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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 Vianney Jan 19. 2022

첼리오의 성 스테파노 로톤도 성당

순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


로마를 다니다 보면 신전의 모습을 갖고 있는 성당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누구나 한 번쯤 보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장군 아그리파가 만든 판테온일 것입니다. 이것은 이름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모든 신들을 위한 신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각 신마다 신전을 하나씩 바치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계속되는 이민족들과의 전쟁에서 거의 비례적으로 신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로마 성 안에 신전의 숫자는 포화 상태가 되었고, 결국 궁여지책으로 만든 것이 모든 신들을 위한 신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전의 전형적인 형태인 직사각형 대신에 벽감에 모셔진 모든 신들은 평등하다는 것을 표현하듯 원형으로 만들었습니다. 내부 지름 55미터를 기둥 없이 반타원형 지붕을 덮은 건물로 만들면서 세계의 불가사의한 건축물에도 이름을 올렸고, 그 덕분에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가장 잘 보존된 로마의 신전으로 남아있습니다.


판테온

판테온은 로마 멸망 후 7세기경부터 그리스도교의 성당으로 사용하고 있고, 로마의 모든 신들에게 바쳤던 것처럼 그리스도교의 모든 순교자들을 위한 성전으로 봉헌이 되어 현재 이름은 '모든 순교자들의 성모 마리아 성당'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건축 형식인 원형 건물로 지으면서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로마의 성당은 따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첼리오의 성 스테파노 로톤도 성당 (Basilica di Santo Stefano Rotondo al Celio)입니다. 여기서 첼리오라는 명칭은 이 성당이 세워져 있는 언덕의 이름입니다. 로마 시절 이집트에서 가져왔다는 오벨리스크가 서있는 라테란의 성 요한 광장에서 연결된 성 스테파노 로톤도 길을 따라가면 이 성당을 만날 수 있습니다.


라테란 광장의 오벨리스크

이 성당을 처음 짓기로 결정한 사람은 레오 1세 대교황 (440-461)으로 전해져 내려오지만, 실질적으로 문서에 나타난 구체적인 성당 건축과 축성은 다음 교황이었던 심플리치우스 (468-483)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1세기를 더 거슬러 올라가 콘스탄티누스 황제 (306-337)의 명령에 의해 공사가 시작되었다고도 하는데, 이것이 좀 더 맞는 학설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거대한 성당을 짓는데 그 당시에 단 20년 정도밖에 안 걸렸다는 것은 황제의 재정적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시작되어 심플리치우스 교황 때 완성되었다고 하는 150년이란 건축의 시간이 좀 더 개연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성 스테파노 (수비아코 분도 수도원)

스테파노 성인은 유대인으로 태어나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육을 받고 그리스도교인으로 개종을 하여, 사도들의 부름으로 일곱 부제 중의 한 명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배급하는 등 공동체 내에서 가장 낮은 행정직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그리스도인으로는 처음으로 논리적으로 예수님을 증언하다 유대인들에게 성 밖으로 끌려가 돌에 맞아 죽는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로마에서 태어나거나 로마에서 순교한 분은 아니었지만, 많은 순교자들의 피와 증언으로 이루어진 로마 교회에서 이 성인은 특별하게 느껴졌을 것이고, 그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원형으로 만들어진 성당을 봉헌한 것도 그리 크게 놀랄 일은 아닐 것입니다.


성 스테파노 로톤도 길과 연결된 입구. 마당에서 바라본 성당 정면과 네 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현관

로톤도의 산토 스테파노 길을 따라가다 잘못하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입구를 만나게 됩니다. 문이 좀 작게 보여 약간의 의심을 가지며 발을 들여놓게 되는데, 그래도 다행히 대문 위에 성당 이름과 번지수를 보며 내가 오려고 했던 성당임에 안심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단 성당 입구 앞마당에서도 한 번 더 의심을 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아무리 오래된 성당이라도 겉으로 보면 딱 성당이야 하고 알 수 있는 모습이어야 하는데 아직도 긴가 민가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성당 안에 들어서면 ‘와아’ 하는 탄성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저절로 나오게 되고, 보기 전까지 의심한 나 자신 때문에 또 한 번 더 놀라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성당 이름에 왜 Rotondo라는 말이 붙었는지를 금세 알게 됩니다. 이 단어는 ‘둥근, 원형의’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성당의 모양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입니다.  현재 성당 다섯 개의 아치로 된 입구는 인노첸시오 2세 교황 때인 12세기 때 만들어졌습니다. 분명히 원래 성당의 외벽이었을 것이고 그 벽을 뚫어 기둥을 세우고 입구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서 역시 이  자리에서 하느님 집에 들어가기 전 신자들은 자신의 죄를 성찰하고 들어갔을 것입니다.


성당 복원도 (출처: 위키피디아)

처음  이 성당을 지었을 때는 지금처럼 두 개의 원형 둘레가 아니라 세 개의 원형 둘레로 되어 있었고, 천장은 지금처럼 큰 원통에 작은  원통을 하나 더 얹어 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 성당은 원형 구조와 정십자가 구조를 합쳐 놓은 형태로 만들어졌는데, 원형은 예루살렘에 있는 무덤 성당과 유사하게 만듦으로써 영원성을, 그리고 정십자가는 초기 성당 양식에서 의미하는 순교자의 증거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래는 원형 주위 사방으로 소성당이 네 개 있었다고 합니다. 넓이를 보면 지금은 벽으로 바뀐 두 번째 기둥 열까지 지름의 길이는 42미터였고, 현재는 볼 수 없는 외벽까지 지름의 길이는 판테온 55미터 보다 더 긴 66미터였었습니다. 두 번째 기둥 열은 현재 외벽으로 바뀐 상태라고 보면 됩니다.  


