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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 Vianney Feb 13. 2022

쿠에르차의 성 마리아 성지

순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

Santuario Santa Maria della Quercia


간단한 역사와 기적 이야기

이탈리아 마을이나 산을 걷다 보면 길가나 건물 사이에 성모님의 이콘이나 석상이 놓여있는 것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처음 와서 이것을 보았을 때는 우리나라 옛 시골 마을 입구에 있는 서낭당이 떠올라 너무 미신처럼 믿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25년을 넘게 이곳에 살다 보니 이들에게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도 되지만 자신들의 어머니로 생활 속에서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인구의 90프로가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설명이 될 수도 있겠지만 태어날 때 한 번, 결혼할 때 한 번, 죽을 때 한 번 성당에 간다는 이야기를 진실처럼 말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이 이유는 부족함이 있어 보입니다.


제가 월세를 살 때 집주인의 주택은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아주머니 이름은 클라라, 아저씨 이름은 탕크레디였고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10년을 가까이 살면서 느꼈던 것은 남성주의의 가부장제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었습니다. 집이나 땅의 명의가 클라라에게 있었기 때문에 2년에 한 번씩 있는 재계약이나 월세, 세금, 수리 등 집에 관련된 모든 일은 클라라와 만나서 이야기하고 처리를 하였습니다. 탕크레디와는 지나다니면서 간혹 만나면 농담 정도 하는 사이였죠. 이탈리아 사람들은 영화 대부에서 나오는 것처럼 친척이나 가족이 근처에 서로 모여 사는 것을 선호하였고 클라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탕크레디의 친인척은 없고 모두 클라라의 친인척들이 각자 자기 집을 가지고 주위에서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시집간다는 말 대신 장가간다는 말만 있는 매우 여성 중심적인 사회라는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주머니와 자식들과의 관계도 아주 남달랐습니다. 교육보다는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클라라는 자식의 장래를 위해 먼 곳으로 유학 보내기보다는 되도록이면 집 가까이에 있는 학교를 보내 자신의 품 안에서 키우려 하였고, 자식들이 성장하여 결혼을 하면 출가를 시키기보다는 집을 2, 3층으로 올려 각 층마다 자식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자리도 중요하였지만 클라라의 가족 중심은 바로 어머니였습니다. 그래서 이탈리아 어머니들은 생활력이 아주 강하고 가족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보호자도 돼주었지만 해결사의 역할도 하였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어머니이자 모두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아주 특별한 존재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쿠에르차의 성 마리아에게 첫 제대 봉헌 (성당 내부 뒤편)

비테르보 (Viterbo)는 로마 북쪽 80킬로미터 거리에 있고 현재 인구 6만 5천의 중세 시대의 성벽이 남아있는 도시입니다. 중세 시절 프란치제나의 길이 지나는 이 도시는 순례자들에게 로마로 들어가는 마지막 큰 도시였고 순례의 종착지였던 로마에 가까이 왔다는 기쁨을 주는 도시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도시 근처에는 여행자뿐만 아니라 순례자들을 노리는 도둑이 많이 있었습니다.


1417년 비테르보에는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동정 마리아를 공경하는 마냐노 유잔테 (Magnano Juzzante)라는 사람이 있었고, 화가 모네또 (Monetto)에게 기와에 아기 예수님과 동정 성 마리아의 이콘을 그려달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이콘을 자신의 포도밭 근처에 여행하는 사람들을 자주 괴롭히는 도둑들이 나타나는 참나무 가지 사이에 모시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이 길을 지나다니던 여인들과 순례자들은 아기 예수님과 동정 마리아를 바라보면서 기도를 하였고, 시에나의 한 은수자였던 삐에르 도메니코 알베르티라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비테르보와 바냐니아 동네 사이에 보물이 있고, 그것은 바로 “마돈나 (Madonna)” 성모님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곳을 자주 지나치며 이 이콘을 바라보며 기도하던 바르톨로메아 라는 여인이 있었고 하루는 이콘을 자기만의 것으로 소유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 참나무에서 떼어 집으로 가져가게 됩니다. 저녁에 이콘 앞에서 기도한 후 잠자리에 들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깨어보니 이콘은 보이 지를 않았고 식구들에게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든 바르톨로메아는 바로 이콘이 원래 있었던 참나무로 달려갔고 바로 그곳에서 짐작한 대로 이콘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 번 다시 집으로 옮겨왔지만 번번이 이콘은 참나무에서 다시 발견되는 일이 반복되었고 바르톨로메아는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기사의 기적 이야기

