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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후감상

[독후감상] 디어 라이프_앨리스 먼로 (문학동네, 20

책을 읽고

by 김쾌대

0. 들어가며


캐나다 출신의 작가이자 201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앨리스 먼로의 단편 소설집인 <디어 라이프>를 읽었다. 출판사 서평이나 국내 유명 소설가들의 추천사에 작가는 "현대 단편소설의 거장"이라든가 "우리 시대의 체호프" 등으로 소개되고 있었고, 도대체 어떤 작품 세계이기에 그런 극찬이 쏟아지는지 궁금한 마음으로 책장을 열었다. 총 14편의 단편 중에 6편을 선별하여 읽고 그 소감을 여기에 밝히려고 한다.


1. 일본에 가 닿기를

여성의 목소리가 용인되기 힘들었던 1950년대, 캐나다 밴쿠버에 거주하는 여류시인 그레타는 남편 피터 사이에 딸 케이티를 두고 가정을 꾸리며 지내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해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그녀의 내면에는 이런저런 고민이 많다. 뒷짐을 지고 관대하게 바라봐주는 남편은 적극적으로 관습을 타파하려는 의지가 부족하고, 그녀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잡지사의 파티에 초대된 날에는 잘 나가는 상류 계층의 하객들로부터 일종의 무시를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우연한 기회에 남편의 장기 출장을 계기로 토론토에 장기 체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고, 그녀는 토론토에 가면 파티장에서 자기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남자를 다시 재회할 생각에 설레는 마음이 든다. 토론토로 가는 기차 안에서 처음 만난 또 다른 젊은 남자와 잠깐의 밀회를 즐기다가 딸 케이티가 객실에서 사라지는 사건이 벌어지고, 다시 찾은 딸을 품에 안고 잠깐이나마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2. 아문센


주인공인 비비안은 문학을 사랑하는 교사인데 전쟁통에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외딴곳으로 지원하여 방문하게 된다. 춥고 황량한 그곳은 아문센을 닮았는데, 거기에서 아문센만큼이나 차갑고 쌀쌀한 닥터 폭스를 만난다. 그는 비비안의 고용주이며 외과 의사로서 기숙학교에 있는 교사와 아이들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성격이 강한 캐릭터이다. 가학적인 성향을 지닌 닥터 폭스와 피학적인 태도를 지닌 비비안은 결혼을 약속하며 연애를 이어가고 결혼까지 약속하지만, 결혼식 당일 닥터 포스는 무책임하게 비비안에게 파혼을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파경을 맞이하게 된다.


3. 자갈


소설 속 주인공은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벗어난 엄마와 새 애인이 마련한 트레일러에서 언니 카로와 애견 블리치와 지내던 중, 우연한 사고로 언니 카로가 블리치를 구하려다가 물에 빠져 죽는 사고를 겪게 된다.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도 그녀는 정신상담을 받으며 일종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되는데, 그녀의 애인으로부터 죄의식에 사로잡히지 말고 모든 것을 그냥 받아들이고 가벼워지라는 충고를 듣는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는 언니 카로가 무슨 말이든 들려주기를 바라는 심정이 자리하고 있다.


4. 코리


소아마비를 앓아서 장애를 얻게 된 주인공 코리는 부잣집 외동딸로서 유부남인 하워드와 사랑에 빠지며 밀회를 즐긴다. 그러던 어느 날, 하녀 릴리언에게 둘 사이의 불륜 관계를 들키게 되고 이를 입막음하기 위해 오랜 시간 릴리언에게 돈을 지불하는데 사실은 그 모든 것이 연인이었던 하워드의 속임수임을 알게 되지만 이를 눈감고 지나가기로 결심하게 된다.


5. 기차


주인공인 잭슨은 전쟁터에서 돌아와서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식으로 가는 기차에서 도망치고, 그 이후 오랫동안 함께 지낸 연상의 여인 벨의 죽음을 앞두고도 그녀 곁으로 가지 않고, 또한 예전에 상처를 줬던 약혼녀를 우연히 조우하게 되는데 그녀를 피해 다시 다른 곳으로 떠난다. 마치 끝내지 못한 일을 당장이라도 해치우려는 듯이. 주인공 잭슨의 이러한 끝없는 벗어남(도망치기)을 읽는 독자들은 그가 어릴 적 계모에게 성적 학대를 당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지 않은지 추측하기도 하는데, 소설 속에서는 결정적인 이유가 나타나지는 않고 있다. 참고로 동거했던 여인 벨도 어릴 적 친부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아픈 과거가 있음이 소설 속에 나타나 있기도 하다.


6. 디어 라이프


표제작이기도 한 이 단편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먼로는 어릴 적 자기를 체벌하며 폭력을 가했던 아버지와도, 그리고 아버지에게 순응하며 딸의 반항을 일러바쳐서 그런 폭행을 유발하게 만든 어머니와도 모두 건강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채 성인이 된다. 그래서 그녀는 고향을 떠나 외지에서 자기의 가정을 꾸리며 살면서 어머니의 죽음에도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한편 이웃집에 살고 있던 네터필드라는 노부인은 치매 증상을 보이며 불쑥 주인공이 살던 집으로 침입하는 사고를 일으키는데, 사실은 주인공 가족이 살던 집이 예전에 네터필드 부인이 살던 과거의 집이었다는 사실도 밝혀진다.


7. 나가며


이상 여섯 편의 단편을 흐르는 공통된 주제는 바로 상식을 벗어난 파격적인 주인공들의 행태이다. 이는 작가인 앨리스 먼로가 20세기 중반부터 후반에 이르는 시절 동안, 자기 자신과 주변 환경을 이루는 세상 풍조에서 일종의 부조리를 예민하게 느꼈음을 시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으로서 받아야 하는 일종의 억압과 편견에 맞서 일반 여성과는 다르게 저항 의지를 가지고 창작을 이어갔던 작가의 노력을 노벨 위원회에서 인정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중년 남자인 나에게 여성이 처한 부당한 환경을 실감하는 일은 사실 어렵다. 특히 소설 속 캐릭터인 남편 피터(일본에 가 닿기를)나 닥터 폭스(아문센)를 보면서, 미묘하고 섬세한 여성의 감정선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능력이 그들보다 못하면 못했지, 더 낫다는 생각은 엄두도 못 내며 내심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중년 이후의 남자들이 여성 작가들의 소설을 읽는 것이 다소 불편하고 꺼림칙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그보다 더 좋은 간접 경험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책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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