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한강은 인간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부조리와 그걸 감내해야 하는 고통에 관해 이야기하는 작가이다. 바쁘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일반인들이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 고개를 돌리고 싶을 때, 그녀는 자신이 겪거나 느낀 내용들로 이야기를 만들어 전하며 독자들에게 정신적 환기를 시켜준다. 각자의 내면에서 올라오는 질문을 맞닥뜨리게 만든다는 말이다. 소설 <희랍어 시간>에서도 우리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된다.
1. 성립 불가능한 오류
책을 읽다 보면 '성립 불가능한 오류'라는 말이 나온다. 소설 속에서 이 표현은 남성 주인공과 그의 첫사랑 사이의 대화에서 나오는데, 남자는 기독교의 신을 믿는 첫사랑에게 "선하고 전능한 신이란 성립 불가능한 오류"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첫사랑은 "그렇다면 나의 신은 선하고 슬퍼하는 신이야. 그런 바보 같은 논증 따위에 매력을 느낀다면, 어느 날 갑자기 너 자신이 성립 불가능한 오류가 되어버리고 말걸."이라고 답한다.(43쪽) 나는 여기서 "성립 불가능한 오류"는 단순히 논리적인 오류를 넘어서, 존재 자체의 모순과 한계를 지칭하는 복합적인 의미가 있으며, 나는 그 말이 작가가 이 책에서 얘기하려는 인간이란 존재의 근원적인 고통을 표현하는 가장 적확한 용어라고 느꼈다.
주인공인 여자에게 존재 자체의 모순은 소통의 불가능성으로 치환할 수 있다. 언어 감각이 남다르게 뛰어났던 여자는 역설적으로 언어가 지닌 한계를 누구보다 더 예민하게 포착하였고,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소통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지니게 된다. 어느 날 느닷없이 말을 잃게 된 여자는, 자신이 태생적으로 환영받지 못했다는 트라우마 속으로 깊이 침잠하며, 라틴어를 배우기로 한다. 그리고 처음에는 몰랐지만, 라틴어가 그녀에게 어쩌면 언어를 회복하게 하고 구원을 이루게 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라틴어는 '다른 어떤 단어와도 결합되어 구사되기를 기다리지 않는, 극도로 자족적인 언어'(21쪽)였기에 그녀가 스스로 완전무결하게 된다면 타인과의 소통 없이도 자족할 수 있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그녀는 이의 극복을 위해 상대방을 바라보는 일과 홀로 걷는 일에 집중하게 된다. 나는 그녀가 언어를 넘어서서 그 너머의 무엇인가에 기대어 관계에서 버려지고 찢겨진 상처를 치유하고 싶다는 행위로 이해했다.
한편 남자의 경우 존재가 주는 한계 상황은 보다 사변적이고 철학적으로 보인다. 논리나 이성으로 도달하는 절대적인 이데아는 시력을 상실하고 있는 그에게 사유할 수는 있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상향으로 다가온다. 그가 절대 선(善)의 존재를 선뜻 용납하지 못하는 이유는, 첫사랑에 실패한 그의 아픈 마음이나 가장 아끼는 친구의 죽음 앞에서 무력한 존재라면 그런 神에게 구원을 바랄 수는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불가항력적으로 자신의 운명에 들이닥친 실명(失明) 앞에서 그는 체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자기 내면에서 올라오는 '죽음과 소멸의 이데아'를 향한 생각의 단초를 지울 수는 없다. 빛이 아니라 어둠에도 이데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믿음 말이다. (여기서 문득 동양의 음양 사상이 떠올랐다.) 그런 그에게 위로가 되는 대상이 있다면 불교의 금강경과 유사한 '세상은 환이고 산다는 것은 꿈꾸는 것이다'라는 보르헤스의 문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뒤에 '그러나 피가 흐르고 눈물이 솟는다'라고 나직이 되뇌곤 한다.(71쪽) 나는 여기서 남자가 사유를 넘어선 생생한 실재로서의 존재론을 완성하고 싶어 한다고 이해했다.
결국 작가는 인간이 처한 근원적인 고통과 한계 상황을 '언어'와 '사유'를 통해 이루려는 모습을 두 주인공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언어와 사유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불완전한 인간이 만든 피조물(언어와 사유)이 자체 모순을 이겨내고 완전한 상태인 구원(혹은 이데아)에 도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때 완전무결한 언어였을지는 몰라도 지금은 사용하지 못하는 사어(死語)가 된 희랍어가 지닌 상징성을 여기에서 이해하게 된다. 그렇다면 작가는 인간이 구원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라고 전하고 있을까?
2. 이타적인 사랑, 화엄의 세계
여주인공은 계단에서 실족하여 바닥으로 떨어진 남자를 구해주고 그의 집에까지 데려가 보살펴 준다. 남자주인공은 어릴 적 사찰에서 본 연등회의 추억을 잊지 못하며 다시 그곳을 찾기도 한다. 기독교에서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도 떠오르고, 불교 화엄경에서 얘기하는 '인드라망'이 생각나기도 한다. 종교가 과연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 작가는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주인공들에게는 몸에 상흔이 있다. 여자의 손목에는 물린 자국이 있고, 남자에게는 얼굴에 흉터가 남아있다. 이 상처를 준 대상은 여자에게는 죽어가던 백구였고, 남자에게는 짝사랑했던 안과의사의 딸이었다. 선량한 의도로 상대에게 호의나 애정을 베풀다가 지워지지 않는 상흔을 얻게 된 두 사람이 느꼈을 삶의 모순은 다른 의미에서 또 다른 “성립 불가능한 오류”와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소설의 첫 문장이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라는 보르헤스의 묘비명이 언급되고, 후반부에는 남자가 꾸는 꿈속에서 '캄캄한 칼집 속에 빛나는 칼. 오래 숨을 참으며 기다리는,'이라는 싯구로 칼이 다시 등장한다. 이처럼 서늘한 느낌의 칼이 주는 메타포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인 “맞닿은 심장들, 맞닿은 입술들이 영원히 어긋난다.”라는 결말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3. 열린 결말
작가는 독자들에게 묻는다.
'가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우리 몸에 눈꺼풀과 입술이 있다는 건.
그것들이 때로 밖에서 닫히거나,
안에서부터 단단히 걸어잠길 수 있다는 건.'(161쪽)
과연 사랑이 인간으로 하여금 각자의 트라우마와 체념을 이겨내고 세상에서 분리된 존재로서의 한계를 초월하여 다시 온전히 소통하며 화엄의 대승(大乘) 세상을 이룰 수 있을까? 그건 사람마다 모두 다를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챕터는 '22'가 아니라 '0'으로 끝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