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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 Vianney Mar 03. 2022

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성당과 신도네 최초의 예수님 이콘

순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

아우렐리아 성벽을 따라 보이는 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성당
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당

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당을 출발하여 아우렐리우스의 로마 성벽을 따라 10분 정도 걷다 보면 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성당 (Basilica di Santa Croce in Gerusalemme)을 만나게 됩니다. 성모 마리아 대성당과도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으니 햇볕 좋은 날 도보로 이 세 성당을 방문하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성당은 로마의 다른 성당들처럼 어떤 특정된 성인을 기념하거나 순교자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당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곳은 예수님의 수난과 관련된 유물이 1700년 동안 보관된 곳이며 로마 7대 성당에 들어갈 만큼 순례자들이 꼭 방문하여 기도하기를 가톨릭 교회에서 500년 동안 권고한 중요한 성당입니다.


로마 성벽과 연결되어 있는 카스트렌세 원형경기장 (예루살렘 성 십자가 대성당 오른편)

3세기까지 고대 로마의 에스퀼리노 구역에 속한 이 일대는 황제들의 빌라가 세워졌던 곳으로 콜로세움과 같은 카스트렌세 원형 경기장 (Anfiteatro Castrense)(1), 바리아노 대전차 경기장 (Circo Variano), 헬레나의 목욕장 (Terme Eleniane) 그리고 황제들이 사용하던 궁전들이 복합적으로 있었습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이전한 후에 이 궁전들은 그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소유가 되었고 그중에 하나가 헬레나 성녀가 사용하였던 세쏘리움 궁전 (Palazzo del Sessorium)이었습니다. 325년경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떠난 헬레나 성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골고타 언덕 위에 무덤 성당을 세우기로 결정을 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예수님의 수난의 상징물인 십자가와 못, 가시관 등을 발견하여 로마로 돌아올 때 이 골고타의 흙과 함께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로마에 도착한 헬레나 성녀는 예수님의 성 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세쏘리움 궁전 내부의 넓은 방 (가로 36 세로 21 높이 22미터)을 택하여 바닥에 예루살렘에서 가지고 온 흙을 깔고 소성당처럼 만들어 예수님의 수난 성 유물을 보관하였습니다. 그 후 이 성유물이 보관된 장소가 중심이 되어 4세기에 성당을 세우게 되었고 처음에는 헬레나의 성당 혹은 세쏘리아의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보통은 성인들의 유물이나 유해를 보관하기 위해 조그만 유물함이나 유골함을 만들어 성당의 한 장소인 소성당을 사용하지만 이 성당을 세운 목적은 예수님의 유물을 보관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성당 자체가 성 유물함이 되는 특별한 장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중세부터 이 장소는 성당이라기보다는 예루살렘 (Hierusalem)이라고 불렀고 순례를 예루살렘까지 가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이 성당에 오는 것만으로도 예루살렘의 흙을 밝고 예수님의 성 유물을 보며 기도할 수 있는 또 다른 예루살렘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며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시간으로 로마 순례의 중심 장소가 된 것은 신자들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세 모든 기간에 걸쳐 사순 시기 중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날을 기억하는 성금요일날 교황님들도 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당부터 맨발로 이곳까지 걸어오는 참회와 십자가 경배 예절을 하였고 이 전통은 후에 미사 경본의 성금요일 예절에 삽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현재 이 성당은 가톨릭 교회에 소유권은 없습니다. 1870년 이탈리아라는 새로운 이름의 통일된 나라가 태어나면서 많은 성당들이 국가 소유로 넘어가게 되는데, 이 성당도 이때 함께 빼앗기게 되어 성당뿐만이 아니라 수도원 건물까지 모두 이탈리아 국가 소유로 되어 있습니다.


성당 정면 (성당 오른편 건물은 호텔로 사용하고 있다)

여러 교황에 의해 보수되고 증축되던 성녀 헬레나의 소성당은 1144년 루쵸 2세 (1144-1145) 교황 때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된 3랑 식 성당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현재 보이는 종탑도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현재의 성당 정면과 현관이 덧붙여진 것은 베네딕도 14세 (1740-1758) 교황 때이고 건축가 피에트로 파싸라콰 (Pietro Passalacqua)와 도메니코 그레고리니 (Domenico Gregorini)에 의해 후기 바로크 양식으로 1740년에서 1758년도에 만들어졌습니다. 단층으로 된 정면은 세 개의 문과 세 개의 창문을 가지고 있고 베네딕도 14세 교황 재위 4년도에 거룩한 십자가를 공경하여 만들었다는 글자가 초석처럼 쓰여 있습니다.