그러던 중 50년이 지난 1467년도에 결정적으로 이 이콘에 공경심을 갖는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한 기사가 적들에게 쫓겨 이곳을 지나가다가 성모님 이콘을 발견하고 참나무 아래에 몸을 던지며 보호를 청하게 됩니다. 잠시 후 도착한 적들이 그 나무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도 이콘 아래 나무 뒤에 숨은 이 기사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적들이 물러간 후 기사는 성모님의 도움으로 무사히 목숨을 건졌다고 생각을 했고, 동네 사람들에게 이 기적의 사실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옆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바르톨로메아도 용기를 얻어 자기가 이콘을 훔쳐 가려고 했던 일과 또 번번이 이콘이 제자리로 돌아가서 실패한 사실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또 한 번은 비테르보와 그 주변 마을에 전염병인 페스트가 퍼져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과 죽음을 맞게 되는데 그런 그들에게 참나무의 성모님 이콘이 기억이 났고 하루 만에 3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찾아와 성모님의 보호와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며칠이 지나 기적처럼 페스트는 사라졌고 약 4만 명의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감사의 기도를 올렸고 이때부터 아기 예수님과 성모님은 모두의 수호자로 모셔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1467년에 나무로 된 소성당과 제단을 이콘 앞에 봉헌하였고, 같은 해 10월 22일 바오로 2세 교황은 이 이콘을 기념할 수 있는 성당 건축을 인준해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미사를 봉헌할 수 없는 예수회 재속 수도자들이 관리를 하였고 1469년에는 도메니코 수도회에서 관리를 하면서 점차 큰 성당을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1577년 4월 8일에 이 대성당은 완성이 되어 감바라의 프란체스코 추기경이 축성을 하였고 이 이콘에 강한 신심을 갖고 있었던 이 추기경은 사후 자신의 뜻에 따라 성모님의 제단 아래에 묻혀있습니다. 그 후 역대 많은 교황들은 오스만 터키의 이슬람의 공격 등 레판토 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이 성모님께 의탁을 하였습니다.


1867년 비오 9세 교황께서는 이 성당을 소성전 (Basilica Minore)로 선포하였고 1873년 이태리 정부는 국가의 기념물로 인정하였습니다. 그리고 1984년 5월 27일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비테르보를 사목 방문하셨을 때에는 참나무의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에게 왕관을 씌워 드렸습니다.



성당 외부

성당 정면과 종탑

줄리아노 상갈로 (Giuliano da Sangallo, 1470)가 설계한 이 성당의 정면은 흔히 볼 수 없는 초기 르네상스 양식이며 그 당시 피렌체의 고전적인 양식으로써 도드라진 무늬가 있는 응회석으로 단순하며 투박하고 가난의 정신을 보여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당은 세 개의 문 (성부, 성자, 성령)을 가지고 있고 그 문 위에는 롭비아의 안드래아 (Andrea della Robbia, 1507)가 만든 반월창 안에 유약을 바른 테라코타의 작품이 있습니다. 중앙 정문에 있는 것은 폭 2미터의 대작으로써 쿠에르차의 성모님 승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모의 승리

성모님 등 뒤로는 기적의 이콘을 상징하듯 참나무의 가지를 볼 수 있고, 머리 위로는 두 천사가 황금의 관을 마리아에게 씌우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왼손에 제비를 오른손으로는 축복을 하고 계십니다. 제비는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것처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은 희망을 가져다줍니다. 양옆에는 비테르보의 수호성인인 도메니코와 로렌조 성인이 서 있습니다.


베로나의 성 베드로
성 토마스 아퀴나스
베로나의 성 베드로, 마르코 미술관 (프라 안젤리코)

왼쪽 문 위에는 도메니코 수도회 출신의 베로나의 베드로 (1205-1252) 성인이 머리에 박혀있는 칼로 어떻게 순교하였는지를, 그리고 가슴에 품고 있는 책으로 얼마만큼의 신앙을 갖고 있는지를 표현하였습니다. 성인께서는 당시 유행하던 이단인 카타리파와 싸우며 이탈리아 곳곳에서 설교를 하였고, 이에 두려움을 느낀 이단자들의 일부가 1252년 코모 근교에서 성인을 공격하여 도끼로 머리를 내리쳤다고 합니다. 성인께서는 이런 일을 예상하였던 것처럼 사도신경을 외우고 손가락에 자신의 피를 적셔 땅바닥에 CREDO (믿습니다)를 적고 순교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인을 표현한 그림을 보면 머리에는 찍혀있는 칼, 믿음을 표시하는 한 손가락 그리고 설교자를 표시하는 책을 가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오른쪽 문 위에는 역시 도메니코 수도회 출신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회 박사로써 당신의 저서인 책을 가슴에 품고 있고 오른손으로 성전을 봉헌하고 있습니다. 성전의 기둥들은 그의 많은 저서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호두나무로 만들어진 문들은 1507년 루노비코 갈루찌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1620년 프랑스 사람 마스트로 토로데에 의해 복원되었고 수도원과 교회의 은인들의 문장이 새겨져 있습니다. 성당 측면에는 1483년 비테르보의 빈첸조에 의해 만들어진 축복의 발코니가 있습니다.



성당 내부


성당 내부는 이 열 기둥으로 나누어진 세 개의 복도로 이루어진 하나의 본체를 가지고 있으면 길이 90미터, 폭 24미터, 중앙 복도의 천장 높이는 19미터입니다. 한 열은 8개의 통 기둥 돌로 되어 있습니다. 기둥의 주두만 아름답게 장식을 하고 나머지는 단순하게 처리함으로써 방문객들이 고요함과 평화 안에서 하느님의 신비를 묵상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있는 듯합니다.


