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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 Vianney Jan 15. 2022

아퀴노의 성 토마스의 유해는 어디에?


신학 공부를 하며 가장 많이 들었던 신학자 하면, 아마도 아퀴노의 성 토마스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태리에 오랫동안 살면서도 성 토마스가 이태리 사람일 거라는 생각을 한동안 하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성인의 이름에 태어난 도시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지요. 한국에 있을 때 이 성인 호칭을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불렀기에 이 두 글자는 성과 이름이겠지라고 생각하며 아무 의문도 갖지 않았습니다.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귀족들이야 가문의 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반인들은 그냥 이름만 불리던 것처럼 이탈리아도 동명이인이 아니라 삼인 사인 아니 그 이상이 되었기 때문에 성이 없던 사람들에게는 이름 앞에 출생지를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마치 빈치에서 태어난 레오나르도를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고 불렀던 것처럼 말이죠.


아퀴노 (Aquino)의 토마스는 13세기 대 신학자이며, 성인이고, 교회 박사이자 동시대 여러 신학자들과 함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기초한 이성과 신앙을 잘 조화시켜 스콜라 신학이라는 새로운 신학의 방법을 제시한 사람입니다. 수많은 저서 중에 우리에게 남긴 가장 유명한 것은 단연코 신학 대전 일 것입니다.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포사노바 수도원에 30년 (1932-1962) 머문 것을 기념한 성 토마스의 흉상

토마스는 이탈리아 아퀴노에 속해있는 로카세카 (Roccasecca)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이 돌아가시기 1년 전 그리고 도메니코 성인이 돌아가시고 4년 후인 1225년에 태어났습니다. 처음엔 집 가까이 있었던 몬테 까시노 수도원에서 베네딕도 수도자로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1224년 페데리코 2세 황제에 의해 세워진 나폴리 대학을 다니게 됩니다. 가톨릭과 정교회 그리고 이슬람 문화가 공존한 시칠리아에서 자라고 황제가 된 페데리코 2세는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다른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고, 오히려 서로 좋은 것을 취하며 공생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1227년 6차 십자군 전쟁 때 예루살렘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슬람의 술탄 알 카밀과 협상하여 얻었지만, 교황으로부터는 오히려 칭찬이 아닌 교회 파문이라는 벌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가톨릭 교회의 이슬람에 대한 생각은 협상하여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개종을 하거나 아니면 이슬람인으로 죽거나를 선택하는 둘 중에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사람이 세운 나폴리 대학을 다녔다는 것은 토마스에게 신학에 대한 폭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그 당시 교회에서는 금서 시 되었된 아스리토텔레스의 서적들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도메니코 수사들을 알게 되고 20세에 도메니코 수도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파리 대학으로 보내져서 공부를 마쳤고, 도미니코회 출신으로 중세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신을 널리 알린 알베르토 마뇨 (Alberto Magno, 1193~1280)를 퀠른에서 만나 그의 제자가 되어 큰 도움을 받았고, 1252년 막 27세가 되던 해에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1259년에 이탈리아로 돌아와 처음엔 나폴리에서 그리고 아나니 (Anagni)와 오르비에토에서 1265년까지 강의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해에 로마로 내려와 성 사비나 성당에 있는 도메니코 회의 자체 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스투디움 제네랄레'(Studioum generale)를 이끌기 시작하였습니다. 1267년 로마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신학 대전을 쓰기 시작하였고 그가 죽기 3개월 전인 1273년도에 중단되었지만 그의 비서였던 피페르노의 레지날도 (Reginaldo)에 의해 끝을 맺게 됩니다.


포사노바 수도원 정면과 후면

1274년 건강이 안 좋았지만 동방과 서방 교회의 재 일치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해달라는 그레고리오 10세 교황이 부른 리옹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살레르노에서 출발하였습니다. 건강은 점점 악화가 되고 결국 조카 프란체스카가 있었던 카스텔로 마엔자 (Castello di Maenza)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조카의 극진한 간호가 있었지만 이곳에서 며칠밖에 있지는 못하였습니다. 근처에 토마스가 몇 번 머물렀던 시토회의 포사노바 (Fossanova) 수도원이 있었고 이곳에 있던 수도 원장의 초정으로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 이 수도원에 문을 들어서면서 자기의 비서 신부인 레지날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여기가 영원한 내 휴식처가 될 것입니다. 내가 선택했기에 나는 여기에 머물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을 확인하듯 그를 태우고 온 노새의 발자국이 수도원을 들어서며 문지방 돌에 새겨졌다고 합니다. 이 문지방 돌은 수도원 사각 정원에서 성당으로 들어가는 문의 오른편에서 볼 수 있습니다. 