정면 맨 위 쇠로 만든 십자가 양옆에는 무릎 꿇고 기도하는 두 천사가 있고 그 양옆에는 네 명의 복음사가 석상이 있습니다. 맨 왼편은 십자가를 들고 있는 헬레나 성녀 그리고 맨 오른편은 창을 들고 있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입니다. 성당 내부로 들어서기 전 넓게 만들어진 타원형으로 된 현관이 있고, 여기를 지나면 15세기 때 만들어진 문을 통해 성당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들어서자마자 바실리카 양식과 바로크 양식이 혼합이 된 기둥과 장식에 약간의 혼동스러움도 느껴지지만 1700년의 지난 시간을 설명해 주는 것에는 부족함이 없는 듯합니다. 양옆에는 17세기에 만든 여섯 개의 제대가 있습니다. 특히 오른편 제대들에는 한때 이곳에서 수도 생활을 했던 시토회와 관련된 제단화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1. 예수님 유물 소성당  2. 예수님 유물 보관함  3. 신도네 모조품 전시실  4. 본당 출신의 가경자 안토니에따 메오 무덤  5. 성녀 헬레나 소성당  6. 성 그레고리오 소성당  7. 감실  8. 압시대 (예수님 십자가 발견 이야기)  9. 중앙 제대와 치보리움  10. 시토회 창립자인 몰렘의 성 로베르토의 어머니 꿈  11. 성 베르나르도가 대립교황 비토레 4세를 인노첸시오 2세 교황에게 순명하도록 이끎  12. 성인이 성 체사레오의 이빨을 뽑음  13. 교황 실베스트로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성 베드로와 바오로 초상화를 보여줌  14. 15세기 중반 나무 십자가  15. 성 토마스의 의심 나무 천장


압시대에 그려진 축복하시는 그리스도와 헬레나 성녀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발견하는 장면의 프레스코화

중앙 제대 밑에는 고대 로마 욕조로 쓰인 석관이 있고 이 안에 순교자 체사레오와 아나스타시오의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1148년 로마의 유적지에서 가지고 온 네 개의 기둥 위에 1743년도에 도금한 청동으로 만들어진 치보리움이 순교자의 제대 위를 왕관처럼 덮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 반원형 천장인 압시대의 가장 중앙에 예수님께서 왼손에는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나오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의 라틴말 성서를 펴 보이고 있고, 오른손으로는 손가락 세 개를 펴고 두 개를 접음으로써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시고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의 아이덴티티를 보여주시면서 당신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을 축복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 주위에는 여섯 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는 수많은 케루빔과 세라핌 천사가 예수님을 에워싸며 거룩하시다를 외치고 있는 듯 합니다.


그 아래는 헬레나 성녀가 예수님 십자가를 발견하고 증명하는 세 가지 이야기를 그림으로 연달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왼편에서부터 시작을 합니다. 

갈바리오 언덕에서 성전을 세우기 위해 땅을 파던 중 세 개의 십자가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어느 십자가가 예수님의 것인지를 모르기에 사람들은 매우 혼란스러워합니다. 헬레나 성녀는 세 명의 환자를 발견한 십자가 위에 눕히면 분명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기적이 일어나 어떤 것이 당신의 십자가인지를 보여줄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리고 한 십자가에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고 헬레나 성녀는 그 십자가를 들어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예수님의 십자가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헬레나 성녀는 이 십자가의 절반은 아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있던 콘스탄티노플로 보내고 나머지 절반은 로마로 가져왔습니다. 그 절반의 십자가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중앙 제대 옆에 보관돼 있고 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성당에는 그 십자가에서 떼온 조각이 있는 것입니다. 이 프레스코화는 1492년과 1495년 사이에 안토니아쪼 로마노 (Antoniazzo Romano)와 마르코 팔메짜노 (Marco Palmezzano)가 그렸습니다.


중앙 제대 오른편으로 나있는 통로로 내려가면 두 개의 소성당이 나옵니다. 하나는 1520년에 만들어진 그레고리오 대교황 (재위 590-604)의 소성당이고 다른 하나는 1930년까지 예수님의 성 유물을 보관하였던 성녀 헬레나의 소성당입니다.


