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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쾌대 Feb 23. 2024

멸치와 고추장

오늘 일지

어제는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는 독서 모임에 참석했다. 주로 정치 분야의 사회과학 도서를 누군가가 발제하여 발표하면 이후 참석자들이 자유 토론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성격의 모임인데, 정치에 담을 쌓고 청장년을 보낸 나로서는 문학 모임과 다르게 분위기도 낯설고 모르는 내용도 많아서 부담 없이 참여하기보다는 주저함이 앞서는 곳이기도 하다. 작년 여름이었던가, 지인 초청으로 처음 방문하여 시간을 보내고 끝날 즈음에 '앞으로 이곳에 계속 나오기는 어렵겠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뒤풀이에서 생각이 바뀌고 말았다.


모임 장소가 그 모임의 총무로 계시는 분이 운영하시는 (종로의) 작은 문화 공간이었는데 평소에는 음식을 파는 식당도 겸하고 계셨기에 다른 장소로 이동하지 않고 곧바로 그곳에서 준비하신 음식들이 나오고 술잔이 돌았다. 단돈 2만 원에 여수 출신 주인장의 손맛이 밴 홍어 삼합이며 미나리 듬뿍 들어간 홍어애탕이며 각종 맛깔스러운 나물 찬들이 이모카세 스타일로 정갈스럽게 나오는데 평소 술을 입에 대지 않는 내가 그날 막걸리를 몇 순배나 들이켰는지 모른다. 나는 그날 이후 다음 모임을 기다리며 열심히 참석하였고 올해는 어쩌다가 모임의 총무직까지 맡게 되었으니 생각해 보면 이 또한 책이 맺어준 기이한 인연이 아닐까 싶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더해 육신의 만찬까지 더해지니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


어제저녁에도 <듣도 보도 못한 정치>(이진순, 와글/문학동네. 2016)라는 교재로 좋은 강연을 듣고 자연산 일곱 가지 나물이 들어간 비빔밥과 봄 내음 물씬 풍기는 된장국으로 애찬을 나누며 막걸리를 마셨다. 식사가 끝나고 나온 안줏거리는 생각지도 못했던 남해 바닷가에서 올라온 마른 멸치! 주인장께서는 며칠 전 손님으로 여기와서 음식 맛보신 지인께서 댁으로 내려가신 후에 국 끓이는데 넣으라고 친히 두 박스나 사서 택배로 보내주셨노라고 자랑삼아 얘기하셨다. 대가리 잘라내고 뱃속 똥 빼서 고추장에 찍어 먹는데 누군가 한마디 하셨다. '마른 멸치는 아무리 많이 먹더라도 칼슘 성분이 몸으로 흡수되기 어려운데 비타민C와 만나면 체내 흡수율이 높아질 수 있고, 고추장에는 비타민C가 풍부해서 함께 먹는 것이다'라고.


아... 그렇게 깊은 과학적인 이유가 숨어 있었다니! 예전 같으면 술자리 한담으로 무심코 흘려넘길 내용이었는데 오늘 아침 문득 사실 여부가 궁금해져서 인공지능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내가 뭐 그다지 호기심이 출중하여 탐구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은 아니지만, 일전에 뵀던 방송사 출신 선배님께서 요즘 기자들이 '질문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아서, 그냥 어디에선가 주워 온 얘기로 기사를 무책임하게 남발하기 때문에' 나라가 개판이 되고 있다는 토로를 하셨던 일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구글이나 네이버의 검색으로는 '고추장이 마른 멸치의 칼슘 흡수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지'를 물어보고 관련 내용을 찾아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는 데 비해, 챗 GPT는 다이렉트로 직접 물어보면 즉답을 얻을 수 있는 점이 사람의 마음을 뺏는다. 질문에 대한 답변은 명료하게 정리되어 눈 앞에 펼쳐졌다. 결론적으로 그렇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은유를 사유하기 시작한다.


'내 글이, 내 재능이 칼슘처럼 아무리 영양가가 높고 유익하더라도, 비타민C를 듬뿍 포함하고 있는 고추장과 같은 독자나 조력자를 만나지 못하면 결국 피와 살이 되지 못하고 똥으로 배출되고 말겠구나...'


그러다가 사유가 한 단계 깊이 내려간다.


'평생을 스스로 멸치라고 생각하며 지내다가 대가리 잘리고 내장 파여서 우습게 됐잖아. 이제 나이 들어 철이 들었다면 누군가를 위한 고추장이 될 마음가짐으로 익어가는 삶을 살도록 하여라...'


사유는 다짐으로 이어진다.


깊고 웅숭깊은 사람이 되고 싶다.

앙상하게 말라비틀어진 자가 아니라 발효가 주는 '속 깊음'으로 비타민 같은 활력을 지닌 고추장처럼, 때맞춰 나오는 봄나물처럼 그렇게 품 넓고 반가운 사람이 되고 싶다.


또한 질문하며 의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대가리는 텅 비고 오장육부는 똥덩어리로 채워져 쓰레기 기사를 퍼질러대는 기레기보다 의식 있고, 질문을 스스로 하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답변을 내뱉는(그것이 아무리 탁월하고 훌륭하더라도) 인공지능의 공허한 화려함보다 단단하고 옹골찬 뼈대를 지니며 하루라도 살아가고 싶다.


작년부터 인연을 맺은 모임에 그런 분들이 많이 계신 듯하여 참으로 반갑고 소중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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