에도 의미를 발생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어쩌면 고대의 철학자 이솝은 오늘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대는 怏의 족속이 될 것인가, 아니면 仰의 족속이 될 것인가?'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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