그레고리오 대교황 소성당의 정면
그레고리오 대교황 소성당의 천장화

1520년에 베르나르디노 추기경에 의해 만들어진 대 그레고리오 교황 소성당의 제단에는 1628년경 아르칸젤로 고넬리 (Arcangelo Gonelli)가 만든 대리석의 피에타 부조가 벽에 있고 천장에는 지롤라모 난니 (Girolamo Nanni)와 프란체스코 나피 (Francesco Nappi)가 1630년에 그린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의 환시가 프레스코화로 그려져 있습니다.


헬레나 소성당의 정면
헬레나 소성당의 천장 모자이크

성녀 헬레나의 소성당 제대에는 갈바리오 언덕에서 발견한 십자가를 들고 있는 헬레나 성녀의 석상이 서있습니다. 이 석상의 몸통은 로마 피우미치노 국제공항 근처에 있는 고대 오스티아 도시에서 발견한 여신 쥬노네 (Dea Giunone)의 것이고, 여기에 머리와 팔과 얼굴을 덧붙여 만든 것입니다. 천장에는 축복을 주시는 구세주인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복음사가의 상징과 모습이 있고 그 사이에는 헬레나 성녀가 십자가를 찾는 이야기가 모자이크로 되어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소성당의 바닥에는 골고타 언덕에서 헬레나 성녀가 가지고 온 성지의 흙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소성당에서 1930년까지 예수님의 성 유물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소성당은 헬레나 성녀가 살았던 세쏘리움 궁전의 가장 중심이었으며 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성당의 가장 중요한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물 소성당 들어가는 통로
유물 소성당 내부
십자가 모양 안에 들어있는 예수님 십자가 나뭇조각과 손과 발을 뚫은 대못 한 개
십자가 위에 걸려있었던 죄명판의 4분의 1과 예수님이 쓰신 가시관의 가시 두 개

중앙 제대 왼편 입구를 통해 들어갈 수 있는 유물 소성당 혹은 십자가 소성당은 지하에 있는 헬레나 소성당에 두었던 예수님의 유물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1930년에서 1952년 사이에 옛 제의방이 있던 장소에 만들었습니다. 이곳으로 옮긴 가장 큰 이유는 지하의 습기로부터 손상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가 가장 컸습니다.


헬레나 성녀가 이 유물을 로마로 가지고 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먼저 시간적으로 볼 때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에서 250년 동안 박해를 받았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었던 313년 밀라노 관용령이 선포된 지 15년도 안 지난 때였고 국교로 선포하려면 아직도 70년이나 기다려야 하는 시기였습니다. 즉, 그 당시 로마의 우세 종교는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많은 이교도의 신들이었고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교는 교세 확장과 함께 이교도인들과는 크고 작은 다툼이 있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성 유물을 로마로 옮겨왔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인들과 이교인들 모두에게 눈앞에 예수님의 현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가보지 못하고 사도들과 교부들의 이야기로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졌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이 십자가는 더욱 굳건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눈으로 보이는 것이 중요하여 모든 신들을 형상화했던 이교도인들에게 이 십자가는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자신의 신들처럼 전설 속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살았던 예수님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증거물이었습니다. 또한 현세의 삶만을 행복하게 해주는 자신의 신들과는 달리 내세의 영원한 행복까지 약속해 주는 하느님 아들의 위대한 희생을 이 성 유물에서 그들 또한 보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을 찾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유물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이곳을 찾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찾아와 예수님 옆구리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본 사도 토마스에게 하신 예수님 말씀을 모두 기억하실 겁니다. 그리고 지금 이 성 유물들을 찾아온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복음 20장 29절


믿는 사람이라면 성 유물 앞에 선 나 자신의 마음을 들여봐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의 진짜 십자가인지, 못인지, 가시관인지를 확인하고 싶은 인간적 호기심에 이 성당을 들어가고 유물 앞에서 기도하기보다 사진을 먼저 찍으려 한다면, 그 사람은 분명 관광객이고 보고서야 믿음을 가졌던 토마스보다도 못한 익명의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반면에 성 유물 앞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이 느껴지고 무릎을 먼저 꿇는다면, 그 사람은 성 유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고 분명 보지 않고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며 예수님 말씀처럼 토마스보다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이 유물 소성당 오른편 문으로 들어가면 예수님의 수의인 '신도네'의 사본이 진본과 똑같은 크기로 전시가 되어 있습니다. 비록 진품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성 유물과 함께 예수님의 수난과 실재성을 더욱 잘 보여주는 이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수의 신도네

신도네 (Sindone)라고 불리는 예수님의 시신을 감싼 진품 수의는 1578년부터 지금까지 이탈리아 토리노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신도네는 실로 짠 모든 천을 말하는데 예수님의 시신에 사용된 이후에는 '예수님의 수의'라는 고유명사처럼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도네는 길이 436센티미터 폭 110미터로 생선 가시 모양으로 짠 천이며 한쪽 편에 예수님을 눕히고 나머지 반을 접어서 시신을 덮었기 때문에 이 한 장에는 두 사람처럼 보이지만 동일 인물의 전면과 후면의 모습입니다. 진품 신도네는 특별한 날을 기념해서 일반인들에게 공개가 되고 있고 마지막으로 공개된 것은 살레시오 수도회 창립자인 돈 보스코 탄생 200주년이 되던 해인 2015년입니다.


