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0. 들어가며
켄 리우의 종이 동물원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6년 전 처음 읽었을 때는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 그의 능력에 감탄했던 기억이 났는데, 이번에 읽으면서 제법 묵직한 작가로서의 주제 의식을 느끼게 되어 기뻤다. 켄 리우가 다루는 주제들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방면에 걸쳐 사색과 사유를 하도록 유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1. 동양적 가치
켄 리우는 1976년 중국 서북부 간쑤성(省)의 란저우시(市)에서 태어나 열한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는 중국이나 일본 등 동양의 소재와 가치관이 잘 묻어있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뜨거운 모성애(종이 동물원), 달이 밝은 날 사람에서 여우로 변신하여 사람을 잡아먹기는 요물(즐거운 사냥이 되길), 한자를 소재로 삼아 펼쳐내는 점술의 세계(파자점술사), 바둑과 하이쿠가 지닌 일본의 사회 구조론과 감성(모노노아와레), 중국의 고전 서유기에 등장하는 손오공과 대화하는 소송 전문가(송사와 원숭이 왕) 등 미국(서구) 독자들에게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 내용을 밀도 높은 스토리에 녹여서 자연스럽게 전달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타고난 스토리텔링 능력인지는 몰라도 깊은 몰입을 하게 만들고 있다. 적어도 한국의 독자인 나에게는 말이다.
2. 문명과 기술에 대한 비판 의식
하버드 대학에서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마이크로 소프트 등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한 후 하버드 법학 대학원을 졸업, 법무법인에서 변호사로 일한 경력을 지닌 켄 리우는, 어쩌면 운명적으로 SF(Science Fiction) 소설 작가가 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소위 말하는 문과적 감성과 이과적 이성의 통섭을 통한 사고의 확장성을 기반으로, 그의 소설에서 과학과 기술적인 묘사의 디테일이 어렵지 않게 묘사되고 있다. 실력이 좋으면 설명도 쉽게 하는 경우가 그렇듯이 말이다.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AI가 지배하는 사회(천생연분), 단순한 홀로그램을 뛰어넘어 대상의 정체성까지 복원해 내는 디지털 복제자아의 구현(시뮬라크럼), 과학 이론을 충실하게 적용하여 창출해낸 외계 문명인들에 대해 묘사하고(상급 독자를 위한 비교 인지 그림책), 생명의 진화를 물질에서 에너지 파장까지 단계적으로 보여주며 육체와 정신의 단계별 도약까지 설명하며(파, 波) 본격적인 SF소설의 묘미를 선보이며 독자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끌어당기는 문장의 힘을 그는 작품에서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현란한 과학과 기술의 향연 뒤에 무겁고 무섭게 자리 잡고 있는 인간성 상실에 대해서도 그는 절대로 놓치지 않고 작가의 시선으로 독자들의 각성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말초적 자극을 넘어 철학과 윤리의식까지 작가 정신의 뿌리를 내리며 작품의 무게와 깊이가 발생한다.
3. 역사의식
마지막으로 켄 리우가 지닌 역사의식을 말하고 싶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배층이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며 수탈하는 일이나, 혹은 이념과 사상의 대립을 지닌 양 진영이 서로를 무자비하게 살육하고 역사의 승자가 되기 위해 비인간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번 소설집에서 켄 리우는 그러한 부당하고 가슴 아픈 현실에 대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문제의식을 표출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의 동양에 대한 인종 차별(종이 동물원), 대만에서의 현지인(번성런)과 외지인(와이성런)의 혈전,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을 잇는 해저터널 공사장에서의 하급 계층에 대한 관리자들의 비인간적인 학대와 살인(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 略史),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731 부대의 잔학한 인체 실험에서 드러난 제국주의(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등 작품의 곳곳에서 그러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글을 쓰는 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작가의 태도에 깊은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4. 나가며
다양한 매체와 콘텐츠가 범람하는 시대에 문학과 독서계가 존립의 위기까지 처했다는 말이 나온 지 오래다. 책은 이제 단순한 정보 제공을 넘어, 재미와 의미(감동)까지 갖춰서 경쟁 상대들과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하는 시대가 왔음이 분명하다. 장르 문학은 이제 더 이상 주변이나 하위(서브)에 위치하지 않고 이미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켄 리우는 그 중심부를 이끌어 가는 위대한 작가 중의 한 명이 되었다고 독자의 한 사람으로 감히 얘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