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독후감상

[독후감상] 삶의 한가운데(1)_루이제 린저 (민음

책을 읽고

by 김쾌대

묵직한 소설이었다. 주인공인 니나의 심경과 삶의 궤적이 간단하지 않았다는데 첫 번째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녀의 주변에서 떠나지 못하는 20년 연상의 의사인 슈타인 박사가 니나에게 발송한 소포 속의 일기들이 중간중간에 삽입된 소설의 형식이 독자에게 익숙한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먼저 니나를 살펴보자.


니나는 세상에서 약간은 독특한 자기 인식을 지닌 여성이다.


"내가 어떤 살갗 속에 갇혀 있는 꿈이었어요. 매우 투명한 살갗이었어요…. 이 얇은 살갗이 너를 갈라놓고 있는 거야…. 저 밖에 어떤 것이 있었어요. 자유, 평화, 예지 그리고... 아, 그다음은 모르겠어요." (p.248)


그녀는 자신의 꿈을 통해 스스로를 자궁 속에 갇힌 태아처럼 어떤 살갗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모습으로 고백한다. 연약한 존재이자 아직 자립하지 못한 미숙아이며 동시에 번데기 속의 애벌레처럼 언젠가는 탈피를 통해 나비와도 같은 존재로 비상할 수도 있는 그런 상태이다. 그녀는 슈타인 박사를 처음 만났을 때 이제 막 젊음이 피어나는 열아홉 살이었고 심리 상담을 받기 위해 슈타인 박사의 진료실을 찾았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서 슈타인 박사에게 자기의 목을 누르는 듯한 공포에 관해 편지를 썼다. 내용인즉, '내가 인생에서 아무것도, 어떤 의미 있는 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 내 인생은 그냥 사라지고 있으며 나는 살지 않았다는 불안감, 나는 실수를 저질렀으며 영원히 내 인생은 작은 궤적 속에서 움직일 뿐이라는 불안감들입니다.'라고 말이다. 그녀는 남들과 달리 자기 삶에 대하여 그리고 자기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 대하여 지나치게 민감하며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는 성격의 소유자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존재론적인 질문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중단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산다는 것은 그 무렵의 나에게는 아는 것, 무섭게 많이 아는 것, 생각하는 것, 모든 것을 파고드는 것을 의미했어. 그밖에는 없었어." (p.55)

"그러나 이런 하나뿐인 궤도의 삶으로는 발전할 수가 없어. 이제 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어린아이들도 가끔 그렇게 해야만 해. 그것을 허락해야만 해. 아이들의 거짓말은 아무나 호기심을 가지고 건드리고 파괴하지 못하도록 아이들이 그들의 삶 위에 펼쳐 놓은 베일이야." (p.65)

"우울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어. 니나는 천천히 말했다. 온갖 아름다움이란 것이 일시적이고 다만 얼마 동안 빌려온 것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 그리고 우리가 인간들 틈이나 나무와 극장과 신문 사이에 있으면서도 마치 차가운 달 표면에 앉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독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은 누구나 우울하지…. 우울은 인식의 시작일 뿐이야…. 정말로 우울이 깃든 눈에는 활기, 집중, 분주함 같은 것들이 있지. 그러나 이것은 무대의 막일 뿐이야. 그 뒤에 무대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해." (p.70~71)


니나는 자기 내면에서 올라오는 질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 무섭게 파고들었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기 삶의 이유에 대한 해답을 얻은 듯 행동하고 있지만 실은 거짓말을 하고 있으며, 그것이 누구를 속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며, 마침내 삶의 무대에 드리워진 하나의 막_어느새 세상에 있는 아름다움이 일시적이며 인간은 필연적으로 고독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우울한 본심(무대 중앙)을 가리기 위해 쳐놓은 커튼이 사방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한 깨달음을 얻고 그녀는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데 작가로서의 통찰력을 얻었다는 징조라고 보여진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는 고양이 발걸음처럼 사는 법을 배우게 되지. 점점 조용하게, 점점 더 절대성은 없어지지. 이것은 또 늙어가기 시작한다는 징조야. 나는 얼른 늙었으면 좋겠어." (p.75)

"나는 아주 잘 정돈되어 있고, 분명하고 깨끗한 경계가 있는, 한결같고 큰 위험도 없는 단순한 생활을 원하고 있어. 이제 언니는 나를 비웃기 시작하는군... 그렇지만 언니 말이 맞아. 나는 다르게 살고 싶지 않아. 다른 사람과 내 생을 바꾸고 싶지 않아." (p.131)