요셉은 아마포 (그리스어 성서  신돈 σινδών, 라틴어 성서  신도네 sindone)를 사 가지고 와서, 그분의 시신을 내려 아마포로 싼 다음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모시고, 무덤 입구에 돌을 굴려 막아 놓았다.
마르코 16장 46절


신도네가 존재하였다는 것은 여러 가지 사실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우선 마르코 복음뿐만 아니라 나머지 세 복음서 (마태오 27,59 루카 23,53 요한 19, 40)에서도 언급되고 있고 그 당시 시신의 몸을 감싸는 일반적인 장례의 풍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 무덤에서 아마포를 발견했다고 요한복음 20장 6절에서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4세기경 시리아 사본에서는 예데사 왕 아브갈이 사도 타데오가 건네준 예수님의 얼굴이 있는 천을 받아 나병에서 치유가 되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고, 544년 문서에는 '사람의 손으로 그려지지 않은' 특별한 형상을 보관하였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944년 에데사 홍수로 동로마 황제가 수의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와 보관하였고 이후 1204년까지 콘스탄티노플에 있으면서 1147년 프랑스 왕이었던 루도비코 7세가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였을 때 신도네가 보관되어 있는 장소에 와서 경배하였다고 합니다.


1204년 4차 십자군 전쟁 후 신도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사라졌고 1205년 십자군 기사 오손드 라 로쉬가 아테네로 옮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약 150년이 지난 1353년 프랑스 리레 (Lirey)에서 다시 발견되면서 공식적으로 문서상에 나타나기 시작을 하였고, 1453년 샤네이 (Chary) 후손들이 소유권을 사보이 왕가에 넘겼습니다. 1532년 12월 3일 프랑스 샹베리 (Chambery)에 보관 중에 일어난 화재로 신도네는 약간의 피해를 받았지만 샹베리의 글라라 수녀원에서 불에 탄 부분을 신도네와 비슷한 천으로 수선을 하였습니다. 1563년 사보이 왕가는 토리노를 수도로 정하였고 1578년 밀라노 추기경이었던 성 카를로 보로메오 (Carlo Borromeo)가 자기 교구에서 몇 년간 전염병이 유행하자 보속의 행위로 수의가 있는 곳까지 순례를 가기로 결정하면서 그의 순례 거리를 단축하기 위해 수도인 토리노로 가져오게 됩니다. 1694년 신도네를 보관하기 위한 특별한 성당이 건축가 과리노 과리니 (Guarino Guarini)에 의해 왕궁과 주교좌성당 사이에 세워졌고 1997년 4월 11일 갑작스럽게 일어난 화재로 인해 신도네는 현재 토리노 주교좌성당에 옮겨져 있습니다. 1983년까지 신도네는 사보이 왕가의 소유로 있다가 이탈리아 마지막 왕인 움베르토 2세 (Umberto II) 사후 유증 하여 교황청 소유로 되어 있습니다.


이탈리아 토리노 주교좌 성당 (뒤편에 수리하는 건물이 1997년 화재가 있었던 신도네 소성당이다)
토리노 주교좌 성당 내부 신도네가 보관되어있는 나무함