523년과 529년에는 요한 1세 교황과 펠리체 4세 교황에 의해 모자이크와 값진 대리석으로 성당을 장식하였고, 그레고리오 대교황이 설교한 성당으로써 그때 사용한 교황좌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12세기 때에 인노첸시오 2세 교황은 시간이 흐르면서 많이 허물어진 성당을 수리하게 되고 지금의 성당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외벽 일부를 입구를 만들고 나머지는 허물어 버리는 대신에 두 번째 열에 있었던 기둥 사이 공간을 채워 벽을 만들었고 정십자가 형태의 건축 모습도 사실 이때 사라지게 되어 원형의 모습으로 남게 됩니다.  


성당 정 중앙 제단

중앙 제대 위쪽으로는 지붕을 지지하기 위해 거대한 두 개의 대리석 기둥으로 세 개의 둥근 아치를 만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중앙 제대 주위에는 팔각형으로 신자석과 사제석을 구분하는 담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세 성당들의 건축물 안에 담긴 상징성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성당은 신자들이 모이는 하느님의 집이기 때문에 특히 문맹자가 많았던 중세 때에는 보이는 여러 가지 형태로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현존성을 보여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당 내부의 창문의 수, 기둥의 수, 도형의 모양 등은 아무 의미 없이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진 속 제대 위의 세 개의 둥근 아치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가운데 아치가 도드라지게 커 보이는 것이 삼각형처럼 보이지는 않나요?

세 개의 아치, 삼각형, 3이라는 숫자 이 모두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아래 팔각형 담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은 7일 동안 세상을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처음 맞는 여덟 번째 날로써의 새로운 시작이고, 끊어지지 않는 8의 숫자 모습에서 보여주는 무한함, 즉 하느님의 영원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여덟 번째 날은 예수님의 부활의 날(1)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 중심의 기능적으로 만들어진 현대적인 성당보다 하느님 중심의 전례적 성당으로 만들어진 중세의 성당 안에 들어오면 내가 죽어 보게 될 천상 교회를 좀 더 시각적으로 미리 맛보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성 프리모와 펠리치아노 경당
두 성인의 고문과 기적 이야기 (성 프리모와 펠리치아노 소성당 벽화)

사방 네 군데에 있었던 소성당 중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7세기 때 교황 테오도로 1세 (642-649)가 봉헌한 성 프리모 (Primo)와 펠리치아노 (Feliciano) 소성당입니다. 이 두 성인은 그리스도교를 마지막으로 박해했었던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 시절인 297년경에 순교를 하였습니다. 두 분은 형제였고 나이는 80세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이교도의 신에게 대한 제사를 거부하면서 불로 몸을 지지고 끓는 납물을 입안에 붓는 등 갖은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박해자들은 사자 우리에 집에 넣어 맹수 앞에서 벌벌 떨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지만 오히려 기도하는 두 형제 옆에서 순한 양처럼 양다리를 뻗고 그들을 보호하는 사자들을 보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통하지 않자 결국에는 참수형을 당하게 됩니다. 이 두 분의 유해는 노멘타나 길에 있는 카타콤베에서 이곳으로 모시고 와 제대에 모시고 있습니다. 


제대 위 압시대 모자이크

이 소성당의 압시대에는 아직도 7세기 때의 모자이크가 남아있고 이 당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밝게 빛나는 십자가 위에 있는 예수님과 그 양옆 천국의 꽃밭에 고통은 사라지고 강건하게 서 있는 두 성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제단은 15세기 때 베르나르도 로쎌리노라는 피렌체 작가가 만들었습니다.


순교자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벽화

다른 성당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둥근 벽을 따라 16세기 화가인 뽀마란치오 (Pomarancio)와 템뻬스타 (Tempesta)가 함께 그린 총 34장의 순교화입니다. 벽화 한 장 한 장은 원래 성당 기둥 사이를 메운 벽 위에 그려진 것입니다. 이 순교자의 그림들은 너무나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어서 마치 고문의 방법을 기록한 박물관이 아닌가라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입니다. 순교화 밑에는 라틴말과 이탈리아 말로 번호를 매기며 설명을 해주는 글이 있고, 박해 시기의 황제 이름을 표기해 놓아 역사성과 사실성을 더 정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그림들은 성당 왼쪽으로 돌면 시간 순서에 따라 볼 수 있는데, 당당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표정으로 순교하는 모습에서 이들은 억울하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간혹 박해자들의 잔인함에 우리의 머리를 돌릴 수도 있지만,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단지 죽음의 끝이 아니라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인이 임종 전에 하신 말씀처럼 드디어 주님을 뵙는 기쁜 길임을 새삼 느끼게 해 줍니다.




예수님 부활의 날(1) :

예수님께서 금요일에 돌아가시고 삼일 후인 주일에 부활하신다. 이것은 유대교의 안식일이었던 토요일 다음 날에 부활하신 것이어서 교부들은 편지에 여덟 번째 날에 부활하셨다는 말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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