"... 생은 계속 흘러가는 거야. 모든 것은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고 아무 논리도 없으며, 모든 것은 즉흥적으로 생성되고 있어.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서 한 조각을 끌어내서는, 현실에는 없고 삶의 복잡함에 비하면 우스울 뿐인, 작고 깔끔한 설계에 따라 그것을 건축하고 있어. 모두가 꾸민 사진에 지나지 않아. 내 소설도 마찬가지야." (p.164)

"우리는 영웅이 아니야. 가끔 그럴 뿐이야. 우리 모두는 약간은 비겁하고 계산적이고 이기적이지. 위대함과는 거리가 멀어. 내가 그리고 싶은 게 바로 이거야….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도 그것을 간단하게 만들려는 게 나는 싫어." (p.166)


글을 쓰면서 그녀는 구원을 얻었을까? 유감스럽게도 소설에서는 그녀가 삶이 주는 의미에 대하여 명쾌한 해답을 찾았다고 밝히지는 않고 있다. 오히려 일종의 체념이나 단념이나 허무주의와 같은 심정이 담긴 내면의 독백을 소설 속 언니(마르그레트)에게 털어놓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기가 그토록 염증을 느끼고 숨이 막힐 것 같이 목을 졸라대는 세상의 <위선>에 맞서 연약하지만 타협하며 굴복하지 않는 <저항>하는 인간으로서 독자들에게 감동을 안겨 준다. 그것은 세간에서 통용되는 구원에 관한 싸구려 미봉책과 같은 처방과는 질적으로 다른 무게감으로 뻐근하게 다가온다. 특히 니나가 여성이고 작가인 루이제 린저도 여성이어서, 평소 세상의 위선과 폭력 등에 노출되어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그 부당함을 느끼는 여성 독자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들은 어느 순간 본능적으로 자기들의 저항이 불가항력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며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르겠어? 니나는 묻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벌써 오래전에 단념해 버렸어. 노력은 했어. 그러나 항상 나를 내모는 것이 있었어…. 마치 담벼락을 계속해서 미끄러지는 개처럼, 발톱 상하고 앞발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계속해서 시도하는 개처럼…. 너는 해야만 하는 일을 이루지 못하고 죽을 거야….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것,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다는 것, 그리고 이런 것에 대한 슬픔. 완전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망. 철저하게 순수한 절망도 없으며 값싼 혼합물, 값싼 혼합물만 있을 뿐이라는 생각…. 울어도 소용없고, 저항해도 소용없어. 나는 끌려가는 거야." (p227~228)

"만약 어떤 사람이 인생의 의미에 대해 묻는다면 그는 그 의미를 결코 알게 되지 못할 거예요. 그것을 묻지 않는 자만이 해답을 알아요. (p.29) ... 우리는 생의 의미를 알려고 했어요. 그래서는 안 되는 거죠. 만약 의미를 묻게 되면 그 의미는 결코 체험할 수 없게 돼요. 의미에 대해 묻지 않는 자만이 그 의미가 뭔지 알아요. (p.351)"


많은 여성들이 어른이 되어가면서 어딘가에 소속되고, 거기에서 인정을 받으며 자기 삶이 행복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나는 소설 속 언니인 마르그레트의 입을 빌어 작가인 루이제 린저가 통렬하고 간곡하게 여성들이 자기 처지에 대해 각성하고 자기가 타협하고 지내는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를 바란다는 행간 속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은 남자인 나에게 처음에는 낯설게 다가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니나라는 여성에 대해 새롭게 관찰하고 사유하게 만든 텍스트였다고 고백하고 싶다.


"그때 물론 나는 이것이 '행복'일까 하고 자문했다. 그러나 나는 불행하지 않았고, 삶에 대해 지나친 요구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행복하다고 나 자신과 타협할 수 있었다. 사랑이란 누군가에게 속해 있다는 감정이야. 오로지, 그리고 철저하게 말이야." (p.40)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우는 것이 슈타인의 지난 고통과 니나의 엄청난 이별 때문만이 아니라, 나 때문에 그리고 축축하고 촘촘한 회색빛 그물에 얽혀 있듯 자신의 운명에 얽혀 있는 인간들 때문에 우는 것이라는 것을." (p.406)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독후감상] 삶의 한가운데(2)_루이제 린저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