신도네에 대한 교회의 역사적 위치를 보면 문서상으로 등장한 초기에는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389년 트로아 (Troyes)의 주교는 교황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교묘하게 그려진 것'이라고 보고하였습니다. 1390년 대립 교황 클레멘스 8세는 현시는 허락하였지만 이것은 하나의 모조품이라는 것을 높은 소리로 외치고 보도록 허락하였습니다. 하지만 16세기부터 교회의 입장은 긍정적으로 바뀌게 되어 1506년 율리오 2세 교황 때부터 미사 때에 공식적으로 공경할 수 있는 전례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1988년 방사성 탄소 측정 결과 1206년에서 1390년의 섬유일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고 이것은 1353년 처음 문서에 등장하는 이 신도네 연도와 일치하였기 때문에 진품에 대한 논쟁도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20세기부터 가톨릭 교회는 진품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려하였고 과학과 믿음의 문제를 분리하여 공식적으로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증명할 부분은 과학자들의 영역에 놓아두면서 신도네는 예수님 수난의 이콘으로 공경과 기도하기를 더 많이 권고하였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 아들의 초상화이면서 모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고통을 즉시 느끼게 해 준다고 하시며 신도네는 '성서의 거울'이라고 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죽음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세상의 모든 악을 짊어지신 '하느님 자비의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콘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초월적인 예수님의 현존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세상의 것에 비추어 드러내시는 예수님의 자비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신도네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첫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남기신 진짜 이콘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비쳐 보인다는 뜻의 이콘은 많은 사람들이 공경하며 그 앞에서 기도를 하지만 천사가 내려와서 그렸든 아니면 성덕이 높은 수도자가 그렸든 누군가에 의해 그려진 간접적인 이콘입니다. 하지만 신도네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며 돌아온 체온으로 당신의 모습을 수의에 남겨놓으신 직접적인 이콘입니다. 이 이콘을 통해 우리는 2000년 전 예수님을 마주하며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시는 진정한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네거티브 사진

사진 필름처럼 네거티브로 보면 신도네에 있던 사람이 더 명확하게 보입니다. 몸에 보이는 백색 부분은 핏자국, 채찍 자국, 못 자국 그리고 이 사람의 얼굴을 더욱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얼굴의 전면과 후면
그리고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분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리고서는,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조롱하였다.
또 그분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분의 머리를 때렸다.
마태오 27장 29-30절


머리에 피가 곳곳에 있고 흘러내리는 모양은 이 사람이 가시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 피는 뒤 머리카락을 타고 목덜미까지 적셔놓았습니다. 이 사람의 얼굴 오른뺨은 좀 더 진하게 표시가 되어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로마 병사들이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때릴 때 맞았거나 손으로 맞아서 부어올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창으로 찔린 옆구리에 모여있는 피와 등 뒤 허리 부분까지 흘러내린 핏자국, 등에는 수많은 채찍 자국이 보인다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이는 직접 본 사람이 증언하는 것이므로 그의 증언은 참되다.
요한복음 19장 32-35절


이 사람의 옆구리를 찌른 창은 5번과 6번 사이의 늑골을 파고들었습니다. 이 창은 비스듬하게 6센티미터 정도의 크기로 상처를 냈고 그 구멍에서는 피와 물이 15센티미터 아래까지 흘러내려 신도네에 누워있는 허리 부분까지 적셔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터'라는 곳으로 나가셨다.  그곳은 히브리 말로 골고타라고 한다. 거기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요한 19장 17-18절


이 사람의 손에 박은 못은 손바닥이 아니라 손목 바로 아래 손가락뼈들이 모이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손금을 이야기할 때 생명선 끝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곳을 손가락으로 눌러보면 대못이 들어갈만한 뼈 없는 부분이 있고 정확하게 로마 병사들은 그 자리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몸을 잘 지탱해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부분에 못을 박으면 엄지손가락의 신경을 건들면서 손바닥 안으로 엄지손가락이 접혀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신도네의 나타난 손가락은 네 개만 보입니다. 못 자국에서 나온 피는 핏줄이 몸 밖에 있는 것처럼 팔뚝을 적시며 팔꿈치까지 흘러가 땅바닥에 떨어졌을 것입니다. 발은 포개어 한 개의 못을 박았습니다. 그래서 아래에 있던 발은 더 많은 피가, 그 위에 겹친 발에는 그보다 적은 피가 보입니다.


예수님의 가시관 모형


신도네에 있던 사람은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일까요?

토리노 대학의 브루노 교수는 경우의 수를 사용하면 신도네의 사람이 누구인지 가까이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즉, 신도네에 남겨놓은 죽음의 흔적으로 나오는 경우의 수를 모두 곱하게 되면 이런 죽음을 맞은 사람이 나올 수 있는 확률을 알 수가 있고 확률이 낮으면 낮을수록 예수님일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동전을 허공에 던져 앞면이 나올 확률은 2분에 1입니다. 주사위를 던져 1이 나올 확률은 6분의 1입니다. 두 개를 같이 던져 동전 앞면과 주사위 1이 동시에 나올 확률은 12분의 1이 되는 것처럼 경우의 수를 늘려가면 신도네의 사람에게 접근해 갈 수 있다는 거죠. 일곱 가지 죽음의 흔적으로 경우의 수를 따져보겠습니다.