내부의 디자인은 필립보 부르넬레스키 (1377-1446)가 만든 피렌체의 성 로렌조 성당, 그리고 성령 성당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줄리아노 다 상갈로 (1445-1516)가 만들었고 마치 이 피렌체의 어느 한 성당 안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합니다. 성당의 기둥들은 피렌주올라의 쟈코모 (1499)가 만들었습니다.


완벽한 비율과 원근감을 중요시 여겼던 르네상스의 정신은 여덟 개의 기둥, 즉 8이라는 숫자로서 교회의 상징적인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숫자로 하늘나라를 표현하는데, 특히 8이라는 숫자는 예수님의 부활, 세상의 시작, 그리고 숫자를 옆으로 눕혔을 때 보이는 무한대라는 표시로 영원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영원성과 하늘나라의 아름다움을 우리의 머리 위에 보여주려 하는 듯 머리 위에는 황금으로 덮인 천장이 덮여있습니다. 이 천장은 안토니오 상갈로 (Antonio da Sangallo il Giovane)가 디자인하고 1518년과 1530년 사이에 피렌체 사람인 죠반니 디 베드로가 완성하였습니다. 천장에는 아메리카에서 콜럼버스가 가져온 순금 60킬로그램이 사용되었고 스페인 왕 카를로 5세가 바오로 3세 교황에게, 그리고 바오로 3세 교황이 이곳에 기증을 하였습니다.


기념대
쿠에르치아의 성모님 이콘

중앙 제대 뒤에는 안드레아 브레뇨 (1490)가 카라라산 백색 대리석으로 만든 작은 성전 같은 기념대가 있고 그 가운데에 옛날 참나무와 함께 기와에 그려진 이콘이 모셔져 있습니다. 이콘 속 주인공은 언제나 아기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모님의 손과 몸의 방향은 아기 예수님에게로 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눈은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시는 것이 아니라 이분이 주님이라는 것을 알려주듯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의 기도를 주님께 전해 주실 준비도 되어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엄마 나에게 무엇을 원하세요?”라는 물음에 모든 사람들을 바라보며 기도를 전달해 주고 들어 달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모님은 가나의 혼인 잔치 (요한 2,1-12)에 계셨던 것처럼 우리와 예수님 사이에 계시는 우리 기도의 중재자이시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의 중재자이십니다. 성모님은 잔칫집에 포도주가 없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 한 마디 하십니다. "포도주가 없구나" 그러나 예수님은 조금은 황당한 표정으로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끈질기십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그리고 예수님은 때가 되지 않았음에도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요한 2장 11절


정말 성모님은 대단하지 않으십니까? 어머니는 우리를 위해 아들의 마음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이 그림을 그렸던 모네또는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고 합니다.


성모님을 그리던 중 마리아의 얼굴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잠이 들었고
꾸벅꾸벅 조는 사이에 천사들이 다가와 성모님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깨어보니 이미 얼굴은 그려져 있었고 저는 나머지 옷을 그려 완성하였습니다.

성서가 사람의 손으로 썼지만 사람이 쓰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콘도 사람의 손으로 그렸지만 사람이 그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서는 성령의 감도로 쓰였다고 하고, 이콘은 천사가 직접 그렸다는 뜻으로 아케로피타 (Acheropita, ἀχειροποίητα, 손으로 만들지 않은)라는 단어를 붙여쓰기도 합니다.


이콘은 그리스 말 에이콘 (εἰκών)에서 나온 말로 그림이나 성화의 뜻이 아니라 어딘가에 '비친 상(像)'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멀리 보이는 달이 우물에 비치면 내 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 듯, 보이지 않는 예수님과 성모님이 나무판에 비쳐 내 앞에 계시는 것입니다. 말씀은 귀를 통해 그리스도의 신비를 보여준다면 이콘은 눈을 통해 그리스도의 현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4세기경부터 그려진 이콘의 주제는 예수님과 성모님으로 한정을 하였고, 그리는 사람도 기술자인 화가가 아니라 영성이 뛰어난 수도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기 전 단식과 기도를 하였고 신학적 지식을 위해 지도 신부의 교육도 받아야 했습니다.


이콘의 목적은 예수님과 성모님의 미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려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구원의 신비를 드러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콘을 볼 때 성물을 고르듯 이쁘고 아름다움을 기준으로 보면 안 될 것입니다. 마치 우리 앞에 살아계시는 예수님과 성모님을 보듯 두 분의 눈빛과 방향, 손짓 등 행동을 보아야 합니다. 르네상스의 발명이라는 원근법은 우리 시각을 그림의 중심으로 만들면서 우리 모두를 관객으로 만들었고 그림 밖으로 몰아내 버렸습니다. 이콘에는 원근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성모님이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주인공은 예수님과 성모님입니다. 우리는 제3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앞에서 한 공간 그리고 같은 시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쿠에르차의 성 마리아 이콘은 옛날에 일어났던 기적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기적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디에 서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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