"Pedate del mulo di S. Tommaso d’Aqu" 

(아퀴노의 성 토마스의 노새 발자국)


토마스가 타고 온 노새의 발자국이 새겨진 돌
기도 수도승의 병실 건물
성 토마스 경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성인이 임종하신 방에 만들어진 소성당

토마스 성인이 머무시고 임종하신 장소는 수도자들이 생활하는 사각 정원과는 떨어져 있는 기도 수도승의 병실이었습니다. 사실 이 당시에는 모르는 병들도 많았고,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원에서 이런 병들은 가장 무서운 전염병일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해서 병실은 격리 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 수도원 외부에 따로 두었습니다. 토마스가 이 수도원을 찾은 것에 시토회 수도자들은 모두 기뻐했고 그의 완치를 위해서 부엌과 난방도 되는 기도 수도승의 병실 옆방을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상태는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시토회 수도자들은 너무 늦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그의 성경주해를 듣고 싶어 하였고, 토마스는 성서를 가져오라고 하여 그냥 펼친 부분이 아가서가 나왔다고 합니다. 토마스는 지혜의 빛을 받아 펼쳐진 성서를 은유적으로 해석해 주었고 수도자들은 한 자도 빼먹지 않으려 받아 적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때에 관련된 문서는 지금까지도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죽음 직전 구약성서의 아가서를 시토회 수도자들에게 설명해 주는 성 토마스

이것이 토마스의 성서에 대한 마지막 가르침이었다고 합니다. 1274년 3월 7일 아침에 지상에서 마지막 순간을 느낀 토마스는 비서 신부에게 마지막 고백성사를 하고, 수도원장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영성체를 모시고 임종을 하게 됩니다. 이때 나이가 단지 49세였습니다. 성인이 임종하신 자리의 제대 양옆 벽에는 16세기 때 익명의 사람이 은유적으로 다음과 같이 적어놓음으로써 성 토마스와 포사노바 수도원 관계를 잘 표현해 놓고 있습니다. 


OCCIDIT HIC THOMAS LUX UT FORET AMPLIOR ORBI ET CANDELABRU SIC NOVA FOSSA FORET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이 되기 위해 토마스가 이곳에서 임종하였고, 포사노바는 여기에서 그를 위한 촛대처럼 되었다


EDITUS ARDETI LOCUS ET NON FOSSA LUCERNA HAC IGITUR FOSSAM QUIS NEGET ESSE NOVAM? 
이 장소는 빛났던 토마스 때문에 드높여졌고 광채 나는 빛은 묻히지 않았다. 이 포사(fossa, 인공적으로 판 도랑)가 정말로 새롭게(nuova) 되었다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는가?


토마스의 스콜라 신학은 토마스가 살아있을 때도 논란이 되었습니다. 해서 토마스는 죽기 전 겸손되이 교회의 순종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Totum relinquo correctioni Sanctae Romanae Ecclesiae 
거룩한 교회의 수정에 모든 것을 맡기겠습니다


토마스가 죽자 토마스의 신학은 더욱더 가톨릭 교회 안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었고 급기야 1277년에 처벌을 받았습니다. 이에 도메니코 수도회는 토마스의 신학이 자기들의 공적 신학이라고 공표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1284년과 1286년에 또다시 잘못되었다는 처벌을 받게 되고, 이러한 토마스 신학 논란은 토마스가 1323년 성인품에 오르고 난 다음인 1325년도에 비로소 종식되어 공식적인 신학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포사노바 수도원 대성당 제대와 십자가 표시가 된 무덤 자리

아퀴노의 성 토마스 시신은 임종 직후 바로 포사노바 수도원 대성당 중앙 제대 앞에 묻히게 됩니다. 그리고 7개월 후에는 시신이 도난될 것을 우려해 봉쇄 수도원 안으로 옮겨 7년을 모시게 됩니다. 사실 도난의 우려는 도굴꾼들이 아니라 도미니코회 수도자들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시신의 안전을 위해 자기들이 있는 수도원으로 옮겨야 한다고 친척들과 시토회 수도자들에게 끊임없이 요구를 하였고, 이것에 큰 걱정을 느낀 친척들의 요청에 의해 따라 일반인이 들어올 수 없는 수도원 내부로 옮겨진 것입니다.