  1.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대부분 노예나 강도 혹은 살인자였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정상적인 무덤에 묻힐 확률은 100명당 한 명 정도라고 합니다.


  2. 십자가에 못 박히는 죄수가 가시관을 쓸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어떤 문서에도 가시관 쓴 죄수를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이것의 확률은 5천 분에 1로 하겠습니다.


  3. 예수님은 자신이 못 박힐 횡목을 메고 골고타까지 올라갔습니다. 모든 죄수들이 이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이 가능성은 2분의 1로 하겠습니다.


  4. 마찬가지로 2분의 1 가능성이 나오는 것은 십자가에 손과 발이 모두 못 박히는 경우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형을 당한 죄수들은 손을 끈으로 묶어 십자가에 매달리는 형벌을 당했습니다.


  5. 십자가형을 당한 죄인들은 완전하게 죽이기 위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다리를 부러뜨리게 합니다 (참조:요한 19,31). 하지만 신도네에 있는 사람은 다리를 부러뜨린 것이 아니라 옆구리를 찔러 피를 흘리게 하였습니다. 이 경우의 수는 10분의 1입니다.


  6. 신도네의 사람이 십자가에서 내려져 시신을 닦거나 기름을 바르는 것 없이 바로 신도네로 감싸 장례를 치렀습니다. 왜냐하면 다음날이 유대인들에게는 노동이 금지된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죄인이 이런 경우를 맞닥뜨리는 것은 대략 20분의 1일 것입니다.


  7. 신도네에 감싸 져 있던 이 사람의 죽음에 대한 모습은 선명하게 남겼지만 부패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의 시신이 무덤에 있었던 시간은 대략 금요일 밤부터 주일 새벽까지 30시간 정도였을 것입니다. 지금도 아주 드물게 언론을 통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 이야기를 듣지만 그 가능성은 아주 희박할 것입니다. 무덤에 있던 이 사람의 시신을 마리아 막달레나가 이야기한 것처럼 누군가 무덤에서 꺼내갔다는 가정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경우의 수는 500분의 1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일곱 가지의 경우의 수를 곱해보면 2천억 분의 1이 나옵니다. 즉, 2천억 명이 십자가형을 당했을 때 이 일곱 가지의 경우를 다 포함하고 나올 이 신도네의 사람은 단 한 명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희박한 가능성을 가지고 신도네에 있던 사람이 예수님이 아니면 과연 누구일까요? 예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이런 모습으로 죽을 수 있었을까요? 성서에서는 이 한 명을 빌라도 로마 총독 시절 십자가형을 당하여 죽었다가 삼 일 만에 부활 한 예수 그리스도라고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습니다.


곧 2022년의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사순절이란 말에서 뜻하는 40이라는 숫자는 성서상에 많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단식과 기도 그리고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신 성서 말씀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고 구약에서는 40일 동안 있었던 노아의 대홍수, 모세의 시나이산 40일간 금식, 예언자 엘리아가 호렙산까지 40일간 걸어간 일, 요나의 설교를 통해 하느님께서 니네베를 무너트리기까지 40일 동안 회개의 시간을 주신 사건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까지 40년의 광야 생활에서도 이 숫자는 등장을 합니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성서 상의 40은 준비의 시간입니다. 물론 이 준비는 하느님을 새롭게 만나기 위한 시간이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단식, 고통, 절제, 금욕 등 금지를 나타내는 부정적인 단어가 많이 등장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십일은 하늘나라가 우리 곁에 와있다고 하는 기쁜 소식 즉,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사십일의 시간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이 기쁜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행복한 준비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참아야 한다는 부정적인 준비가 아니라 기쁜 날이 다가온다는 긍정적인 준비가 되는 사순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빛과 어둠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빛만 있었고 빛이 약해지면 어둠이 생기는 것입니다. 행복이 약해지면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이고 기쁨이 약해지면 슬프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에 좋은 것만 창조하셨습니다. 사순절은 원래의 좋은 것으로 찾아가는 시간입니다. 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성당에 있는 예수님의 성 유물과 신도네의 이콘은 고통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늘나라가 가까이 와있다는 기쁨을 알려주시고 계십니다.



카스트렌세 원형 경기장 (1) :

이 원형 경기장은 아직도 성당 뒤편에서 그 형태를 볼 수 있고 271년 아우렐리아 성벽을 세울 때에 성벽과 포함되어 연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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