7년 후 성인의 유해는 베드로 수도원장에 의해 다시 대성당 중앙 제대 왼편으로 옮겨졌습니다. 관을 열어 확인했을 때 외부 사람의 손을 타지 않고 향기까지 났다고 합니다. 이렇게 옮긴 가장 큰 이유는 많은 순례자들이 성인의 유해 앞에서 기도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지 14년 되던 해에 다시 성인의 관을 열게 되었는데, 이것은 오래전부터 성인의 여동생 테오도라가 성인의 오른손을 모셔가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테오도라는 자기가 거처하고 있는 산 세베리노 성채 안에 있는 소성당에 성인의 오른손을 모셔가게 되었고, 후에는 살레르노에 있는 성 도메니코 성당으로 다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거의 같은 시기에 성인의 머리를 분리시켜서 제의방에 따로 모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혹시나 유해를 누군가가 훔쳐 간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성인의 머리는 계속해서 모실 수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따로 분리해 제의방에 모셨음에도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1303년이 되던 해에 더 안전하다고 생각되었던 포사노바 수도원에서 5킬로미터 떨어진 프리베르노 (Priverno) 도시에 있는 성 베네딕도 성당으로 성인의 머리만 옮기게 됩니다. 그리고 1329년도에는 도메니코 수도회에서 성인 유해의 일부만 달라는 요구에 응하여 포사노바 수도원에서 성인의 팔을 옮겨가게 하였습니다.


1309년에서 1377년까지 교황청은 아비뇽에 있던 시절이었고, 1323년 요한 22세 교황에 의해 아비뇽에서 토마스는 성인품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더 많은 순례자들이 성인을 공경하기 위해 성인의 유해를 프랑스 툴루즈로 옮겨지기 전까지 포사노바 수도원을 찾아왔습니다.


1369년 1월 28일 프랑스 툴루즈에 도착하는 성인의 유해. Otho Van Veen의 판화 (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결국 1368년도에 도메니코 수도회의 간곡한 요청과 교황 우르바노 5세의 인준에 따라 프리베르노에 있던 성인의 머리와 포사노바에 있던 나머지 유해는 1369년 1월 28일에 도미니코 성인이 형제들과 처음으로 수도회를 세우고 시작한 툴루즈에 있는 자코뱅 수도원으로 옮겨졌습니다. 1791년 프랑스혁명 정부에 의해 수도자들이 이 성당에서 쫓겨났을 때 성인의 유해는 San Sernin 성당으로 옮겨져 1974년도까지 모셔졌고, 그 해에 선종 700주년을 기념하면서 다시 원래 있었던 자코뱅 수도원으로 옮겨 지금까지 그곳에 모셔져 있습니다.


자코뱅 수도원 성당 중앙 제대 밑에 모셔져 있는 성 토마스 유해함 (출처 : 아퀴노 시 공식 사이트)

그런데 이탈리아 사람들은 아직도 성인의 머리 유해는 프리베르노시에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1585년 12월 28일 요한 비엘레 수도사가 성인의 머리 유해가 포사노바 수도원 성당에서 발견되었다는 발표를 하면서 진위 논쟁이 벌어집니다. 그에 따르면 성인의 유해를 툴루즈로 옮기던 해에 요한이라는 수도사가 진짜 머리가 있던 함은 성당 기도석 뒤편 벽에 감추어 두었고 대신해 다른 사람의 머리를 성인의 유해와 함께 보냈다는 것입니다. 요한 비엘레 수도사가 찾았다는 성인의 머리는 다시 제의방에 옮겼고 이것을 증명하듯 베네딕도 13세 (1725-1729) 교황 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수도원을 찾아와 성인 공경을 하였습니다. 1772년에 성인의 머리는 안전상의 이유로 다시 프리베르노 도시의 성모 마리아 주교좌성당으로 옮겨져 매년 3월 7일 성인이 선종한 날에 머리가 든 함을 모시고 도시 행렬을 하고 있습니다.


프리베르노의 성모 마리아 주교좌성당과 시청사 건물

과연 어디에 있는 머리 유해가 진짜 토마스 성인의 것일까요? 사실 DNA 검사를 하게 되면 어렵지 않게 결과가 나올 것 같은데 두 곳 어느 곳에서도 관심이 별로 없어서 인지 아니면 결과에 대한 두려움인지 이 요구를 아무도 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사실 이 두 지역 사람들에게는 어느 곳에 있는 성인의 유해가 진짜이고 가짜이고가 중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보고 기도하는 것이 진짜라고 믿는 마음일 것입니다.


참, 성인의 늑골이 있는 성당이 이태리에 한 군데 더 있습니다. 위에 말한 것처럼 곳곳에 성인의 유해가 있는데 막상 성인이 태어난 아퀴노 시에는 성인과 관련된 그 어떤 물건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1963년 아퀴노 시의 주교좌성당을 새로 지어 축성하면서 툴루즈 추기경에게 성인의 유해 일부를 청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져서 성인의 심장과 가장 가깝다고 하는 늑골 하나를 받아 유골함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도시에서도 역시 성인이 선종한 날에 기념 행렬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성인의 축일은 성인의 유해가 툴루즈로 옮겨진 1월 28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아퀴노 주교좌성당에 모신 성인의 늑골 (출처 : 아퀴노 시 공식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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